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어딘의 우연한 연결 Jul 13. 2022

[어딘글방] 당신의 온도 _ 보래

언젠가 보래가 책을 낸다면 그 제목이 ‘나 , 보래’ 였으면 좋겠다고, 나는 생각한다. 보래의 글에는 21세기 한국 청년의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 라는 테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래의 글을 보면 알 수 있다.  큭큭큭 재미지지만 어쩐지 미안하고 씁쓸하고, 서늘하다. 내가 누리는 당연한 것들이 당연하지 않게 보인다. 정밀한 묘사는, 섬세한 문장은 종종 선언이나 구호보다 힘이 세다. 희비극이 공존하는 한바탕 소동극. 그 속에 지금 여기 우리, 가 있다.





당신의 온도


보래



사계절 내내 빛과 바람이 잘 드나드는 집. 그 덕에 여름엔 에어컨 틀 일이 많지 않고, 겨울엔 보일러를 높은 온도로 돌릴 필요가 없는, 그런 집에서 사는 게 꿈이었다. 금방 세탁이 끝난 옷을 베란다에 탁탁, 널고 말라가는 걸 보고 싶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에코 라이프 – 그러니까 환경을 위해 전자제품 사용은 최대한 지양하고, 아날로그 방식으로만 살아보겠다는 여유가 생길 것도 같았다.


서울에서 소위 괜찮다는 집을 사기 위한 비용은 말 그대로 넘사벽이었다. 아파트라면 21평 기준으로 평균 칠억 삼천만 원은 있어야 했고, 낡은 투룸 빌라조차도 일억 밑으로는 구하기 힘들었다. 전세 대출이자, 공과금, 관리비 명목으로 매달 은행에 칠십만 원씩 내는 나로서는 몇천만 원 마련도 어려운 처지. 은행 대출을 구십 프로 받아 삼십 년 된 투룸 빌라에서 전세로 사는 길을 다시금 택했다. 불편한 점이 생기면 그때마다 조금씩 고쳐서 사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지금 사는 전셋집은 아침에도 초저녁처럼 어두웠다. 집 양옆에 들어선 건물이 빛을 가렸기 때문이다. 나는 형광등을 교체하는 대신 이케아에서 스탠드 조명 여러 개를 샀다. 마치 유럽인들이 조명을 어둡게 해 아늑한 분위기를 만드는 것처럼, 일부러 의도한 인테리어라고 나 자신을 설득하면서. 그렇게 되뇌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정말 그럴듯하게 보였다.


창문을 열면, 가벼운 바람에 역한 메탄가스와 암모니아 냄새가 실려 왔다. 빌라만큼 낡은 집 앞 배수로 탓이었다.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두통과 구토가 일어 창문을 오래 열 수 없을 정도였는데, 집주인은 나를 유난한 사람으로 취급했다. 전 세입자는 4년이나 살았는데 아무 말 없었어요. 복덕방 주인도 마찬가지였다. 아이고, 다들 잘만 살았어. 그냥 문 닫고 살아요. 그럼 되잖아. 머리가 지끈거렸다. 나는 결심했다. 환경이 내게 줄 수 없다면, 내가 환경을 돈 주고 사겠다. 그 자리에서 공기 청정기를 주문했다.


