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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볕 냄새 Nov 03. 2021

비밀을 지키기 위한 삶, 한나

그림자를 숨길수록 삶은 더 위험해진다,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나의 삶은 삼십대 중반을 기점으로 많은 것이 달라졌다. 직업이나 거주지 등 외적인 조건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지만 내면에서는 많은 변화를 겪어야 했다. 그 속에 있을 때는 힘들어서 피하고만 싶었던 시간들이었지만, 돌이켜보면 꼭 필요한 과정이었다. 그것은 '나'라는 사람을 더 깊이 이해하고, 한 때는 미워했던 나 자신과 화해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출발점에는 칼 구스타프 융의 책, <당신의 그림자가 울고 있다(로버트 존슨, 에코의 서재, 2007)>가 있었다.

나는 선한(good) 사람이 되기보다
온전한(whole) 사람이 되고 싶다.


'융 심리학이 밝히는 내 안의 낯선 나'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을, 나는 스물 아홉살이 되던 해 만났다. 생각해보면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그냥 서른이 되었다면 어땠을까. 나는 서른 이후에는 다른 삶을 살고 싶었다. 내 인생을 내가 선택하고 싶었고, 두려움과 불안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머릿속을 따라다니는 걱정인형을 던져버리고 싶었다. 무엇보다 모든 것은 내가 원해서 선택한 것이었다고 말하고, 그게 뭐든 푹 빠져버리고 싶었다. 이런 생각은 청소년기부터 20대 내내 내 인생의 가장 큰 고민이었지만,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첫 연애가 끝나고 이런 고민은 더 깊어졌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나는 남자친구를 많이 좋아했지만, 결국 우리가 헤어진 것이 서로에게 더 나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물론 당시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이별을 통보받은 쪽이었고, 여전히 그를 많이 좋아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별은 얼마나 더 유예되느냐의 차이일뿐, 언젠가는 끝이 날 것이었다. 더 늦었다면 나는 아마 낭만적인 환상을 사랑이라고 착각하며 더 오래 허우적댔을 것이다.


억눌린 나의 자아, 그림자


혼란스럽던 20대 마지막 해, 융은 '그림자'라는 개념을 내게 알려줬다. 그림자는 두려움과 무지, 수치심, 애정 결핍 등에 의해 무시된 성격을 일컫는 말이다. 쉽게 말하면 '억눌리고 부정당한 자아'라고 할 수 있다. 남들이 몰랐으면 하는 내 모습, 때로는 나조차도 의식하지 못하는 내 모습 말이다.


융은 그림자를 억누를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다른 방식으로" 사용한다면, 우리는 빛만을 추구하는 반쪽짜리 인간이 아니라, 빛과 어둠을 통합해  온전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를 진정한 빛, 더 큰 빛으로 나아가게 도와준다.


나는 남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욕심이 많고, 질투심이 있고, 불안감도 높은 사람이다. 동시에 내 안에는 친절함과 동정심, 인간에 대한 애정과 헌신에 대한 욕구가 함께 존재한다. 둘 다 내 모습이고, 나라는 사람을 이루는 요소이다. 하지만 후자는 사회적으로 용인되고 권장되는 미덕인 반면, 전자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그러다보니 커가면서 나를 포함한 우리들 대부분은 점점 앞의 나를 억누른다. 욕심이 없고, 관대하고, 불안함이나 두려움이 없는 사람인 것처럼 사는 것이다.


그렇게 포장하다 자신마저 속이는 순간이 오면 정말 최악의 상황이 닥칠 수도 있다(물론 나는 인간이 평생 그런 식으로 자신을 기만한채 가식적으로 살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남들은 속여도 어떻게 자신을 속이겠는가, 정확히 실체를 인식하지 못한다고 해도 끊임없이 불안하고 뭔가 비어 있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 안에는 여전히 그러한 욕망과 성질들이 존재하는데, 그런 것들이 없다고 속인채 나의 부정적인 모습을 억누르면, 대개 그것은 타인에 대한 투사(project)로 나타난다.


