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로 그리고 싶은 그림이 있지도 않는데
기분이 안 좋아서 밖을 나왔다가 커다란 운하를 보면서
또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생각이 들려서
백발이지만 멋 부리기 좋아하는 아저씨가 운영하는 화방에 들렸어
그곳에서 분명 봄인데도 이상하게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너를 보면서
이 사람 참, 재미있는 사람이네라고 생각했어
내 몸만 한 캔버스와 나는 붓을 굵게 잡는 버릇이 있어서
붓의 숱이 다 마모되어버려서 또 새로운 붓을 샀지
아저씨 말로는 그럴 거면 그냥 페인트 붓을 사라고 웃으며 말하더라
그러게, 내가 손이 거칠어서 그런지 내 그림의 터치감은 참 거칠더라
내 몸만 한 캔버스를 힘겹게 들고 가게 문을 열고 나가려니까
뒤에서 네가 문을 열어주길래 고맙다고 말했어
너의 품에 그려져 있는 무언가를 보았는데 나는 또 홀린 듯
네 그림을 모방하고 싶어지더라
내가 아무 말 없이 그 그림만 바라보니까
넌 부어오른 눈이 부끄럽지도 않은지 내 시선에 빠져서
선글라스가 흘러내린지도 모르고 뭐 하는지 물어봤지
이제 보니까 웃긴 사람은 나였네
그렇게 우리는 봄이지만 전혀 봄 같지 않은 거리를 걸었지
처음 보는 너를 우리 집으로 초대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찻잔에 대접한 이유도
난 너의 그림을 사랑해서 그런 게 아닐까
서로 몇 번 보는 사이가 되어서 우리 집에 놀러와
정원을 보면서 풍경을 그리는 너의 붓의 터치감에 난 놀랐어
나는 붓을 굵게 잡아서 덩어리 지게 그림을 그리는데
넌 선 하나하나 살아있는 거 같더라
유화로 어떻게 그렇게 그리는지 신기했어
붓을 바꿔보면 나도 그런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내 습관은 몇십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더라
오랜만에 너의 그림을 보았어
너는 여전하더라 근데 말이야
넌 역시 인물화가 예쁜 거 같아
넌 사람의 눈을 참 좋아했잖아
나는 전부를 좋아해서 풍경을 좋아하거든
그때 내가 입었던 옷이랑 내 헤어스타일은 하나도 맞은 게 없는데
내 눈은 똑같더라
나 아직도 그 눈을 가지고 있을까?
세월이 이렇게 흘렀는데 말이야
네 기억 속엔 아직도 그 눈망울을 가지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