오래된 빌라일수록, 작은 크기의 집일수록 날씨의 영향을 고스란히 받았다. 겨울철엔 외풍이 심했고, 보일러가 얼어서 잘 돌지 않았으며, 수도가 여러 번 동파되는 식이었다. 여름철엔 집 안 여기저기 곰팡이가 폈고, 벌레가 기어 나왔으며, 벽지가 들떴다. 퇴근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 공기가 좀 습하다 싶으면 집 안은 이미 사우나였다. 꿉꿉한 공기가 온 집안에 가득했다. 옷에, 침대 이불에, 커튼에 스며들었다. 몸과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날씨의 영향을 피하기 위해서는 돈이 들었다. 오만 원짜리 중고 제습기를 사서 종일 튼다던가, 습할 때 유독 많이 보이는 바퀴벌레를 없애자고 십육만 원짜리 세스코를 부른다던가. 외풍을 막기 위해 방풍 테이프 칠만 원어치를 사서, 집의 모든 창틀에 테이프를 붙이느라 주말을 몽땅 투자하는 식이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벌레들이 제일 고역이었다. 최근에 부쩍 자주 보이는 날벌레와 모기, 지네가 그랬다. 직접 벌레 잡기에 지쳐, 파란 불빛이 나는 오만 원짜리 전기 살충기를 장만했다. 이런 걸 살 거라곤 한 번도 생각 못 했는데. 무언가를 자꾸만 사고, 서비스를 부를 때마다 지인들이 말했다. 별걸 다, 그냥 살아. 네 집도 아닌데 남 좋은 일 하지 말고. 역시 아직 싱글이라 돈이 많은 건가.


세입자 생활에서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대부분의 월셋집과 전셋집 기본 옵션이 높은 확률로 에어컨이라는 것이었다. 에어컨을 사서 이사 때마다 옮기려면, 철거와 설치 비용만 최소 이십만 원이었으니, 나로선 그만큼 비용을 아낄 수 있어 땡큐였다.


이사한 집에서 처음 맞는 여름이 되면, 랜덤 뽑기를 하는 기분으로 에어컨을 틀어보았다. 어떤 컨디션이냐에 따라 그해, 길게는 그 다다음 해 여름까지의 쾌적 지수가 결정될 거였다. 대부분의 뽑기는 실패했지만, 에어컨 전원 버튼을 처음 누르는 순간이 올 때마다 어쩐지 기대하게 됐다. 제발 이번만큼은 멀쩡한 게 걸리길, 그런 마음이었다.


세입자였던 내가 써본 가장 오래된 에어컨으로 말하자면, 2012년에 첫 자취방으로 얻은 신림동 원룸에서였다. 1991년에 제조된 삼성 벽걸이 에어컨. 에어컨이 사람이었다면 스물한 살, 그러니까 대학도 갔을 나이인데. 이 에어컨은 볼품없이 나이만 들어 잔고장이 잦았다. 가끔 물이 샌다거나 덜컹거리는 소리를 냈으며, 리모컨 명령을 인식하지 못했다. 에너지 효율 등급이 표시된 스티커가 헤지고 낡아서, 당최 몇 등급인지 알아볼 수도 없었다. 상단의 공기 흡입구에는 시커먼 먼지와 출처를 알 수 없는 털이 뒤엉켜있었다. 정면의 공기 배출구도 더럽기는 마찬가지. 매직펜으로 무작위 점을 찍어댄 것처럼, 검은 곰팡이가 곳곳에 피어있었다. 리모컨 상태도 온전치 못했다. 디스플레이의 글자가 희미하게 보여서, 눈 위치까지 리모컨을 들어 올려 비스듬히 보아야 지금 내가 누른 버튼이 송풍인지 냉방인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나는 냄새에 예민한 사람이었다. 삐걱거리는 건 차치하고, 에어컨 가동할 때 나는 탁한 냄새가 견디기 힘들었다. 다이소에서 오천 원짜리 에어컨 세정제를 샀다. 공기 배출구와 흡입구를 솔로 닦아내며 열심히 청소했다. 닦고 또 닦아냈는데도 곰팡이 자국은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 퀴퀴한 냄새도 여전했다. 세정제의 에프킬라 같기도, 접착제 같기도 한 냄새가 섞여 나는 통에, 여름 내내 에어컨을 켤 때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더위와 냄새 사이에서 무엇을 택할 것인가. 나는 늘 더위에 졌다. 마스크를 쓰고 에어컨을 틀었다. 욱신거리는 두통을 견디며 그해 여름을 보냈다.


