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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지도 않은 일들 투성이

원플러스원 도미노 피자를 사갖고 돌아오는 길

by Gorgeous

요즘 내가 갖고 있는 허한 심령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가, 싶어 괴로우던 차

결혼이라는 큰 변화를 겪은 나로서는 괜한 불똥을 남편에게 튀게 되더란다.

나는 결혼과 맞지 않는 사람이었던게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어 남편을 은근히 긁고 있던 근래였다.

당신과의 결혼이 나를 우울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라고 남편의 가슴에 못 박던 나.

그런 나에게 미안함과 미움을 동시에 가졌던 남편.

그러다 이렇게 헤어질 수는 없으니 다시 잘해보자 라는 마음으로 다시금 애틋한 신혼생활을 하던 중, 문득 오늘 일어난 일련의 시간에서 왜인지 모르게 마음이 개운해졌다. 깨끗해지고 맑아진 느낌이랄까.

별거 없었다.

전날 마신 와인 숙취로 속이 안좋아서 계속 누워있다 생각지도 않게 오전에 교회에 가서 시련에 관한 설교를 듣고, 집에 돌아와서는 전날 야근으로 가족 식사에 빠진 나를 위해 생각지도 않게 시아버님이 포장해주신 오리백숙으로 점심을 먹고, 한숨 잔 뒤 오후에는 점 찍은 카페를 가려고 길을 나섰지만 두 군데 모두 일요일은 장사를 하지 않아서 생각지도 않게 저렴한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커피랑 누텔라 와플을 먹고, 그러다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계란빵을 남편이 시켜서 또 먹고, 그러면서 설교와 요즘 쓰는 글과 요즘 회사에서의 이야기를 생각지도 않게 하고, 저녁으로 뭐 먹을까 하다가 남편이 생각지도 않게 도미노 피자 먹을건데? 라고 뻔뻔하게 말해서 덩달아 그래 좋아! 라고 말했고, 어떻게해야 저렴하게 먹을 수 있을지 고민하다 가장 가까운 지점에서 며칠 동안만 일요일에 1+1 이벤트를 한다는 소식을 생각지도 않게 접해 함께 손잡고 길을 걷고, 피자가 나오기까지 꽤 오래 걸린다고 해서 생각지도 않게 근처 호수공원을 산책했고, 포장한 피자를 갖고 2키로의 길을 걸으며 함께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고, 즐겨보던 이동진 유투브에서 생각지도 않게 류준열 인터뷰를 보게되어 최근 그가 나온 영화인 계시록을 욕하면서 즐겁게 보고, 보면서 먹는 동안 남편이 꼭 3쪽은 먹으라해서 어떻게 그러냐! 하며 반박했지만 먹다보니 맛있어서 생각지도 않게 3쪽을 다 먹고, 생각지도 않게 대본 교정이 오래걸려서 이렇게 늦게까지 새벽에도 깨어 일을 했지만 생각지도 않게 마음이 억울하거나 불만스럽지 않고 감사하다.


내가 마음 먹은 일들은 이상하게도 내 뜻대로 된 것이 잘 없었다.

생각한대로 잘 되지가 않았다. 그리고 요즘도 그렇다.

그치만 내가 오늘 깨달은 게 있다.

생각대로 일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생각지도 않은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지도 않은 일들이 내 인생을 풍요롭게 만들기도 한다는 것이다.

나는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겠지만, 전체적인 흐름은 결국 물에 떠 있는 잎사귀 처럼 어떤 거대한 보이지 않는 손의 흐름을 타는 것이라 생각이 든다.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앞으로 무수하게 일어날 것임을 받아들인다. 그것은 시련일 가능성이 높을 테다.

하지만 누구나 죽는 것처럼, 시련은 불가피한 것이다. 장맛비가 나만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엠 스캇 펙의 말처럼 삶은 고해이다. 누구나 시련을 겪고, 누구나 견딜 수 있다. 이걸 인정하면서 사는 거구나, 그럼에도 살아갈 수 있음을 깨닫게 되는 거구나, 그게 내 풍요로움의 원천이겠구나.


도미노 피자 2판을 들고 2키로의 길을 걷는 남편이 안쓰러워 보였다. 나도 좀 나눠들게. 남편이 됐다 했지만 혼자 내버려두면 마음이 아플 것 같았다. 남자가 짐 드는 게 뭐 별거냐 할 수 있겠지만, 나는 성격상 그게 잘 안된다. 잠깐동안 내가 들고 가면서 남편에게 미안했다. 내가 이 사람 덕분에 충만하구나, 괴로우면서도 아니 괴롭기 때문에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었던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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