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학 시절에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를 좋아해서, 노희경 작가가 여는 강연들을 찾아다니면서 들었던 적이 있다.
2. 그때 한 가지의 의아함을 느꼈는데, 관객들은 노희경 작가가 쓴 드라마를 좋아해서 기존 드라마에 관련된 질문들을 많이 던졌지만,
3. 정작 그 드라마를 만든 노희경 작가는 그런 질문들에 대해선 별로 대수롭게 여기며, “이미 지난 작품”이라며 쿨하게 답하며 넘어갔다.
4. 자신은 작품이 끝나고 나면, ‘지나간 작품’보다는 ‘다음 작품’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한다고.
5. 그런 경험을 몇 번 하고 나서, ‘창작자의 시간은 독자와 다르게 흐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독자들은 자신이 의미 있게 본 지나간 작품 속에 머무르지만, 창작자는 그래서 안 된다고.
6. 그게 아무리 훌륭하고 아름다운 작품이었다고 해도, 창작자는 작품을 마쳤으면 거기서 빠져나와, 다시 새로운 작품에 대해 구상하고 또 다른 도전을 해야 한다고.
7. 그렇게 실제로 글을 쓰고, 콘텐츠와 관련된 일을 하면서 노희경 작가가 왜 그랬는지, 그리고 찰리 채플린이 왜 자신의 최고 작품은 언제나 ‘다음 작품(Next)’이라고 말했는지가 어렴풋하게나마 이해가 됐다.
8. 조금 풀어 설명하면, 콘텐츠를 만들거나 글을 쓰다 보면, 잘 쓴 글도 있고, 못 쓴 글도 있고, 부끄러운 글도 생기기 마련. 그런데 뭔가가 부족했다는 이유로 과거의 글에 사로잡혀서, 다음 글을 쓰지 않으면, 다시 말해, 그게 잘 쓴 글이든, 못 쓴 글이든, 그게 다음 글을 향해 나아가는 데 방해가 되면, 결국 창작자는 정체될 수밖에 없다.
9. 그리고 아무리 과거 작품이 좋았다고 한들, 독자와 관객이 원하는 건 늘 새로운 무언가(new)라서, 콘텐츠로 비즈니스를 한다면 특히 something new가 중요하다.
10. 그래서 콘텐츠로 비즈니스를 하든, 글을 쓰는 연습을 하든, 콘텐츠와 관련된 뭔가를 할 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늘 다음 콘텐츠를 만들 생각을 하는 것’이다.
11. 바꿔 말하면, 지금 쓰는 글이 부족하고, 허접하고, 모순적이어서, 그런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는 게 부끄럽다고 해도, 냉정하게 말하면,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12. 정말 중요한 건, 그렇다고 해서 거기서 멈춰 있거나, 나에겐 재능이나 능력이 없는 것 같다며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니라, 때로는 부족하고 때로는 욕을 먹더라도, 흘려보낼 건 흘려보내며, 다음 콘텐츠를 만드는 것일 수 있으니까.
13. 그런 의미에서 콘텐츠 창작자가 진정으로 창조해야 하는 건, 단순한 콘텐츠가 아니라, 자신의 미래일 수 있고, ‘꾸준하고 성실한 창작자’란 지나간 콘텐츠에 갇히지 않고, 스스로 자신의 미래를 계속해서 만드는 사람일 수 있다.
14. 그렇기에 다소 뜬금없긴 하지만, 언젠가 노희경 작가는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라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가슴 시린 사랑을 했다고 해서,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뒤통수를 맞았다고 해서, 누군가를, 그리고 무언가를 사랑하는 일을 포기하는 것은, 스스로에게 죄를 짓는 일이라는 것이다.
15. 그런데 이건 콘텐츠 세계에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자신이 만드는 콘텐츠가 너무 구리다고 느끼든, 아니면 스스로 자뻑에 빠지든, 그게 어떤 이유든 콘텐츠 세상에선 창작을 멈추는 것 그 자체가 유죄일 수 있달까? 그러니 앞으로도 계속 뭔가를 만들어갈 나와 또 다른 누군가를 위해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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