그다음 월셋집에 옵션으로 달려있던 벽걸이 에어컨은 2003년도에 캐리어에서 제조된 것이었다. 비교적 최신 제품이었음에도, 화려한 연보라 꽃 필름의 에어컨 커버를 보노라면 어쩐지 심란했다. 되도록 에어컨 쪽으로 시선을 두지 않기 위해 노력할 정도였다. 먼지로 흡입구가 뒤엉켜 더러운 건 이전 집이었던 신림동 에어컨과 마찬가지. 세척이 필요했지만, 세정제는 쓰고 싶지 않았다. 블로그와 유튜브에서 ‘완전분해 셀프청소’ 후기를 찾아 열심히 읽고 또 읽었다. 에어컨 커버와 풍향 날개 두 개, 필터, 팬, 냉각 코어를 야심 차게 분해한 뒤, 샤워기로 검게 변한 먼지들을 씻어내렸다. 드라이기로 잘 말린 부품을 역순으로 다시 조립하기까지 꼬박 하루가 걸렸다.


정상 작동하면 좋았을 텐데. 에어컨은 그 길로 운명했다. 왜 전원이 들어오지 않는 건지 이유도 알 수 없었다. 사망 선고를 내린 수리 기사는, 에어컨 세척은 앞으로 전문가에게 맡기라고 조언했다. 눈물을 머금고 집주인에게 사십만 원을 변상해주었다. 그 후로는 에어컨을 절대 건드리지 않았다. 더러우면 더러운 대로, 에어컨 공기가 내 건강에 악영향을 미친다면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팔자이려니 여기면서 지냈다.


다행히 지금 사는 집 에어컨은 집주인이 일 년 전 새로 교체한 신형이었다. 캐리어에서 나온 5평짜리 벽걸이형으로, 에너지 효율은 5등급이었지만 - 지금까지 봤던 에어컨 중 가장 희고 깨끗한 외관이 돋보였다. 리모컨도 멀쩡하게 작동했다. 앞으로 전세를 계약한 이 년간은 쾌적하고 시원한 공기를 누릴 거란 생각에 조금 들뜨기까지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에게 동거인이 생겼다. 남동생이 작은 방에 들어와 살게 된 것이다. 모든 게 무탈했고, 동생을 잘 돌볼 자신도 있었다. 이 집에서 쾌적하게 살기 위한 만반의 준빌 해놨으니까. 누나랑 살면 확실히 좋네. 동생이 그렇게 생각할 거라고 확신했다.


확신이 무참히 깨진 건 지난 5월 말 이른 더위가 찾아오면서다. 우리 집은 부엌을 기준으로 치면 ‘ㅠ’자 모양으로 방 두 개가 나란히 있는 형태였는데, 더운 것 같아 에어컨을 켜놓으면 동생이 자꾸만 물었다. 누나, 에어컨 켠 거 맞아? 내 방 너무 더운데.


원래 냉기가 퍼지는 덴 시간이 걸린다며 동생을 나무랐다. 더우면 찬물 샤워를 해, 옛날 사람들은 다 그렇게 살았어. 나는 동생에게 더위를 이겨내는 건 정신력이라고, 그만큼 강해지는 거라고 농을 던졌다. 꽁꽁 얼린 페트병을 목 뒤에 베고 자라며 건네본 적도 여러 번. 그러나 그것도 잠시, 하루에 냉수 샤워를 서너 번 하느라 지친 동생의 퍼석한 얼굴을 여러 번 마주하다 보니 더는 농을 건넬 수 없었다.


그리고는 알게 됐다. 내 방 안쪽에 설치된 에어컨의 냉기가 동생 방으로 들어가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내 방 코너를 돌아 동생 방 안쪽으로 들어갈 힘이 없는 건지, 좀처럼 냉기가 가닿지 않았다. 선풍기를 틀어도 마찬가지. 그나마 동생이 살만하다 느끼려면 에어컨 온도를 19도로, 30분 이상 유지해야만 했다.


