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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볕 냄새 Nov 02. 2021

"난 돌아갈 힘을 남겨놓지 않았거든", 빈센트

유전자가 지배하는 세계 속 자유로운  인간, <가타카>

대학시절 선생님이 되기 위해 함께 공부하던 친구가 있었다. 나는 비사범대에서 교직 이수를 했기 때문에 학과에서 임용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은 우리 둘뿐이었다. 그래서 함께 노량진 학원에 다니고, 가산점에 필요한 컴퓨터 자격증도 땄다.


20년 전 어린 눈으로 볼 때도 그 친구는 여러 모로 본받을 점이 많은 사람이었다. 자기 관리에 철저했고 언제나 열심히 공부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잘 배려하고 공감하는 좋은 성품을 지녔다. 남학생들에게 인기도 많아서 가끔은 질투가 나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기도 했는데, 그 친구가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어서 질투보다 오히려 마음 속에 은근한 동경과 존경심을 품고 있었다. 경험에 비추어 보건대 상대가 정말 훌륭한 성품을 지니면 능력이나 그밖의 것들을 질투하기도 어려운 거 같다.^^


내가 임용 시험에 합격한 것의 팔할은 그 친구 덕분이다. 서울에 연고가 없어 시험 정보를 얻을 루트가 없었던 내게 자신이 구해온 정보와 자료를 아낌없이 공유해주었으니 말이다.


대학 4학년 겨울, 우리는 함께 임용 시험을 쳤다.

같은 지역, 같은 학교에서 근무하게 되면 좋겠다며 경기도로 시험을 보자는 이야기를 종종 했는데, 나는 같은 날 논술이며 한문 시험까지 한꺼번에 다 치를 자신이 없어 인천을, 친구는 경기도를 선택했다. 나는 정말 운이 좋았지만 친구는 아주 근소한 점수 차이로 불합격했다. 연락해서 무슨 말을 어떻게 하지... 고민하던 내게 친구가 먼저 전화를 했다. 역시!! 나보다는 훨씬 더 마음도 넓고 성숙해서 함께 있으면 언제나 배우게 되던 친구였다. 그런데 그날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축하한다는 말보다, 다시는 임용 시험을 치지 않겠다는 친구의 다음 말이 정말 오래도록 내 마음에 남았다. 그간 공부한 것이 아까우니 한번 더 보면 어떻겠느냐는 나의 말에 친구는 담담히 말했다. 


나는 이 이상은 할 수 없다고 할만큼
최선을 다 했어.
그런데도 안되는 거라면
이 시험은 내겐 아닌 것 같아.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자신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친구가 정말 부러웠다. 얼마나 열심히 했으면 저렇게 말할 수 있지? 시험은 내가 붙었는데, 나는 그 친구에게 또 다시 감탄하고 말았다.


당시 스물 네살이던 우리가 결과적으로 시험에 붙었는가 아닌가는 긴 인생을 놓고 보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더 결정적인 것은 삶을 대하는 태도였다. 일 년에 한번 보는 시험 통과가 아니라, 매일의 나, 작은 일상 생활 속에서의 내가 모여 결국 내 인생의 후반부.. 마지막을 결정짓게 되니까.


그 날 나는 "너는 저런 말을 할 수 있을만큼 모든 것을 쏟아부은 적이 있어?"라고 자문했다. 물론 나도 열심히 공부했다. 임용 시험 준비 기간은 마지막 몇 주를 제외하면 내 인생에서도 가장 열심히 공부한 시기였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자신은 아무래도 없었다. 아마 내가 불합격했다면 한동안 방황하다가 다시 시험을 보지 않았을까...


한 가지 다행이라면, 내게는 훌륭한 친구가 있었고 나는 최소한 그 의미와 가치를 알아볼 수 있는 안목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때 나는 더 이상 할 수 없을만큼 최선을 다했다는 말을 들으며, 그런 순간을 상상해보았다. 시험이든 일이든, 사랑이든.. 그게 뭐가 되었든 스스로 그런 말을 할 정도라면 결과가 어찌되었든 나는 나 자신에게 만족할 것 같았다. 그건 정말 중요했다. 그 친구와의 대화에서 배운 것은 시험에 합격한 것보다 더 큰 의미와 깨달음이었다.


그리고 교사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나는 종종 그 친구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내 제자들이 그런 마음가짐과 태도로 살기를, 또 언제나 내가 그렇게 살 수 있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물론 모든 것에 과도한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이 의미 있게 선택한 것에 대해서는 책임감을 갖고 최선을 다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런 작은 순간들이 모여 자기 자신을 믿고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거 아닐까.)




