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보홀 여행기
3박 5일의 짧은 해외여행을 갔다 왔다.
짧다고 했지만 한 게 많아 짧게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벌써 남편과 2번째 해외여행을 갔다 온 것인데, 아직까지도 ‘다음엔 이걸 챙겨야지!‘라는 미래식 다짐은 진행 중이다.
이 창을 빌어 말하자면, 꼭 기내에서 쓸 양치 도구와 미스트, 핸드크림을 챙기겠다. 액체류 반입 불가라는 말에만 꽂혀서 도합 백미리만 넘지 않으면 되는데 이걸 그냥 깜빡했다.
건조한 기내가 날 미치게 만들었으니, 이번 일을 반면교사 삼아서 다음에는 상쾌하고 촉촉한 여행을 다녀오리라.
첫째 날에는 정어리 떼 나팔링 투어를 갔다 온 뒤 알로나 비치에서 남편과 술 한잔 하고, 두 번째 날에는 오션 디스커버리 투어(돌고래, 바다거북이, 열대어들과 산호초)를 다녀왔다. 그러고 나서 필리핀에 거주 중이신 한국인 분이 예쁘다고 말해준 오셔니카 리조트 앞 비치에서 개인적으로 스노클링을 한번 더 하고(그냥 비치인데도 물이 하도 맑아서 물고기들이 보인다), 마지막 날에는 보홀 본 섬에서 시내 투어와 내륙 투어(초콜릿힐, 안경원숭이, 맨 메이드 포레스트, 롯복강 투어)를 하고 마사지를 받은 다음 귀국했다.
한 게 많아서인지 꽤나 체력적으로 많이 에너지가 소모된 것 같고, 목요일 아침에 귀국하여 그 뒤로도 연신 이틀 동안 내리 먹고 자고만 반복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허허… 삼십 대의 체력이란 이렇게 허무한 것인가. 모쪼록 다음 여행에는 하루 한 개의 액티비티만 소화하고, 저녁에는 가급적 호텔 수영장을 이용해야지…
하지만 발리 신혼여행에서도 했던 결심이 이번에도 무산된 걸로 보아 다음 여행에서도 이는 무산될 결심일 게 뻔하다.
막상 해외를 가게 되면 뽕을 뽑아야 한다는 식의 마인드가 발동되어서인지 뭐라도 하나 더 하고 싶은 마음이 앞서다가 체력이 와장창 무너지게 되는 것 같기도.
그러다 보면 이런 고생하려고 해외여행을 그 돈 주고 했나… 싶은 마음이 살짝 밀려오기도 한다. 애꿎은 사람 마음이란 참.
남편은 연애할 때부터 여행하는 것보다 집에서 유튜브 보고 영화 보고 책 보고 맛있는 거 먹으면서 술 한잔 하는 게 더 좋다고 말한 사람이다.
그런데 내가 해외 나간 사람들의 여행기를 보면서 부러워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나한테 맞춰주기 위해서 이번에는 해외로 휴가를 가자고 한 것일 테다.
그래서 하나투어 패키지여행을 본인이 직접 찾아서 결제했다. 그 노력이 하도 가상해서 나도 ‘더 재미나고 더 신나게 놀다 와야지!’하는 결심이 가득했다.
하지만 막상 가서 보니 체력적으로 힘들기도 하고, 호핑 투어 때는 뱃멀미로 짜증도 나고, 게다가 남편이 계속 어딘가 아프다고 말하고 또 100달러까지 잃어버려서 화도 나가지고 뭐라 잔소리를 엄청 해대고…. 그랬다. 그러면서 계속 남편한테 툴툴거렸다. 너랑 여행 스타일이 안 맞는 것 같다, 계속 너한테 뭔 일이 생기니 뭘 못하겠다, 그랬더니 남편의 왈.
“여보 이런 저를 불쌍하게 봐줘요.”
그 한마디에 빵 터져서 웃음이 나오고, 그냥 모든 부정적인 덩어리들이 단번에 불식되었다.
우리 부부는 누군가의 잘못이나 실수로 인해 벌어진 부정적인 상황이 발생할 때, ‘불쌍하게 여겨달라’라는 말을 한다.
그 말은 꽤나 효과적인데, 화가 난 사람이 절로 무장해제된다. 불쌍히 여겨달라는 상대방의 애절한 호소를 외면할 정도로 우리가 모진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일 테다.
여행 자체의 콘텐츠도 재밌었지만, 이번 여행의 더 큰 수확은 바로 남편의 또 다른 측면을 보게 된 것이다.
항상 지지고 볶는 남편이 너무 일상적인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잘 몰랐는데, 우리 남편은 생각보다 꼼꼼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내 기준, 남편은 티 모먼트가 많고, 논리가 이해되지 않으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고, 팩트인지 아닌지에 대한 집착이 강하고, 내가 그냥 던진 말도 다 기억하는 아주 독한 구석들이 많다고 판단했다.
(반대로 나는 허술해 보이고 맹탕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집요하고 꼼꼼하다. 남편도 이를 인정했다.)
그런 남편이 이번 여행에서 온갖 똑똑한 척(?)은 다했지만, 사실은 알고 보면 허술한 게 많았다. 돈뿐만 아니라 새로 산 커플템 모자도 잃어버리고… 자꾸 길 가다가 ‘아 맞다! 헉 어디 갔지?’를 반복하면서 내 마음을 여러 번 덜컹거리게 만들었다. (하…. 여러분은 이 마음 아시죠?)
남편과 두 번 다시 같이 해외 여행하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던 상황들이 꽤나 있었지만 (3박 5일임에도 불구하고… ㅎ) 우리 남편의 장점은 바로 자신의 부족함에 대해서 인정을 참 잘한다는 것.
그 점을 높이 사기 때문에 다시 한번 여행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으며 귀국했다.
“여보, 나를 좀 불쌍하게 여겨줘요.”의 번외 편은 “여보, 날 귀엽게 봐줘요”인데, 효과는 비슷하다.
앞으로 살면서 남편이 이 치트키를 많이 남발하지만 않으면 좋겠다. 가끔씩 적절할 때에 쓰면 효과는 무지막지하니 현명하게 이용하기를.
“여보~ 가끔씩만 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