열대야가 계속되는 6월의 마지막 주말이었다. 한낮엔 온도가 35도까지 치솟았다. 나는 내 방에 누워 에어컨을 19도로 맞췄다. 양말과 긴소매, 긴 바지 차림으로 두꺼운 겨울 이불을 덮은 채였다. 무더운 여름 두꺼운 이불을 덮고 차가운 바람을 맞는 일. 누군가는 이걸 여름 최대의 사치라고 한다던데. 이것이 어째서 사치인가. 말 그대로 더럽게 추운데. 아마 그 사치는 19도가 아니었을 것이다. 아니면, 오랜 시간 머물질 않았거나. 동생은 방바닥의 찬 기운을 빌려서라도 더위를 식히겠다는 듯 방바닥에 널브러진 채 움직이지 않았다. 짧은 반바지와 러닝셔츠를 입은 채였다.


새벽에 너무 추운 나머지, 동생 몰래 에어컨을 꺼버린 적도 몇 번 있었다. 그때마다 동생은 귀신같이 알아챘다. 다시 켜 내라고 소리 지르거나, 내 방으로 들어와 괴로움을 토로하거나, 제 방 창문을 열어젖혔다. 역한 하수구 냄새와 함께 후덥지근한 공기가 밀려들었다. 잔뜩 찌푸린 얼굴로 동생 방에 들어가 창문을 휙, 다시 닫아버리고 나면 동생이 소리쳤다. 아, 진짜. 더워 죽겠다고! 나도 지지 않고 되받아쳤다. 나도 그래! 얼어 뒤지겠다고! 방의 온도 차만큼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서로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줄 수도 없었다. 에어컨 냉기를 조금이라도 더 공유하려면, 나와 동생 모두 각자의 방문을 열어둬야 했으니까. 듣지 않았으면 싶은 소리를 듣고, 또 들려주게 됐다. 가령, 동생이 전화 너머로 여자친구와 나누는 사랑의 밀어라던가, 아이패드로 비급 코미디를 볼 때, 나도 모르게 내버리는 바보 같은 웃음소리. 그때마다 벽 너머 존재가 묘하게 신경 쓰였다.


설상가상으로 같이 사는 고양이 두 마리도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집안에서의 극명한 온도 차 때문인지, 온몸에 열이 오르고 재채기를 해대는 식이었다. 동물병원 의사는 냉방병 같다며, 혹시 집 에어컨을 몇 도로 해놓는지 물었다. 19도요.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작아졌다.


방을 바꿔서 자자. 호기롭게 동생과 방을 바꿨다. 추위보다 더위가 나을 거야, 분명 그렇게 생각했는데. 동생 방에 누운 지 세 시간도 되지 않아 깨달았다. 아, 40도까지 치솟는 한여름 밤 인도에서 길바닥에 누우면 딱 이런 느낌이겠구나. 동생이 왜 그렇게 괴로워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오, 신이시여. 추워서 얼어 죽든지 더워 죽든지 둘 중 하나가 죽어야 진정 끝나겠습니까.


이럴 땐 돈이다. 돈을 써야 한다. 나는 추위와 더위에 항복했다. 인터넷을 뒤져 설치 가능한 에어컨을 찾았다. 천장형, 스탠드, 벽걸이, 이동식, 창문형까지 종류도 가짓수도 많았지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은 두 종류였다. 이동식과 창문형. 천장형은 말 그대로 천장을 뚫고, 벽걸이는 실외기 설치를 위해 벽을 뚫어야 하므로 집주인이 반대했다. 이동식은 에어컨 본체에 달린 바퀴 네 개로 어디든 언제든 위치를 바꿔 놓을 수 있을 법해 보였지만, 후기를 보고 관심이 식었다. 에어컨이 움직이면 배관 호스가 움직여서, 이름과는 다르게 고정이 필요했다. 그럴 거면 이름을 고정형으로 하지, 사기꾼들. 배관 호스는 또 얼마나 못생겼는지, 밖의 하수구 그대로 집 안에 옮겨둔 모양새였다. 그렇다면 남은 건 하나, 창문형이었다.


창문형 에어컨은 실외기가 따로 없어 벽에 구멍을 뚫지 않아도 됐고, 창틀에 설치하기 때문에 방 일부를 내줄 필요도 없었다. 전세 생활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 - 자가 설치, 제거도 가능해서 이사할 때 옮기기도 쉬웠다. 그야말로 나처럼 주기적으로 옮겨 사는 사람에게 최적의 조건이었다.