만일 네가 어떤 사람을 미워한다면,
분명 그 사람 안에
네 자신에게 있는 일부분이 있는 것이다.


몇년 전 헤르만 헤세의 전시회에 갔다가 위의 구절을 발견하고 깊이 공감했다. 타인의 어떤 면을 유난히 싫어한다면, 그건 그 사람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자신이 싫어하는 자신의 모습, 즉 자신의 그림자이다)이다. 가장 흔히 일어나면서도 최악의 결과를 초래하는 것은 바로 다름 아닌 자녀에게 자신의 그림자를 투사하는 것이다. 아이의 어떤 면이 유독 거슬린다면, 그게 자신이 싫어하는 자기 모습을 닮아 그런 것은 아닌지... 꼭 한 번 생각해볼 일이다. 만약 부모가 자신의 억눌린 그림자를 직면하고,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다면 아이와의 관계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가 좋아질 것이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배려하고 인간관계에 신경을 쓰면서 살아간다. 하지만 나를 이해하고 배려하며, 나 자신과 좋은 관계를 맺지 못한다면 늘 무언가가 비어있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이것은 이십 대를 거치면서 내가 안고 있던 기분 나쁜 느낌이자, 불안함이었다. 융은 " 당신은 온전해지고 싶은가? 아니면 선해지고 싶은가? "라고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악이 아니라 선을, 어둠이 아니라 빛을, 미움이 아니라 사랑을 지향하라고 배우며 자랐다. 하지만 어둠이 없다면 빛이, 두려움이 없다면 용기가 성립하지 않는다. 질투나 분노, 갈망이 없이 사랑이 성립될 수 있을까? (나는 사랑을 하면서는 아무리 애써도 쿨한 사람이 될 수가 없었다. 천성적으로 밀당 같은 것도 불가능했다. 오히려 깊이 사랑하기 때문에 분노하고 질투했고, 다른 사람이라면 아무렇지 않았을 일이 서운해 견딜 수가 없었다.)


더 놀라운 것은 어둠을 억누르고 무시한 채 빛만을 쫓다보면 반대로 어둠이 더 커진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어둠이 자기 인생 전체를 지배하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그렇게 우리는 평생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그림자와 비밀을 숨기느라 진짜 자신을 잃어버리고 인생을 허비할 수도 있다.


당신은 문맹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게 두려워
반인륜적인 범죄자가 되는 길을 택한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가?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라는 영화에는 한나(케이트 윈슬렛)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한나는 성실하고, 길에서 만난 낯선 소년을 도와줄만큼 친절하다. 하지만 한나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비밀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글을 읽지 못하는 '문맹'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단지 글을 읽지 못한다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이후 그녀의 사랑과 삶 전체를 바꿔버리는 아주 강력한 요인이 된다.


한나는 마이클을 좋아하면서도 자신의 비밀을 솔직하게 밝힐 수가 없었다. 마이클 아버지의 서재에 가득찬 책을 보며, 그리스 고전을 읽는 마이클을 보며, 함께 떠난 자전거 여행에서 메뉴판조차 읽을 수 없는 한나의 마음은 얼마나 불안했을까...  결국 한나는 회사에서 사무직으로 승진시켜주겠다는 제안을 하자, 문맹임이 드러날까 두려워 도망쳐버린다. 그리고 두 사람은 세월이 지나 나치 전범 재판에서 마주친다. 한나는 유대인 수용소의 감시자 직책을 맡았던 전쟁 범죄자로, 마이클은 재판을 참관하러 온 법대생으로. 그곳에서 마이클은 그녀의 오랜 비밀을, 갑자기 자신을 떠난 이유를 깨닫게 된다. 한나는 재판정에서도 자신이 문맹이라는 사실을 숨기려고, 나치를 도와 자신이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말해버린다. 모두가 어떻게든 자신의 죄를 줄여보려 변명하는데, 한나는 실제로 자신이 했던 일보다 더 큰 범죄를 인정해버린 것이다.


