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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볕 냄새 Jul 07. 2021

싹이 트는 신비를 생각하느라 멈춰서는 사람들을 위해

바다를 사랑한 시인, <침묵의 봄>의 작가 레이첼 카슨

여러분은 바다를 좋아하시나요? 

저는 산도 좋지만, 바다와 강을 바라보는 것을 무척 좋아합니다. 수영을 못해서 깊은 바다 속에 들어가보지도 못했고, 어렸을 적 지리산 계곡물에 빠져 고생한 이후로 물을 두려워하지만, 그래도 바다를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특히 감자 튀김을 먹으며 바닷가에 앉아 햇살에 반짝이는 물결을 바라보는 것, 뉘엿뉘엿 넘어가는 해와 그 주변을 붉게 물들인 노을을 바라보는 것을 가장 좋아하죠. 저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다를 좋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깊은 바다 속에서 어떤 소리가 들리는지 알고 계신가요?

에이 바다에서 무슨 소리가 나겠어? 배라도 지나가면 뱃소리가 나거나, 돌고래 소리라면 몰라도 깊은 바다에서 소리가 난다니 상상이 잘 안되지 않나요? 2차 세계대전 전까지만 해도 깊은 바다는 침묵의 장소일 거라는 생각이 일반적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전쟁 기간 동안 해군들이 적의 잠수함 소리를 들으려고 했을 때, 바닷속에서 아주 시끌벅적하고 다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고 합니다. 새우와 물고기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소동, 오늘은 이러한 바다의 아름다움을 글로 전해준 작가이자 과학자인 레이첼 카슨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동화같은 이야기로 환경 운동의 포문 열다

 

레이첼 카슨의 이름은 그리 낯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녀는 <타임>지가 선정한 20세기를 바꾼 100명 중의 한 사람이자, 화학 살충제인 DDT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환경 책의 고전, Silent Spring, 우리 말 제목으로 <침묵의 봄>이라는 책을 쓴 과학자, 환경주의자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1962년 출판된 <침묵의 봄>은 사람들이 환경문제의 심각성에 대해 깨달을 수 있도록 했을 뿐 아니라, 정부의 정책 변화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이 환경문제를 다룰 자문위원회를 구성하도록 했고, 이 책을 읽은 상원 의원의 제안으로 자연보호 전국 순례가 만들어지면서 4월 22일이 지구의 날로 제정될 수 있었다고 하니까요.

  

  그녀는 암으로 투병하는 중에도 살충제와 핵폐기물 등이 초래할 비극에 맞서 싸우는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자연문학가였고, 무엇보다 서정적인 목소리로 바다와 자연을 노래하는 시인이었습니다. <침묵의 봄>의 맨 첫 번째 이야기 ‘내일을 위한 우화’를 읽어보신 분이라면, 이 과학자가 뛰어난 문학적 상상력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살충제 위험성을 경고하는 책의 첫 장을 파괴된 가상의 마을에 대한 상상으로 시작하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 이야기는 허구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생생하게 와닿아서 ‘아, 무언가 잘못되었구나!’라는 두려움을 느끼게 만듭니다. 그것은 카슨이 생물학자였지만 평소 “과학적 사실에 대한 공헌보다는 자연 세계에 대한 정서적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녀는 “일단 아름다운 것에 대한 감각, 새롭고 모르는 것에 대한 흥분, 연민과 동정, 감탄과 사랑의 감정이 일어나면, 우리는 감정이 반응했던 대상에 대한 지식을 얻고자 한다. 지식을 얻으면 그것은 지속적인 의미를 지닌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과학적 지식보다 자연이 지닌 아름다움, 거기에 담겨 있는 가치를 느끼는 것이 먼저라는 것이죠. 그래서 그녀의 글을 읽으면 금방이라도 바닷속으로 뛰어들고, 숲으로 달려가 깊은 숨을 내쉬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리를 다친 외톨이 세가락도요에 대한 애정과 존경심

  

저는 레이첼 카슨의 유고집 <잃어버린 숲>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몇 번이나 책을 덮고 그녀가 그리는 바다를 상상했습니다. 제가 거닐었던 바다에 대한 추억과 더불어 카슨의 이야기를 따라 뱀장어의 생애와 갈매기의 길을 그려보았죠. 그 중에서도 특히 인상적이었던 이야기는 다리를 다친 듯한 외톨이 세가락도요에 대한 글이었습니다. 한 쪽 다리가 짧은 세가락도요에 대한 카슨의 애정 어린 시선과 존경심이 담긴 이야기입니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다리가 하나뿐인 작은 세가락도요를 또 만났다. 토요일 오후에 만났던 그 새 말이다. 보통의 세가락도요들이 해변 위아래로 돌진해댈 때, 그들의 건강한 다리가 얼마나 반짝거렸는지 생각해보았다. 이 작은 친구가 건강한 오른쪽 다리만 가지고도 뛰고, 또 뛰며 저렇게 빨리 달리는 것은 정말 놀라웠다. 그의 왼쪽 다리가 3센티미터도 안 되게 짧고 뭉툭하다는 것을 이번에 알 수 있었다. 여우 같은 동물들이 북극 지방에서 이 새를 공격했던 것일까, 아니면 덫에 걸렸던 것일까? 그들이 어떻게 먹고 사는지 생각해 볼 때, 사람들은 ‘부적합한 몸’을 가진 그 새가 곧 죽을 거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두 다리 멀쩡한 친구들보다도 분명 훨씬 더 강인했다. 아니, 방금 했던 말을 수정해야겠다. 그는 친구가 없다. 내가 그를 보았던 두 번 다 그는 그저 혼자 사냥하고, 파도를 향해 뛰고, 뛰고, 또 뛰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다가 입을 열고 바쁘게 찍어댔다. 그러고는 뒤돌아 다가오는 파도를 피해 달아났다. 젖지 않으려고 날아서 도망치는 모습은 두 번밖에 보지 못했다. 그 가녀린 다리가 얼마나 힘들까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그렇지만 그의 모든 행동은 영혼의 건전함과 불굴의 정신을 보여주었고, 분명 그것은 불쌍한 새의 수호신이 그를 잊지 않았다는 뜻일 게다.”  
- <잃어버린 숲> (린다 리어 편집, 김선영 옮김, 그물코, 2004) 175쪽