문제는 디자인이었다. 대부분의 창문형 에어컨이 못생겼다. 창틀에 걸면 배 나온 아저씨처럼 에어컨 전면부가 보기 싫게 툭 튀어나왔다. 오다가다 마주하면 거대한 존재감에 부담스러울 게 분명했다. 소음이 심하다며 불평하는 후기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재봉틀 돌리는 것처럼 지이잉, 진동 소리가 난다고. 어떤 아파트에서는 소음이 너무 심해 아예 관리실에서 설치 금지령을 내렸다고 했다. 이미 설치한 집도 모두 철거하라면서. 선택지가 모두 사라진 것 같아 애꿎은 머리통을 박박 긁다가, 보고야 말았다. 엘지전자에서 5월에 출시했다는 오브제 컬렉션 엣지를.


오브제 컬렉션은 엘지전자의 프리미엄 라인이다. 비행기 좌석이라면 비즈니스 급이랄까. 그래선지 오브제 컬렉션 엣지도 군더더기 없이 단순하면서 세련된 디자인이었다. 컬러는 두 가지, 어느 창문에든 무난하게 잘 어울릴만한 화이트와 베이지였다. 일반적인 창문형 에어컨과 다르게, 설치 후 창문 밖 돌출 부분이 거의 없었다. 제가 당신의 공간을 어떻게 감히 차지하겠어요, 하고 창틀 안쪽에 겸손하게 자리 잡은 느낌. 왕정 시대라면, 왕의 최측근이 왕을 보필할 때 -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지만, 거슬리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거리에 서 있을 - 딱 그 정도의 적절한 존재감으로 창틀 안쪽에 설치할 수 있었다. 언뜻 창문과 세트처럼 보이기도 했다.


소음도 낮은 편이었다. 34㏈. 도서관 소음이 40㏈이라고 하니, 거의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게다가 생각 못 했던 기능도 있었는데, 그건 바로 파워 제습이었다. 34L나 된다고. 당근마켓에서 30L짜리 중고 제습기를 오만 원 주고 샀던 나로서는 제습기 하나를 공짜로 얻는 셈이었다. 완전히 반해버렸다. 반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결국 무이자 십 개월 할부로 오브제 컬렉션 엣지를 질렀다. 105만 원. 여타 제품과 비교해 두 배는 더 비쌌지만, 가성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가난한 사람도 때론 아름다운 것을 가지고 싶을 때가 있으니까. 자취생활 십 년 차에 처음 얻은, 온전한 내 에어컨이다. 가지고 있는 전자제품 중 유일하게 아름다운 외형을 지닌 제품이 될 것이다.

주문 폭주로 이주나 더 기다려야 한다지만, 이미 집에 설치한 것처럼 마음이 든든하다. 영롱한 자태로 방 창문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을 엣지가 벌써부터 눈앞에 그려진다. 이제 다시 각자의 패턴에 맞춰 살 수 있겠지. 원하는 대로 실내 온도를 맞추고, 개인적인 시간이 필요하면 방문도 닫아가면서 그렇게 지내야지. 나는 겨울옷이 아니라 여름옷을 입을 거야. 얇은 여름 이불을 다시 꺼낼 것이다. 오브제 컬렉션 엣지가 올 날을 상상해보면서 머릿속으로 상황을 이렇게 저렇게 굴려보았다. 추워 죽겠는데, 여전히 이주나 더 추위를 견뎌야 하는데 자꾸만 웃음이 났다.







발행일. 2022.07.09. | 글감. 잇템


보래 (소원)

취미는 임시보호, 특기는 입양. 지금은 심장병과 신부전을 앓는 우리 집 고양이 두 마리를 돌보는 데 집중하고 있다. 남은 생을 뚝 떼어 이 아이들에게 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같은 날 눈감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자주 생각한다. 4년 째 유애나다. 할머니가 되어서도 글을 쓰고 피아노를 치며 고양이를 돌볼 수 있으면 좋겠다. 


keyword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