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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rgeous Aug 09. 2022

과정을 즐기는 맛

골져스의 글: 지속 가능한 달리기를 위하여


팔 하나를 뻗은 만큼의 거리 앞. 또래의 여성이 나처럼 뛰고 있었다.

그녀와 몇 차례 앞서거니 뒤서거니를 반복하던 중 불쑥 이기고 싶은 마음이 들었더란다.

속도를 높이는데 오랜만에 뛴 탓인지 아님 찌는 날씨 때문인지 금세 지치고 말았다.

너무 지친 나머지 뛰는 걸 자체를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이러다가는 목표한 30분도 못 채울 것만 같아 다시금 속도를 늦췄다.

그러자 그녀가 뒤에서 슝~ 치고 오르더니 어느새 나를 저만치 앞섰다.

그 모습을 보는데 약간의 씁쓸함이 느껴지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테다.


오늘 후배 한 명이 할 말이 있다고, 나와 좀 얘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설마, 이직 소식인가?’하고 덜컥 내려앉는 마음을 애써 가다듬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 ‘응, 그래~’라고 말했다.

벤치에 함께 앉아 있는 어색한 시간. 잠깐의 침묵 후 후배가 우물쭈물 말을 꺼냈다.

여러 말들이 오고 갔지만, 후배의 요지는 그런 것이었다.

입사한 지 아직 일 년이나 되었는데 여태 아무것도 한 게 없다고. 비슷한 시기에 입사한 타회사 동기나, 현재 같은 곳에 근무하고 있는 동기들과 비교해도 그렇다고.

말문이 턱 막혔다. 그리고 가슴이 아팠다.

그 아픔은 단순히 후배를 향한 안타까움을 넘어서 내 자존심에 스크래치까지 동반한 생채기였다.

그래서 더 아팠던 것 같다.


후배는 1년이었지만 난 3년 8개월이나 이곳에 있었다.

이곳에서 내가 한 작품이라곤 하나밖에 없는 게 현실적인 내 실적이었다.

지금 하고 있는 작품은 가편성까진 받았지만 아직도 1-4부를 고쳐야 한다는 미션이 있었고, 배우 캐스팅에서 도통 진척이 나지 않았다.

나 역시 나보다 늦게 들어온 동기(?)가 먼저 편성을 받아 제작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옆에서 가만히 보고 있기란 참 속상한 일이었다.

부럽기도 하고, 질투도 나고, 괜히 나 자신을 자책하기도 하고.

저 사람은 하는데, 난 왜 못하지? 뭐가 부족하지? 난 이렇게 노력을 했는데. 했다면 내가 더 하는 것 같은데. (물론 이 생각이 잘못됐다는 걸 잘 안다. 노력을 비교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상태가 불안정할 땐 지극히 내 중심적이 되다 보니 저런 생각까지 하게 되는 것 같다.)

그런 마음으로 스스로를 괴롭히려니 업무 의욕은 생길 수가 없었고, 그와 동시에 무기력증과 번아웃, 덩달아 분노와 우울감만 깊어져 갔다.


어느 순간 이렇게 살 순 없다고, 회사를 그만두던지 아니라면 어떻게든 방안을 찾아야 한다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 내가 가진 자원으로는 한계가 있었고, 짧은 식견으로는 도무지 이 난관을 타파할 묘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지능이 높고 똑똑한 사람이 되는 것보다 왜 지혜롭고 현명한 사람이 되는 게 어려운 것인지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열심히 교회 설교를 듣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열심히 탐독했다.

독서 앱을 구독해 하루 한 권씩 책을 읽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나보다 먼저 인생을 살았거나 혹 인생의 진리를 깨달은 이들의 경험을 신뢰하기로 했다.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을 읽고 지성과 영성의 결합이 내게 필요하다는 결론이 들어 더욱 열심히 책을 읽고 신앙생활을 유지했다.

이 과정을 통해 얻은 결론은,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현재’에 집중하는 삶의 자세를 지니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니 신기하게도 마음이 많이 편안해졌다.


모든 건, 그냥 지금 이 순간, 이 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하고 쉬운 것을 시작하는 것, 으로 귀결이 되었다.

그 전에는 그냥 당연하게 생각했던 뻔한 문장들이 이렇게 아프고 나서야 그 뻔함 안에 담긴 진실을 캐치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라는 말은 너무 싫어하지만 아프니까 나에 대해 알 수 있더라, 정도엔 고개를 끄덕일 순 있게 되었다.

