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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끄러운 세계의 덜컹거리는 인간

김초엽, 김원영 <사이보그가 되다>

by 햇볕 냄새

둘째 동생이 결혼하던 10여년 전, 제부는 (매형으로부터 물려받은) 오래된 엘란트라를 운전했다. 당시 우리 자매들은 모두 차는 커녕 장롱 면허만 가지고 있는 상태여서 그 차를 얻어타고 여기저기 놀러다녔다. 우리가 '트라~'라고 부르던 그 엘란트라가 신형 K7으로 교체되었을 때였다. 처음 새 차를 타고 내릴 때 막내 동생이 역시 승차감이 다르지 않냐고 물었다. 훨씬 부드럽고 편안하다며.


그랬나?

그랬겠지.


음..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는 승차감 같은 것을 잘 구분할 만큼 그리 감각이 민감하지 않다. 나의 하늘색 스파크와 누군가의 벤츠를 번갈아 타고 와도 승차감만으로는 둘을 잘 구분하지 못할 거다. 공간이 넓다는 것은 알겠지. 그래서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내릴 때 문을 열면서 혹시나 작은 흠집이라도 날까 어찌나 조심스럽던지. 차는 값비싼 물건이기도 하고, 또 남자들은 차에 대한 애착이 크다고도 들었고, 무엇보다 ‘새 것’이란 생각이 나를 긴장시켰다. 그래서 나는 금새 편하게 타고 내리던 엘란트라가 그리워졌다. 그런 내게 동생은 "그 차는 문도 고장나서 뒷좌석에서 내릴 때 누가 밖에서 문을 열어줘야 했잖아?"라고 했다. 물론 그 차는 여러 모로 지금의 새 차보다 불편했다. 그치만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매번 앞에서 내려 쨘! 하며 뒷좌석에 갇혀 있던 우리를 구출해주던 둘째 동생을 떠올리는 것은 즐거운 추억이다. 나는 (내 것도 아닌) 그 자동차에 정이 든 것인지, 인격을 부여한 것인지 단순한 탈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지금의 내 차도, 그리 열심히 씻어주고 닦아주고 하지는 못하지만(그것은 타고난 천성이 그리 하지 못하는...ㅜㅜ), 초보 시절 집 주차장 벽에서만도 여기저기 긁고 다니던 나를 태우고 엄청 고생해왔기에 헤어진다고 생각하면 슬퍼진다. 이건 영원히 함께 할 거야! 이런 감정은 아니고, 그간 나 때문에 고생 많았어.. 언젠가 헤어진대도 영원히 잊진 못할 거야.. 이런 느낌이다. 뭔가 잘 나가고 성공했을 때 만난 사람보다 아무 것도 없고 부족한 것투성이일 때 옆에 있어준 사람에게 느끼는 고마움과 애틋함 같은 거. 운전을 능숙하게 잘 해서 자동차에 아무런 흠집도 내지 않을 정도였다면 이런 미안함과 고마움이 덜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서툴러서 나 혼자 많이 박고 긁어먹었다(사실 7년이 지난 지금도...). 사람이었다면 한 마디 했을텐데, 기계라는 이유로 나에게 아무런 탓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맘이 쫌 그렇다. 그래서 친구들이 그 스파크 이제 바꿀 때 되지 않았어? 라고 하면 기분이 이상해진다. 응? 벌써 그렇게 되었나?? 그치만 차는 최소 15년은 타야 하는 거 아니야?? 언젠간 바꿀 날이 오겠지만, 더 좋은 차를 산대도 그때 그 느낌은 아니라서, 처음 하늘색 자동차가 내 것이 되었을 때의 설렘과 고마운 마음만은 영원히 간직할 거다.



전에 근무하던 학교에서 수련회를 갔을 때였다. 밤에 장기 자랑이 열렸고 여러 학생들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했다. 생전 말이 없던 우리반 모범생이 기타를 들고 노래하는 모습도, 세상 까불까불 하던 녀석이 분위기 잡고 애틋한 발라드를 열창하는 것도. 그때 옆에서 나에게 누군가 물었다.


“샘은 누가 제일 잘 하는 것 같아요?”

(아, 나 심사위원이었지!)

“잘.. 하는 애는 좀 더 생각해보구,

내가 제일 좋았던 건 OO이 노랜데요.”

(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마음 속 원픽이 있었다.)

“에?? 그 앤 고음에서 삑사리 났잖아요?”

(어? 그게 원픽인 이유 중의 하나인데)

“전 옛날부터 너무 물 흐르듯이 편하게 노래하는 사람은 잘 한다, 싶긴 한데.. 그다지 많이 좋아지진 않더라구요. 이상하게 조금 애쓰는 게 보이는 쪽이 좋아요.. OO이가 그냥 고음에서 음이탈인 거면 아무 느낌이 없는데요, 아까 표정 봤죠? 진심으로 엄청 열심히 하고, 떨려하는 표정도, 긴장을 누르고 애쓰는 거 보여서. 전 OO이에 한 표!”


