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
초3 때인가. 학교에서 글짓기 숙제를 받아놓고 미루고 미루다 제출 전날 밤 식탁 앞에 앉아(당시엔 내 방이 없었다.) 오만상 인상을 쓰며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지어 내야 한단 말인가 고뇌에 빠졌던 기억이 있다. 차라리 주제를 주고 맞춰서 써라 하면 쉽겠구먼. 주제, 소재 전부 스스로 발굴해서 써야 하는 숙제였다. 원고지 10매 이내였나.
빨간 벽돌칸에 제목이 들어갈 줄을 남겨 놓고 그 아래 학년 반 이름 쓰고 무념무상이었다. 엄빠는 워낙에 내 공부에 관심이 없으셨었는데. 시험을 언제 보는지, 반에서 몇 등을 하는지. 심지어는 어느 대학을 갈 건지 묻지도 않으실 정도로 나한테 모든 걸 맡겨두시고 짐 한 덩어리 떼고 지내오신 분들이다. 그러니 내가 글짓기 숙제로 고민을 하는 것이 그리 심각해 보이지 않았으리라.
“엄마, 나 글짓기해야 하는데 무슨 얘기 쓰지?”
“니 숙제를 왜 나한테 물어. 알아서 해~”
물어본 내 탓이 크다.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내 방을 가질 수 있었는데. 그 전까지 내 공간은 거실이었다. 가족끼리 밥도 먹고 텔레비전도 보고 쉬는 날 뒹굴거리기도 하는 거실이 비면 라디오도 듣고 책도 보고 낮잠도 자고..(공부했단 말은 못하겠다..) 그 날도 저녁을 먹고 치운 식탁에 앉아 짱구를 굴리고 있었는데. 부지런히 저녁 먹은 상을 치우는 엄마, 텔레비전에 꽂힌 오빠, 신문을 펼치고 맥씸 커피 한 잔 들이키시는 아빠. 가 시야에 들어왔다. 가만 지켜 보니 어린 마음에도 그 모습이 마음에 안정이 되었었나 보다. 가족이 같이 있는 일상이.
그 시기 즈음 보험회사 일을 시작하시고 제 2의 인생을 시작한 엄마의 고단한 뒤태, 알람시계가 없이도 매일 새벽 6시에 일어나셔서 물 한잔 들이키시고 고된 일터로 나가 15시간 후인 9시에 돌아오시던 아빠. 마지막 승부에 꽂혀서 농구만 디립다 하더니 키가 훌쩍 커버린 사춘기 소년 오빠. 초등학생의 눈에 담은 가족의 이야기를 꾹꾹 연필로 눌러 원고지에 담았다. 제목은 여전히 비워둔 채.
어린 시절 기억에 우리 집은 늘 사랑과 평화가 넘쳐 나는 집은 아니었지만 묵묵히 그 자리에서 자기의 할 몫을 다 하고 행복을 지키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엄빠는 정말 차곡차곡 계단을 오르시듯 노력하셔서 우리가 경제적으로도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주셨고, 오빠는 첫째답게 의젓하게 반항 한 번 없이 폭풍의 사춘기 시기를 잘 넘겨 든든한 아들내미가 되려고 노력해왔고. 난 별 신경 쓰지 않아도 알아서 잘 해야 했고 했던 딸내미가 되려 했다. 우리 가족은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하며 지금의 둥지까지 온 것 같다.
아. 그래서 그때 글짓기의 제목이 뭐였냐면. “꿈과 사랑이 가득한 우리 집”이다.
글을 다 쓰고도 제목을 고민하다 그냥 ‘우리 집’이라고 썼는데. 지나가다 본 엄마가 제목이 너무 단순한 거 아냐?라고 한 마디 간섭했고, 오빠도 거들어 식상하다고 일침을 놓고 방으로 들어가버렸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우리 집 앞에 ‘꿈과 사랑이 가득한’을 적었다. 그냥 정말 별 생각 없이. 가족이 모여 사는 우리 집에 꿈과 사랑이 가득하면 더 할나위 없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짓기는 반에서 1등을 했다.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평생 1등은 이 때가 처음인 듯ㅎ)
그리고 그때 내 글짓기의 제목은 지금 우리 집 가훈이다. 초3 때부터 지금까지 쭉.
1등 했다고 원고지를 들고 오니 다음준가 아빠가 어디 액자 같은 곳에 붓글씨로 “꿈과 사랑이 가득한 우리 집”을 대문짝 하게 받아 오신 것.
어찌 보면 가훈이라고 하기엔 윤리적, 도덕적인 명목이 내비친 것 같지도 않은. 너무나 당연지사로 여겨질 수 있는 말이지만.
당연한 것이 당연하게 흘러가지 않을 때의 허함과 슬픔을 덜 느끼고 이겨낼 수 있었던 건 우리가 이 가훈이 걸려있던 벽을 항상 마주하고 살아왔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꿈과 사랑이 가득한 곳에 무엇이 더 필요할까.
반대로, 꿈과 사랑이 꺼져가는 곳엔 무엇이 있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