'문맹'임이 드러나는 것보다 범죄자가, 그것도 반인륜적인 전쟁 범죄자가 되는 것이 더 나은 걸까. 마이클은 그런 한나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케이트 윈슬렛이 너무 연기를 잘해서였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한나가 안타까워서 미칠 것만 같았다. 그녀가 한심하다거나 답답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나는 한나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나에게도 '무능함'에 대한 두려움이 크게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하는 남자가 보고 있는 상황에서 내가 가진 수치심의 근원, 평생 숨겨왔던 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자신을 숨기고, 도망치고, 결국에는 범죄까지 저질러버리는 한나가 더 안타까웠다.


무지하다는 것이 사랑받지 못할 이유인가를 누가 묻는다면 나는 아니라고 답하겠지만, 그건 머릿속의 규범일뿐... 실제의 나는 똑똑하고 능력 있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엄청 노력했고, 지금도 하고 있다^^ 차이점이 있다면, 과거에는 나의 무능함을 숨기는 데 많은 에너지를 할애한 반면, 지금은 잘 할 수 있는 것과 아닌 것을 구별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는다는 것이다. 나는 어떤 부분에서는 엄청 커다란 구멍을 가지고 있고 상식적인 것조차 모르는 게 많다(특히 자동차, 컴퓨터 등 기계 관련된 것). 하지만 또 어떤 분야에서는 스스로 흡족할만큼 잘 해내고 있다.


억누르기보다 수용하고, 긍정적인 방식으로 활용하는 것


그림자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의 일부분이고, 세상 모든 것에는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이 동시에 존재한다. 완전하게 흰 것도, 완전히 검은 것도 없다. 융의 '그림자' 이론을 접한 뒤 나는 나를 포함한 누군가의 단점이나 거슬리는 면을 발견할 때, 그러한 점이 도움이 될 때가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 급한 성격은 때에 따라 일을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데 도움이 되고, 까탈스러운 성격도 일을 꼼꼼하게 수행하거나 자신을 관리하는 데 도움이 된다. 질투도 적절한 수준을 유지하면 연인관계를 좋아지게 만들거나 성장의 동력이 될 수 있고, 불안은 신중한 태도를 갖고 준비성을 높일 수 있게 해준다. 때로는 센스 없다 여겨지는 어리숙함이나 무지함마저 갈등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결국 자신 안의 어떤 부분을 숨기고 부정하기보다 그것이 가진 힘과 에너지를 긍정적으로 발휘할 수 있게 조절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 이것이 인생을 어떻게 만들어나갈지를 좌우하는 더 큰 열쇠다.


질투와 불안, 무능함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그림자를 수용한 뒤부터, 그것은 내게 성장의 동력으로 쓰이고 있다. 나는 완벽한 사람을 꿈꾸지는 않지만, 그 자리에 머물러 있고 싶지도 않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든 어제보다 조금 더 나아지고 싶다. 또 나는 명예에 대한 욕구가 강하다. 그래서 남들의 주목을 받는 게 부끄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름을 남기고,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아마 그런 욕구 덕분에 본업을 하면서도 계속 글을 쓰거나 자기 계발에 매진할 수 있는 에너지를 갖게 되었을 것이다.


자신의 그림자와 대면하는 용기


한나와 같은 고민, 선택은 영화 속에나 존재하는 일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문맹'이라는 그림자의 자리에 어떤 것이든 들어갈 수 있다. 그 그림자가 자신의 인생을 지배하고, 그것을 숨기는 데 몰두하느라 진짜 나를 모른 채 살아갈 것인지.. 그림자를 인식하고, 수용하며 다른 선택지를 택할지는 각자의 몫이다. 하지만 경험에 비추어 보건대, 흔히 말하는 자신의 밑바닥, 즉 그림자를 마주하는 것은 괴롭지만 해볼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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