물론 내 한 표는 심사 결과를 좌우하진 못했다. 그치만 나는 지금도 노래하던 그 학생의 표정이랑 그날밤을 기억한다. 어쩜 평소에는 까부는 이미지여서 그랬나, 가벼운 듯 하면서도 늘 열심히 하는 걸 좋아해서 그랬나, 모르겠지만ㅡ 어쨌거나 꼭 노래가 아니어도 천재형 인간은 멋있고 대단해 보이지만 심리적 거리감이 있다. 인간미가 없어보여…. 뒤에 숨은 속마음은 저런 사람은 나처럼 빈틈 많은 인간을 이해 못해줄거라는 두려움이 큰 것 같다. 또 그런 사람에겐 내가 필요 없겠지, 라는 마음도.



이제는 꽤 여러 권을 읽어서 좋아한다고 말해도 될 듯한 김원영 작가가 김초엽 작가와 함께 쓴 <사이보그가 되다>에는 '매끄러움을 지향하는 세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글쓴이는 걷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오는 결핍보다 친구들의 매끄러운 몸과 다리를 더 의식했다고 고백했다. 그런데 매끄러움이란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언제부터 우리는 그렇게 매끄러움을 지향하게 된 것일까?


3년 전 가을에 끓는 물을 허리에 쏟아 화상을 입고 한동안 고생했던 적이 있다. 처음엔 주위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고 있다가 꽤 나은 뒤에 불조심해야 한다는 취지로 얘기했는데, 한 사람이 "많이 다쳤어요? 그럼 이제 결혼은 못하겠네요."라고 했다. 그 말에 나는 조금 충격을 받아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잠시 생각해야 했다. "그런 생각은 한번도 안해봤는데,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근데 이 흉터 때문에 결혼하기 싫다는 사람이면 전 오히려 다행이에요. 그런 사람은 저도 별론데, 별로인 사람을 자동으로 피해갈 수 있으니까요. " 그녀의 말에 악의가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첫 마디가 그런 이야기일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해서, 또 설령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해도 그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게 당황스러워서.. 나도 조금 날선 목소리로 말이 나갔던 기억이 났다. 그때 그 말이 두고두고 기분이 나빴는데, 그녀에게 별다른 의도가 없었다는 것을 아는데도 왜 그렇게 상처가 되었을까..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 말을 듣는 순간에 정말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나 역시도 했던 게 아닐까 싶었다. 겉으론 그런 사람은 나도 싫어요!, 라고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지만, 화상 흉터가 생긴 피부를 좋아해줄 사람이 없을 거라는 걱정을 나도 했던 것이다. 그럴테지, 다들 아무런 흠 없이 매끄러운 것을 좋아하니까.


매끄럽다.

도자기 같은 피부, 손으로 쓰다듬었을 때 어디 걸리는 것 없이 쭈욱 미끄러져가는 곡선의 느낌이 연상된다. 어디 돌출되거나 모난 구석도 없고, 번거로운 노력이 필요하지도 않은 매끄러운 자동차, 음이탈이나 엇박 같은 거 없이 매끄러운 노래, 흉터 같은 것 없이 쭉 뻗은 매끄럽고 부드러운 몸. 이게 아름답고 뛰어나 보이는 건 나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내 마음을 움직이는 요소가 빠져 있는 건 왜지. 매끄러운 것은 그것이 타고난 것이 아닌 이상 매끄러워지기까지 수많은 노력이 들어갔을 가능성이 크다. 저 아름다운 자동차, 보기에 매끄러울 뿐만 아니라 기능적으로도 어디 하나 덜컹거리는 것 없이 매끄럽게 착착착 굴러가기 위해서는 그 뒤에 얼마나 많은 보이지 않은 노력과 숨은 노동이 들어갔을까. 노래를 매끄럽게 잘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였겠지. 그런데 매끄러움이 전면에 등장하면서 그 뒤의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아니, 일부러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물 아래에서 발버둥을 치는 백조의 다리보다 우아하게 물 위에 떠 있는 모습 그 자체를 더 원하는 것인지도. 한편에서는 인간미를 들먹이며 죽을둥살둥 힘겹게 노력하는 사람을 칭찬하는 듯 하면서도, 노력하고 애써서 그 정도에 이르렀다는 것보다, 별로 애쓰지 않았는데 그렇게 되었다는 것에 더 열광하는 것 같으니까. 그러고보면 우린 모두 천재나 영웅적인 인간을 원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이 매끄러운 세계에서 진정한 영웅, 강한 자는 누구인 걸까? 이 책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매끄러운 세계에서는 이음새를 없애는
강함(슈퍼맨적인 강함)이 필요없다.
... 심리스한 세계에서 요구되는 능력은
이음새를 없애는 능력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시대의 '강한 인간'이란 반대의 능력,
즉 완전히 매끄러운 세계에
예측하지 못한 구멍을 만드는(이음새를 띄우는) 역량을 지닌 존재일지도 모른다.


가전제품을 만들고 홍보하는 일을 하는 동생은 언젠가 나에게 공기청정기나 세탁기 등을 스마트 앱으로 연결하여 사용하느냐고 물었다.


아니.

그거 하면 훨씬 더 편한데 왜 안해? 언니 정도 나이에도 안쓰니까 나이 든 분들은 더 안하시겠지?

응?? 그냥 앱 연결하고 하는 게 더 귀찮아.


(사실은 어떻게 하는지 몰라, 난 스마트하지 않거든.

그래서 성능 좋다는 기계들을 사다놓고도 맨날 덜커덩거리면서 삐걱대지. 이런 나도 이 시대가 요구하는 강한 인간이 될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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