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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볕 냄새 Jul 05. 2021

내가 싫어하는 것들도 네가 하니까 아무렇지도 않아

영화 <플립>, 전체는 부분의 합이 아니다.

오랜만에 선배 언니와 덕수궁 시립미술관에 들렀다. 우리는 기후 위기에 대한 전시회를 보러 갔다가, 정작 주호민, 주재환 부자의 <호민과 재환> 전시회에 반하고 말았다. 와, 이거 너무 웃겨! ㅋㅋㅋ 이거 삶에 지친 노동자를 상징하는 거 같아. <나의 아저씨>에서 보면 아이유가 맨날 집에 가서 커피 믹스 두 개씩 먹는단 말이야 ㅠㅠ


작품을 보며 감상을 속닥거리는 내게 언니가 갑자기 " 야, 근데 너 엄청 매력 있는 거 알아? 나 지금 반할 거 같아. "라고 훅, 칭찬을 날려줬다. " 그 매력이 뭔지 이따 말해줘. 근데 나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긴장해서 말 잘 못해.. 흑흑 ㅠㅠ " " 그럼 데이트할 때 미술관에 가. 그리고 계속 감상을 말해줘. 오늘처럼. "


이 때까지만 해도 나는 몰랐다. 언니에게 뭔가 거슬리는 것이 있었으리라고는.. 우린 시종일관 화기애애하고 재밌었으니까.


내가 싫어하는 것들도 네가 하니까 아무렇지도 않아


점심을 먹고 나오면서 언니는 내게 말했다.

" 나 오늘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생각들이 확 다 깨졌어. "

" 뭐가? 또 뭔데? "

" 오늘 네가 내가 싫어하는 행동을 했는데도, 이상하게 하나도 안 거슬렸어. "

" 뭐야, 그거 엄청 좋아해야 가능한 거잖아. 언니 나 많이 좋아하는구나. ㅎㅎ

  근데 ... (뭐가 거슬렸을까... ㅠㅠ) 뭐야? 말해줘. 나 조용히 손절당하고 싶지 않아. 고칠 거니까 말해봐. "

" 아니, 하나가 아니라서.... 나 엄청 예민하잖아.  "

" 뭐? 하나가 아니라구? (내가 뭘 도대체 얼마나 잘못했다는 거야 ㅠㅠ) "

" 응, 셀 수 없이 많은데 ㅋㅋㅋㅋ 근데 문제는 하나도 안 싫고 괜찮더라는 거야. "

" 아니 진짜! 나는 언니 행동 중에서 거슬리는 거 하나도 없었는데. 셀 수가 없다니.... (까다로운 사람..) "

" 그러니까 결국 어떤 행동이 좋고 싫고는 안 중요했던 거야. "

" 내가 아는 어떤 분도 그러더라, 평소엔 자기가 싫어했던 행동들을 그 사람이 하니까 괜찮더래. 아무렇지 않더래. 그래서 사랑한다는 걸 깨달았다고. 특정한 행동이 아니라 내가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거지. "


결국 그녀는 나에게 자신이 싫어하는 행동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미술관에서 조용히 하지 않았던 것... 그것 말고는 떠오르지 않았다. 사진 찍어달라고 한 거? 운전할 때 뭐가 걸렸나? 계속 생각해도 모르겠다! 싫으면 그렇다고 말을 하지 그랬어...)


전체는 부분의 합이 아니다


집에 도착하자 문자가 왔다.

오늘 " 전체는 부분의 합이 아니다. "라는 걸 깨달았다고.

음...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나를 이루는 부분들은 마음에 안들지만 전체로는 마음에 든다 이런 건가? 근데 이 언니는 이걸 이제야 안 거야? 어떤 사람을 이루는 하나 하나의 속성이 아니라, 결국 그 사람의 존재가 그 자체로, 하나의 전체로서 나에게 어떤 의미이냐가 훨씬 더 중요한 거지. 좋다고 하는 부분들을 다 갖다가 붙여놔봐야 전체로는 조화도 안맞고, 아무런 느낌이 없을 때가 많으니까. 난 오래 전 알아버렸다. 아, 내가 좋아하는 조건을 다 모아놔도 싫어하는 점을 많이 가진 이 사람과 바꿀 수가 없는 거구나. 그러니까 누군가를 진짜 좋아하면 그 사람은 '대체 불가능'한 것이 된다.