내가 널 이길 수 있었던 건
돌아갈 힘을 남겨놓지 않았기 때문이야.


위의 말은 SF 영화 <가타카>에서 주인공 빈센트(에단 호크)가 동생과의 수영 내기에서 이긴 뒤 했던 말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대사 중 하나다. <가타카>는 1997년 개봉한 영화로, 만들어진지 20년도 넘은 작품이다. 하지만 내겐 그 어떤 SF보다 강한 인상을 남겨주었다. 그것은 현란한 최첨단 기술이 아니라, 타고난 한계에도 불구하고 강한 의지로 자신의 꿈에 다가가려 노력하는 한 인간의 가능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바로 주인공 빈센트였다.


영화 속 배경은 유전공학과 과학기술이 발달한 미래 사회로, 유전자 조작을 통해 태어날 아이의 지능, 육체적 힘 등이 결정되며 우성인자와 열성인자로 인간의 등급이 나뉘어진다. 부부의 자연스러운 사랑의 결실로 태어난 아이는 온갖 열성 인자를 지닌, 이른바 '부적격자'로 분류되고, 유전자를 조합한 아이는 우성 인자로 인정받는 현실 속에서 빈센트는 '부적격자'로 태어난다. 그는 심장도 약하고, 범죄자가 될 가능성도 가지고 있으며 30대 초반에 수명을 다 할 거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아간다. 반면 완벽한 유전인자를 가지고 태어난 동생 안톤은 그보다 모든 면에서 뛰어나다.


두 사람은 어린 시절 자주 바닷가에서 수영 대결을 했다. 심장이 약한 빈센트는 체력이 강한 동생에게 늘 졌다. 그러나 어느날 동생을 이기고 물에 빠져 위험에 처한 동생을 구해내면서 그는 타고난 육체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우주 비행이라는, 부적격자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꿈을 이루기 위해 도전한다. 모두가 안 될 거라고 생각하는 꿈을 그는 차근차근 현실로 만들어간다.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그의 신분이 들통날까봐 조마조마했다. 들키지 않고 꼭 꿈을 이루기를 간절히 바랬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나 역시 모든 것이 완벽한 인간에게는 아무런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실제로 그런 인간은 존재하지도 않겠지만, 설령 있다고 해도 결핍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온갖 인간적인 매력이 결여되어 있다. 정호승 시인이 그랬던가, 눈물과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고. 두려움이 없는 상태에서 용기라는 것이 성립되지 않는 것처럼, 나는 약점을 지닌 인간을 좋아한다. 그 약점에도 불구하고 좋아하고, 그 약점 때문에 좋아한다.


어른이 된 뒤 다시 만난 동생과 마지막 수영 시합을 펼치고 빈센트는 동생을 이긴다. 동생은 "열성 인자를 가진 형이 어떻게 나를 이길 수 있어?"라며 묻는데, 그때 빈센트의 대답이 바로 "나는 돌아갈 힘을 남겨두지 않았기 때문이야" 였다. 아... 인간이 지닌 가능성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컸다. 빈센트는 육체와 물리적인 한계를 지녔지만, 완벽하게 만들어진 동생보다 훨씬 더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자신의 삶을 선택하는 자유로운 인간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약점이 그를 더 자유롭게 만들어주었다.


빈센트에게 "바보같이!! 돌아갈 힘을 남겨뒀어야지! 잘못하면 바다에 빠져 죽는 거잖아. 역시 너는 비합리적이고 판단력이 부족해"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까. 아마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의 말에 어딘지 모르게 가슴 한구석이 뭉클..했을 거라 생각한다.(나만의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유전자 조합을 통해 만들어진 완벽한 인간이 매력 없는 것처럼, 완전히 (경제학적 측면에서) 합리적인 사람에게도 그리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언제나 도망갈 구멍을 남겨놓고, 비용과 이익을 계산하고, 이만큼만... 하고 마는 삶은 안전하지만 내 마음에는 아무런 변화를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나도 그럴 때가 많다. 아니 대부분 요만큼만... 하고 한 발을 빼고 있었다는 게 더 솔직할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할 수 없을 정도로 했다는 친구와 돌아갈 힘을 남겨놓지 않았다는 빈센트의 말 오래도록 가슴에 남아 불쑥 불쑥 내 인생을 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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