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mewon Apr 10. 2019

휴가 이유서

한계, 실존, 그리고 예의

1. 좋아하는 한 아티스트는 이렇게 노래한 적이 있습니다. "이 못난 나를 조금 멋지게, 부족한 나를 값지게 만드는 게, 바로 내 음악이네"


2. 의도한 삶은 아니었지만, 콘텐츠란 이름의 무언가를 만들고, 또 글을 쓰는 일을 하면서, 늘 불확실성에 흔들렸지만, 그럼에도 이 일이 가치가 있다고 느꼈던 건, 한없이 부족하고 모자란 저 같은 사람도, 이따끔씩은 온전한 무언가를 만들 수 있다는 그 신비한 가능성 때문이었습니다.


3. 물론 이 온전함이라는 게 직업인으로서의 저의 경쟁력이나, 또는 얼마나 큰 비즈니스적인 가치를 얼마나 가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래도 흠결 많은 불완전한 한 인간에게서 어느 정도의 완결성을 갖춘 무언가가 만들어진다는 게 신기했고, 때로는 재미있었습니다.


4. 그래서 이따끔씩 글을 쓰고 싶거나, 무언가를 만들고 싶다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글을 쓴다는 건, 콘텐츠를 만든다는 건, 한없이 나약하고 남루한 인간이 그래도 자기보다 나은 무언가를 세상에 남기는 일일 수 있다고. 그러니 무언가를 만들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면 일단 시도해보라고.


5. 다만, 안타깝게도 '아주 가끔씩은 자기보다 나은 콘텐츠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말에는, 그보다 빈번하게 자신이 가진 부족함과 편협함을 세상에 드려낸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혹자는 '글을 쓴다는 건 결국은 자신의 한계를 드러내는 일'이라고 말하기도 했고, 그 말에 깊이 공감하기도 했습니다. 단지 그 일말의 가능성에 좀 더 기댈 뿐이었죠.


6. 그런데 요즘은 이런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어차피 나약한 인간이라 여러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자신이 어떤 한계를 가지고 있는지를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을 수 있다고 말이죠. 그리고 자신의 한계를 발견하는 방법으로, 그동안 자신이 써놓은 글들을 들여다보는 것은 유용한 접근일 수 있습니다.


7. 아니, 과장을 좀 보태면, 모든 글에는 글을 쓴 그 순간의 실존이 반영되기 때문에, 이런 복기를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무언가를 계속 만드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가야 할 길이 멀다면, 잠시 쉬면서 복기의 시간을 가지는 것도 괜찮을 수 있고요.


8. 그래서 아시는 분들도 있지만, 3월 말부터 한 달의 휴가를 내고, 거짓말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물론 이 복기의 과정이 생각보다는 낭만적이진 않았습니다. 늘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지만, 행간에 나타나는 나태함과 사려 깊지 못함에 사뭇 놀라기도 했고,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이랬으면 더 좋았겠다는 후회도 들었고요.


9. 그래서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는 이 과정이 정말 의미가 있는 건지 되묻을 것 같습니다. 사실 저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아니, 좀 더 솔직히 말하면, 이런 잠깐의 시간으로 어떤 변화나 성장이 만들어진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저는 순수하지 않고요.


10. 단지, 이쯤에서는 지나온 시간들을 되돌아보는 게 필요하다고 느꼈고, 이게 그래도 나름 열심히 살아온 지난 실존들에 대한 예의인 것 같다고 느꼈습니다.


11.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쉬지 않았다면, 늘 해왔던 대로 생각하고 또 행동했을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일부러 궤도를 벗어나는 것도 나름의 괜찮은 선택인 것 같다고요. 직장인으로서 한 달의 휴가를 누려보는 것 자체도 신기한 경험인 것 같고요. 동시에 쿨하게 보내주신 회사에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


12. 그리고 지금 이 거짓말 같은 순간의 저의 실존과 그 한계도 기록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아 이렇게 몇 자 씁니다. 감사합니다. 끝.


2019.04.10.

작가의 이전글 시즌별로 스스로의 한계를 발견하는 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