  카슨은 친구가 없고, 다리 한쪽이 짧은 세가락도요를 보며 마음 아파했지만, 단순한 연민을 넘어 그 세가락도요가 도망치지 않고 끊임없이 사냥하고 뛰고 또 뛰는 모습에서 불굴의 정신과 그 영혼의 건강함을 볼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일화가 제 마음에 남은 건 단순히 불쌍한 새의 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 새는 다른 동물일 수도 있고, 또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전 이 이야기를 읽으며 나와 다른 존재의 아픔을 바라볼 때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지 생각했고, 표면적으로 드러난 장애나 상처 너머에 있는 그 영혼의 고귀함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을 기르겠다고 다짐했어요. 그리고 카슨뿐 아니라 저 세가락도요가 지닌 삶의 태도 역시 본받고 싶어요. 그러려면 제 내면이 점점 더 강인해져야겠죠.  



싹이 트는 신비 같은 아주 작은 것을 생각해보기 위해 가던 길을 멈추는 사람


해변에서 본 작은 개가 길을 잃지 않았을까 걱정되어 저녁 무렵 그를 찾아 나섰다가 새우 사냥에 정신이 팔린 개가 길을 잃지 않았음에 안도하는 마음, 고동을 선물로 받고 보석을 받은 것보다 더 기뻐하는 아이같은 마음, 아름다운 해변과 숲을 보는 순간이면 그것을 지킬 수 있도록 아주 돈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는 카슨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커다란 감동이었습니다. 사실 레이첼 카슨의 어릴적 꿈은 과학자가 아니라 작가였다고 하죠. 그래서 대학 때 문학을 전공했는데, 바다에 대한 사랑으로 생물학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해양생물학으로 전공을 바꾸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렇게 바다를 사랑하고, 해변과 바다생물의 이야기를 그려내는 카슨이 대학을 졸업하고 해양 연구소에 근무하기 전까지 단 한번도 실제로 바다를 본 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녀는 바다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황홀경에 빠지고, 바다에 대한 꿈을 꾸고, 바다가 어떤 모습일지 끊임없이 호기심을 품어왔다고 이야기합니다. 지금 이 순간 바다를 꿈꾸는 초롱초롱한 눈망울의 아이가 떠오르네요. 그녀가 바다의 진짜 모습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바다에 대한 고정관념이 없어서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바다에 대한 다음의 이야기를 들으면 더욱 그러한 생각이 듭니다.

“ 해변은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의미한다. 그 변화무쌍한 바다의 모습들 중 사람들이 보통 전형적이라 여기는 모습은 사실 전혀 바다의 진정한 모습이 아니다. 바다의 진정한 정신은 여름 햇살이 담뿍 담긴 평화로운 해수욕장을 핥는 부드러운 파도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것은 동틀녘이나 황혼녘의 거친 폭풍 속이나, 한밤의 어둠 속, 바다의 진실이라 우리가 인정할 만한 어떤 신비스럽고 외로운 해변 위에 존재한다. 바다는 인간애라는 것과 아무 관련이 없다. 바다는 인간에게 극도로 무관심하다. 또한 우리가 인간 존재의 온갖 성가신 것들을 바다 세계의 문턱으로 가져가면, 우리의 귀는 무뎌져서 바다가 말하는 절정의 액센트를 결코 듣지 못한다. ”     
- <잃어버린 숲> (린다 리어 편집, 김선영 옮김, 그물코, 2004) 161-162쪽

이 글을 소리내어 읽으니 또다시 밤바다를 보러 가고 싶은 충동에 시달리게 되네요. 카슨의 글은 이런 기분 좋은 후유증을 남겨 줍니다. 저는 종종 하늘을 올려다보고 구름의 모양이 바뀌는 것을 보는 것을 좋아하는데요. 카슨 덕분에 제가 좋아하는 구름이 적운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잃어버린 숲> 속의 한 구절로 마치겠습니다.     


자연의 세계를 접하는 즐거움과 가치는
과학자를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외로운 산꼭대기, 바다, 숲의 고요함 속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싹이 트는 신비 같은 아주 작은 것을
생각해보기 위해
가던 길을 멈추는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이 글을 읽은 뒤 바삐 가던 길을 잠깐 멈춰볼 수 있기를, 바다와 새의 소리, 바람과 구름이 주는 아름다움을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 이 이야기는 <잃어버린 숲(2004, 린다 리어 편집 엮음, 김선영 옮김, 그물코)>, <침묵의 봄(2002, 레이첼 카슨 지음, 김은령 옮김, 에코리브르)>을 참고하여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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