영화 '플립' Flipped(2010)


(출처: 네이버 영화 포스터)


언니의 문자를 받고 문득 이 영화가 떠올랐다. 줄리(나의 영어 닉네임과 똑같다 헤헷^^)와 브라이스의 사랑이야기. 얼핏 보면 줄리가 잘 생긴 브라이스에게 반해서 쫓아다니다가 관계 역전되는(flipped) 첫사랑 이야기 같지만, 이 영화의 주된 테마가 바로 '부분과 전체'이기 때문이다.


줄리는 자연을 사랑하고, 소신 있고 매력적인 소녀이지만, 브라이스의 눈에 비친 그녀는 그냥 자기를 쫓아다니는 귀찮은 여자아이일 뿐이다. 그는 줄리라는 사람 전체를 보지 못한다. 한편 브라이스를 보고 첫눈에 반한 줄리 역시 그의 전체를 보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아름다운 눈빛을 가진 미소년이지만, 딱 그것뿐이었다. (극중 브라이스역을 맡은 배우는 정말로 첫눈에 반할 만큼 잘 생겼다. 하지만 하는 말과 행동을 보면... 그 잘생긴 얼굴이 무색해지는 것은 시간 문제.. 왜 줄리가 빨리 브라이스에게 씌인 콩깍지가 안 벗겨지는지 답답할 정도) 여러 사건들을 겪으며 줄리는 브라이스가 생각만큼 멋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반대로 브라이스는 줄리가 무척 매력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둘의 관계는 오히려 뒤집어진다. 냉담해진 줄리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브라이스가 노력하는 상태에 이른 것.


두 사람이 해피엔딩을 맞이하게 된 것은 (영화이기도 하고) 순전히 브라이스의 할아버지 덕분이다. 안타깝게도 브라이스는 어떤 사람을 전체로 볼 수 없는 가정 환경에서 컸다. 그의 부모, 특히 아버지는 불안정하고, 자격지심이 강하고, 사람을 겉으로 드러나는 일면만으로 판단하는 성향을 지닌 권위적인 인물이었다. 그런 그에게 줄리 베이커가 가진 매력을 알려주는 사람은 브라이스의 할아버지다. 할아버지는 무지개 같은 사람, 전체로 보았을 때 빛이 나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알려준다. 줄리를 보고 세상을 떠난 할머니를 떠올렸던 할아버지는 처음부터 줄리가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 어떤 사람은 평범한 사람을 만나고, 어떤 사람은 광택나는 사람을 만나고, 어떤 사람은 빛나는 사람을 만나지. 하지만 모든 사람은 일생에 단 한번 무지개 같이 변하는 사람을 만난단다. 네가 그런 사람을 만났을 때 더이상 비교할 수 있는게 없단다. "


브라이스에게 할아버지가 있었다면, 줄리에게는 다정하고 훌륭한 아버지가 있다. 아버지는 줄리에게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봐야 한다고, 전체는 단순히 부분의 합이 아니라고, 때로 어떤 사람은 전체로 보면 부분보다 더 못하기도 하다고 이야기한다.


" 항상 전체 풍경을 봐야한단다. 그림은 단지 부분들이 합쳐진 게 아니란다. 소는 그냥 소이고, 초원은 그냥 풀과 꽃이고, 나무들을 가로지르는 태양은 그냥 한줌의 빛이지만 그걸 모두 한 번에 같이 모은다면 마법이 벌어진단다. "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며 줄리는 자신이 반한 남자가 전체로 보았을 때 부분보다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할아버지 덕분에 진실을 보는 눈을 기른 브라이스가 다시 찾아왔고, 둘은 해피엔딩을 맞았다. 줄리는 달라진 브라이스의 진심을 볼 줄 알고 그를 용서하는 너그러움까지 지녔다! (물론 현실에서는 브라이스처럼 변하기 쉽지 않다. 아마 보통의 남학생이었다면 줄리가 아니라 그냥 다른 이쁜 여학생을 좋아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냥 그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가 누군가를 좋아할 때는 어떤 한 부분 때문에 시작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눈빛, 미소, 목소리... 누군가가 싫어질 때도 마찬가지다. 언니가 거슬려했다는 그 알 수 없는 수많은 것들 중에 뭔가 하나에 걸리면 방금 전까지 좋았던 사람이 일순간 싫어지기도 한다. 나도 그랬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렇게 좋아했던 사람도 다시 보니 어.. 아닌 것 같다, 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또 특정한 부분 때문에 싫었던 사람의 숨겨진 매력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리고 또 그렇게 전체로서 그 사람을 이해하게 되면 부분적인 거슬림이 사라지기도 한다. 일부러 노력해서 이해하는 것과는 다른데, 언니가 오늘 내게 느꼈다는 감정처럼 지금까지 싫던 그것이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되는 것이다. 단지 그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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