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스팅, 무작정 하면 안 됩니다!
지난 글에서는 테이스팅과 드링킹이 다른 이유, 즉 와인 테이스팅에서는 와인을 마실 수 없다는 사실에 충격받은 일화를 썼다면, 이번 글에서는 와인을 테이스팅 하기 전에 조심해야 할 것들에 대해서 기록하고자 한다.
우선 테이스팅의 준비 단계다. 뭐 일단은 테이스팅 하고 싶은 좋은 와인과 적절한 공간, 함께 테이스팅 할 사람 등등.. 여러 가지가 있어야 하겠지만, 이런 '외적인' 것들은 모두 잘 갖춰져 있다고 전제하자.
그럼 특별히 신경 써야 할 '내적인' 준비사항은 어떤 게 있을까? 와인 학원에 다니면서 내가 쉽게 간과했구나 싶었던 준비사항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나의 상태'가 와인에 충분히 집중할 수 있는 상태인가? 에 대한 것이다.
먼저, 와인을 테이스팅 하려는 사람은 향수를 뿌리지 않는다. 와인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는 향이다. 오래 숙성시킨 프리미엄급 와인의 경우는 더욱 복합적이고 풍미 있는 향을 낸다. 오랜 숙성을 거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본연의 과실향에 충실한 와인들은 짧게나마 그가 내뿜는 아로마에 집중해 볼 만하다.
와인의 향을 잘 맡기 위해서는 와인이 휘발성과 발산력을 끌어올릴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래서 하는 게 스월링Swirling이다. 테이블에 잔을 붙여서도, 공중에 잔을 들고서도 여유롭게 혹은 현란하게, 어떤 방식으로 흔들든 상관없다. 하나 주의할 것은 스월링으로 향을 한번 방출시킨 후에는 잠시동안이지만 내 후각에 온 힘을 다해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때가 초심자로서 이게 도대체 무슨 향이 난다는 건지 멍-해지기 마련인 순간인데, 아침에 무심코 뿌린 향수가 방해꾼 노릇을 해버리면 곤란하다. 그래서 와인을 섬세하게 테이스팅 하고 싶다면 내 상태는 최대한 '깔끔하게' 유지하는 것이 좋다. - 여기서는 ‘중립적으로’라는 의미에 더 가깝다. 몰랐던 거지만 와인 애호가들은 귀한 와인을 즐길 때 향수를 뿌리지 않는 것을 아주 기본 중의 기본으로 생각한다고 한다.
향수도 향수지만, 테이스팅의 끝은 결국 '맛'을 봐야 하기 때문에, 테이스팅 직전에 너무 냄새가 강렬하거나 자극적인 음식을 먹는 것도 자제하는 것이 좋다. 어쩔 수 없이 그런 음식을 먹었을 때는 양치나 가글로 입을 청결하게 하는 것도 방법이다.
테이스팅은 역시 온몸의 감각을 끌어올려 와인을 분석하는 일이기 때문에, 와인을 마주하기 전에 이렇게 나의 상태를 섬세하게 준비하는 과정도 필요한 것 같다.
테이스팅에 앞서 또 한 가지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면 테이스팅 행위 자체에 대한 Rule 설정이다. 테이스팅을 어떤 방식으로 할지 나만의 원칙을 세우면 좋다는 것이다. 나는 이 원칙을 '짧고 굵게, 그리고 일관성 있게'로 설정했다.
와인의 향을 맡거나 입에 머금고 맛을 볼 때는 '짧고 굵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향이나 맛을 감각하는 시간은 2~3초로 충분하다. 여기서 시간을 더 끌면 오히려 더 긴가민가한 상황이 오기 쉽다. 그리고, 나의 ‘테이스팅 타임’을 2~3초로 정했다면 그 원칙은 어떤 와인에든 예외 없이 '일관성 있게' 적용해야 한다.
향이 약하고 단순한 화이트와인이라고 해서 5초 이상 향을 깊게 스읍-- 들이마시고, 강렬한 향을 가진 거친 레드와인이라고 해서 2초 내로 살짝 킁- 숨을 들이키면 와인의 향에 대한 기준이 흐려지기 마련이다. 이 기준이 흔들리는 순간 앞으로 테이스팅 해 볼 수많은 와인에 대해 예리한 데이터를 쌓는 건 물 건너가는 것이다.
그래서, 본인만의 원칙을 가지고 테이스팅에 어느 정도 리듬을 갖게 되는 것은 와인을 공부하기에 참 좋은 방법인 것 같다.
Step 1. 와인잔을 잡고, 한 번 찰랑 스월링 한 후 코를 잔에 살짝 담그듯이 내 쪽으로 끌어와 향을 2~3초가량 맡는다.
Step 2. 입안을 조금은 채운다는 생각으로 와인을 머금고 이번에도 2~3초가량 입 안에서의 질감을 느낀다. - 탄닌은 어떤지, 바디감은 어느 정도인지. 이때, 가글 하듯 와인으로 우물우물 입 안을 적셔보는 것도 좋다.
Step 3. 와인이 남기고 간 여운을 느낀다. - 14% 이상의 알코올감이 강한 와인들은 목 끝에서 열감이 올라오지는 않는지, 그 열감이 혹시나 배에까지 전달될 만큼 세지는 않은지. 또, 아까 캐치한 향들이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얼마나 오래 내 몸을 감싸안는지.
나만의 일관된 리듬을 찾아 몇 번이고 반복한다면, 그 어떤 와인이 내 앞에 놓이더라도 두렵지 않다. 그전까지 같은 자세로, 같은 리듬으로 테이스팅 해본 와인들이 내 속에 남아서 든든한 버팀돌이 되어줄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나만의 태도, 원칙, 리듬으로 꾸준히 와인을 대한다면 어느 순간부터 이 ‘짧고 굵은’ 시간들은 내 안에 켜켜이 쌓여 깊은 층계를 이루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그래도 와인을 조금은 ’제대로 감각‘하면서 마실 수 있겠지. 그날이 오기를 기대하며 공부에 정진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