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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볕 냄새 Nov 16. 2021

함께 오르는 언덕 길

<귀를 기울이면> 속 시즈쿠와 세이지

대학교 4학년 무렵이었던가ㅡ

일본에서 어학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동생의 가방에 <귀를 기울이면>이라는 애니메이션 DVD가 들어있었다. 둘이 이 영화를 보고 남자 주인공 세이지에게 반해서 한동안 누가 이상형을 물으면 세이지 같은 남자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도서카드에 적힌 세이지, 라는 이름에 환상을 품고 있던 시즈쿠에게 그가 “ 넌 책을 너무 많이 봤구나.”라고 했는데, 나도 그런 환상 같은 걸 가지고 있어서 그 말에 쿡 찔려버렸다.)

극중 세이지가 중학교 3학년 정도였던 걸 생각하면, 너무 어린데도 나이에 안맞게 남자답고 심쿵하게 만드는 면이 있었다. 지브리 영화의 수많은 남자 주인공 중에서 가장 잘 생겼다거나 엄청 다정한 캐릭터도 아닌데(오히려 초반엔 잘난 척하고, 심술궂게 느껴지는 캐릭터), 이상하게 세이지가 제일 좋았다.


그건 세이지가 일찌감치 진로를 정하고 자기 꿈을 향해 나아가는 소신 있는 소년이었기 때문일 거다. 고작 중3인데, 바이올린 장인이 되겠다는 확고한 꿈을 가지고 유학길에 오르는 세이지는 여느 어른보다 더 어른스러웠다. “ 해 보지 않으면 자신에게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수 없다. ”는 말로 세이지는 자신의 가능성을 시험한다.

그런 어른스러움 뒤에는 풋풋하고 귀여운 소년의 모습이 숨겨져 있어서 더욱 매력적이다. 처음 만난 날 직설적인 말로 시즈쿠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지 못했지만, 세이지는 오랫동안 시즈쿠를 좋아해왔다. 그래서 책을 좋아하는 시즈쿠의 눈에 띄려고 먼저 도서카드에 이름을 적기 위해 엄청 열심히 책을 읽었던 순정남이기도 했다. 옥상에서 시즈쿠에게 그 사실을 고백할 때, 볼이 살짝 붉어진 세이지는 정말 귀여웠다. ^_^

그리고!

세이지는 시즈쿠의 재능을 알아보고 꿈을 응원해주는 사람이었다. 처음 만난 날 시즈쿠가 개사한 노래를 놀렸지만, 그는 시즈쿠에게 글을 쓰는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아봐주었다. 남들은 잘 모르는 내 안의 무언가를 알아봐주는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안좋아할 수가 있겠어?

하지만, 결정적으로 내가 이 영화 속 세이지를 좋아하는 건, 세이지라는 캐릭터 자체가 가진 매력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시즈쿠와 맺는 관계, 그 속에서 보여주는 두 사람의 태도 때문에 이 영화는 내게 인생 영화가 되었고, 세이지도 이상형의 남자 주인공이 된 것이다. 그러니까 세이지와 시즈쿠는 세트다^^ 시즈쿠가 있어서 세이지의 매력이 드러나니까ㅡ

요 중3 아이들의 연애가 내가 꿈꾸는 이상적인 연애가 되어버린 순간! 둘은 서로의 꿈을 응원하면서 함께 성장해나가기를 바란다. 시즈쿠는 세이지가 앞서 나가는 것을 부러워하고, 너무 멀어진 것 같아 불안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를 동경하고만 있는 게 아니라, 자신도 그에 못지 않은 사람이 되려 글쓰기에 매진한다. 그래서 유학길에 오르는 세이지와의 이별에도 흔한 눈물 따윈 없다. 그리고 세이지는 자신의 꿈을 위해 직진하는 인물이지만, 귀국하자마자 새벽에 자전거를 타고 시즈쿠를 만나러 달려오는 다정함을 지녔다. 마음 속으로 시즈쿠의 이름을 불렀더니 정말로 시즈쿠가 나왔다는 말은 아직 어린 애답다^^

그 새벽, 세이지는 시즈쿠를 자전거에 태우고 힘겹게 오르막길을 오르며 이렇게 말한다.


너를 태우고 언덕길을 오르기로 결심했어!

그러자 낑낑대며 페달을 구르는 세이지의 자전거를 뒤에서 밀어주면서 시즈쿠가 이렇게 답한다.


너한테 짐만 되기는 싫어!
나도 도움이 되고 싶단 말이야.


이 장면이야말로 두 사람의 관계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아니었을까. 이 영화는 첫사랑을 테마로 하고 있지만, 마냥 두근대고 설레는 감정이 아니라 자신의 미래와 진로에 대한 고민, 꿈을 향한 도전 등이 더 중요한 의미로 다가온다. 세이지와 시즈쿠의 사랑은 그 속에서 서로를 알아보고, 응원하고, 기다려주며 더욱 단단해진다. 꼭 훌륭한 바이올린 장인이 될테니까 자신과 결혼해달라던 세이지의 고백이 조금 쌩뚱맞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그 무모하고 용감한 고백이 멋있어 보였던 쪽이었다^^

여름이 되면 지브리의 영화들이 떠오른다.

<추억은 방울방울>은 어린 시절과 화해하는 법을 알려주고, <바다가 들린다>는 학창시절 어긋나버린 마음을, 그리고 <귀를 기울이면>은 내가 꿈꾸는 관계를 되새겨준다.    


서로를 통해 진짜 나에게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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