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우리말 탐험기

한국말 '맛' 살리는 법

by 솜글


번역을 해보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영어보다 우리말을 더 많이 공부하게 될 줄은 몰랐다. 물론 번역 실력이 늘고 어려운 원문을 작업하게 되면 영어에 더 집중해야겠지만, 입문 단계에서는 한국어를 바로 쓰는 능력이 훨씬 더 중요하다.



우리말에는 맞춤법 검사기로도 쉽게 걸러지지 않는 규칙들이 생각보다 많다. 맞춤법이라면 그래도 보통 사람들보다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큰 오산이었다. 공부를 시작하자마자, 잘못됐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은 틀린 표현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글을 쓰고 나서 맞춤법 검사기 한번 돌리는 것으로 완전한 어법의 글을 완성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건 너무 안일한 태도였다. 글은 처음 쓸 때부터, 표현 하나하나가 바르고 적확하게 쓰이고 있는지 날카롭게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거구나.






어법도 어법이지만, 우리말을 배우면서 글을 쓰려다 보니 신경 쓰이는 게 하나 늘었다. 한국어를 한국어답게 쓰고 싶은 욕심이 생긴 것이다.



우리말은 다른 언어와 대비되는 특성이 몇 가지 있는데, 그 특성을 살려줘야 우리말의 '맛'이 난다고 한다. 한국어의 특성을 잘 살려서 글을 쓰면 더욱 분명하고 생생하게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동사'가 발달한 우리 언어는 그만큼 동사를 많이 활용해야 의미가 더 섬세해진다. 동사 뒤에 '-하고/하면서/하다가/...' 등의 활용형 어미를 붙여 더 풍부한 의미를 부여하는 언어라고 하니, 이 특성을 더 잘 살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수시로 들었다.



동시에 우리말은 '형용사'를 서술어로 써도 풍부한 표현이 가능하다. 동사/형용사를 쓴 문장은 보통 'A는 B 하다'로 표현된다.



반면에 영어는 '명사' 중심 언어다. 'A는 B이다' 형식으로 말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언어의 차이는 동서양의 문화 차이로 설명될 수 있다고 한다.



서양은 동양에 비해 '개체성'을 중심으로 사고한다. 내 앞에 놓인 물건을 그 물건 자체로 인식하지, 물건을 둘러싼 주위 환경이 어떤지는 비교적 관심이 적다. 그래서 명사를 중심으로 사고가 발달하고, 말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에 반해 동양에서는 관계를 먼저 생각한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서로 어떤 영향을 주고받는지, 상호작용을 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동사형 문장을 많이 쓰게 되었다.



"나 운동해"라는 말을 서양에서는 "I'm a gym-goer"라 표현할 수도 있고, 동양에서 "차 좀 더 마실래?"라는 물음이 서양에서는 간결한 "More tea?" 정도로 바뀌기도 한다. 또, "술/담배를 너무 많이 한다"라는 말도 "Heavy drinker/smoker"라는 명사로 만들 수 있다.



나와 체육관(gym)의 관계, 너와 차(tea)의 관계 그리고 행위자와 술/담배 사이 관계에 관심을 가지면 동사를 활용하고, 그보다 개체 자체를 강조하면 명사를 활용하게 된다는 설명이다.



떠올려보면 명사 중심의 영어 표현은 셀 수 없이 많고, 동양인으로서 가끔은 그 표현들이 세련되고 쿨해보이기까지 한다. 원어민처럼 영어를 쓰려면 아무래도 그런 표현과 친해져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명사형 문장은 직역했을 때 굉장히 어색하게 들리는 경우가 많다. "나는 체육관 가는 사람이야"라는 문장은 처음부터 직역이 불가능했던 것처럼 부자연스럽게 들린다.



그래서 번역 첫 시간에 배운 것도 영어 원문의 명사는 한국어의 서술어로 바꾸어 옮기면 자연스럽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우리말을 더욱 섬세하고 풍부하게 사용할 수 있다. 말 '맛'이 사는 것이다.






그런데 이 내용을 배운 뒤부터 오히려 우리말을 쓰는 게 어색하고 어려워진 때가 많아졌다. 퇴근 후 저녁에 번역을 공부하다가 아침에 회사로 출근하면 이 괴리감이 더 커지곤 하는데, 바로 회사에서 사용하는 말틀 때문이다.



회사에서는, 특히 보고서를 작성할 때는 대부분 명사를 많이 활용해서 간결하고 직관적으로 표현하게 된다. 현상을 명확하게 표현하고, 인과관계가 최대한 뚜렷하게 나타날 수 있게 말하려다 보니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



보고서 문장을 동사형으로 한없이 주저리 늘어놓으면 격에 맞지 않는 느낌이 든다. 바쁜 임원들의 주의를 끌기 위해서는 군더더기는 빼고, 한눈에 내용이 확 들어오게끔 보고서를 작성해야 한다.



그래서 보고서는 명사 중심으로 작성하되, 자료를 바탕으로 직접 구어체로 설명하면서 이해를 돕는 작업이 필요할 때가 많다.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해 온 회사 생활의 말틀이었는데, 우리말 맛을 살리려면 원래 동사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니 혼란이 일었다.



영어 표현을 그대로 차용해 온갖 줄임말을 만들어 쓰기로 유명한 S기업에 다니기 때문에 더 큰 괴리를 느끼는 것도 같다. 그렇다고 다른 회사들 사정이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 같지만.






회사에서 뿐 아니라 혼자 글을 쓸 때도, 어떻게 쓰면 어법에 맞으면서도 맛깔나는 문장을 만들 수 있을까 고민이 된다.



아마도 계속 배우면서 동시에 계속 써보는 것, 그 방법밖에는 없을 것이다.



우리말의 맛을 살리면서도 나만의 개성이 드러나는 매력적인 문체를 갖게 될 날을 기대하며, 그저 계속 쓸 수밖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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