거창한 목표와 이래야만 한다는 기준을 버리니까 삶이 가볍고 편안해졌다.

재테크 영상들을 보며 내 미래는 저 높이 솟은 한강뷰 신축 아파트에서 이뤄져야 하고,

운동과 연애 영상들을 보며 내 미래는 비키니를 언제 입어도 좋을 핫바디에 그에 걸맞은 남자가 옆구리에 있어야 하고,

성공 후기 영상들을 보며 내 미래는 저런 높은 위치에서 사람들을 통솔할 수 있는 정도의 리더십을 지닌 전문가여야만 하고, 등등.

모두 버.렸.다.


버리고 나니까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지금 하고 있는 드라마 기획 일이 질리면, 다른 일을 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상담일을 할 수도 있고, 외국에 가서 살 수도 있는 일이고, 자연에서 귀농을 하며 살 수도 있고, 여행 유투버가 되거나 아이를 돌보며 요리하고 집을 가꾸는 가정주부가 되거나 아님 전혀 상관없는 식물학을 전공하며 그쪽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를 소망할 수도 있다.

다만, 지금 나는 내 일에 대한 미처 소진되지 않은 열정이 남아 있기에 그 정도만큼은 더 애정을 쏟을 준비도 되어 있다.

이야기를 사랑하는 나의 숙명은, 솔직히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 같기는 하다.


나는 이런 나의 이야기를 후배에게 전했다.

못난 나의 모습을 말하기란 부끄러운 일이지만, 내가 얻었던 인생 선배들의 지혜를 나눠줄 수 있어서 뿌듯했고, 한편으로는 타인에게 말함으로써 내 자신에게도 한번 더 확언하게 되는 계기가 될 수 있었던 것 같다.


과정을 즐기자고. 결과 값은 그 이후라고.

과정을 즐기면, 결과 값은 차후의 문제가 되지만

결과만을 중시하면, 과정은 쓸데없이 지루하고 불필요한 존재가 되어버린다고.


후배와의 대화를 마친 날.

나는 찜통 무더위 속에서도 이상하게 달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을 빼기 위해, 체력을 기르기 위해 억지로 해야만 하는 30분의 달리기가 언제부터 내 인생의 활력으로 변해버린 걸까.

사람의 생각을 180도 변하게 만드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인데. 난 왜 이 드라마틱한 변화를 당연하게 생각한 것이지?


나는 나의 오랫 동안 지속 가능한 달리기를 위해 오늘 만난 내 앞의 그녀를 보내주었다.

그녀의 날렵한 뒷모습을 지켜보면서 잠깐 패배심이 일었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저 사람은 저 사람. 나는 나. 난 내 페이스를 지키겠다.

원래의 내 목표는 저 여자보다 빠르게 달리는 게 아닌 30분 달리기를 완주하는 것이었으니.


목표한 30분을 거의 채울 즈음 여자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아무 의미도 없는 경쟁이 아니었나 싶다.

그 여자는 어쩌면 내 불안에 기저 한 허상의 기준이었을지도 모른다.

저 사람은 이겨야 돼. 내 동년배인 저 사람보다는 내가 앞서야 해. 뭐, 이런 식의.

사실 30분 달리기를 결국 완성으로 이끌어준 건 저런 알량한 잣대가 아니었다.

우습지만. 음…. 바로 클럽 음악이었다.

대락 5분 단위로 끊어지는 클럽 음악을 여일곱개 들으며 ‘5분만 더, 딱 5분만 더’를 스스로에게 외치는 것이야말로 내 목표 성취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어질 때마다 두둠칫 몸을 움직이게 만드는 리듬만을 생각하며 스스로의 흥을 돋우는 것이 주 키 포인트였다.


어쩌면 우리네 인생 마라톤을 잘 완주하기 위해 필요한 필수 준비물이란 ‘클럽 음악’ 같은 정도의 것이 아닐까 싶다.

누군가의 인생을 통해 나를 바라보기보단, 타인의 기준을 내 것으로 끌어오기보단, 그저 스스로의 활력을 유지하고 즐기는 힘.

그래서 오늘도 나는 달릴 수 있는 것이다.

요새 듣는 노래에 빗대어 말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so, everyday i’m shufflin’!!!!


추신. 참고로 내 클럽 음악은 lmfao-party rock anthem에 멈춰있다는 것. ^^;; 업데이트가 필요하긴 하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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