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스팅인데 삼키면 안 된다고?
와인을 배우기로 결정했을 때 가장 기대한 건 아무래도 테이스팅이었다. 이론 수업 내용은 유튜브나 책만 찾아봐도 내용을 얼핏 알 수 있지만, 전문가와 함께 와인을 마셔보는 것은 평소에 갖기 힘든 귀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직관적으로만 생각해 봐도 이론 수업 vs 실습 시간이니, 실습에 더 구미가 당기는 건 당연한 일이다. 지인들에게 와인 수업에 간다는 이야기만 해도 대부분 와인을 '마시러' 가서 부럽다 하는 반응이었으니, 기대감에 부풀어 오르는 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첫 수업 날, 이론 수업 시간이 끝나고 드디어 와인 테이스팅이 시작됐다. 내 앞에는 5잔의 작은 와인잔이 놓였다. 전 날 숙취로 인해 온몸에 여전히 남아 있는 알코올의 감각을 느끼면서도 각자의 빛깔로 채워진 와인잔을 보니 설레는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다.
내적 호들갑을 시작하려는 그 찰나, 테이스팅의 필수 준비물들이 나란히 보인다. 와인잔, 물, 그리고 종이컵. 이 종이컵은 특이점이랄 게 전혀 없는 친숙한 것이지만, 테이스팅에 쓰이는 종이컵은 그만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 이름은 바로 '스피툰Spittoons', 한국어로는 '타구통'이다. 제대로 된 테이스팅을 위해서는 와인이 얼마나 비싼지, 얼마나 귀한지에 상관없이 결국에는 뱉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애주가로서의 얄팍한 자존심과 와인을 향한 애정이 힘을 모아 본격적인 내적 항의가 시작되었다. 와인을 뱉으라고? 그건 예의가 아니야! 격렬한 혼란이 일었다. 그때, 강사님의 단호하고도 건조한 음성이 들려왔다.
"테이스팅과 드링킹은 엄연히 다릅니다. 다들 성인이시니 각자의 책임과 선택에 따르겠지만,
아무리 '나 술 잘한다' 하는 사람도 테이스팅에서만큼은 와인을 있는 그대로 마시면 곤란해요.
테이스팅은 우리가 가진 정말 예민한 감각을 총동원해서 와인을 분석하는 일입니다.
와인을 삼키는 순간, 이 감각은 무뎌지기 마련이에요. 와인을 제대로 느낄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거죠."
테이스팅이 곧 드링킹이었던 내 세상에는 작은 균열이 생겼다. 이성적인 언어로 중무장한 강사님의 결연한 눈빛에서 흔들리던 내 마음도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가까스로 되돌아갔다.
첫 시간이 하필이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품종이자 대부분 비싼 가격에만 구할 수 있는 피노누아라서 더욱 속상한 느낌이 들었다.
뱉어내는 척 조금씩 삼키기도 하고, '알코올의 열감을 느껴보기 위해서'라는 핑계를 대며 뻔뻔하게 한두 모금 넘겨보기도 했지만 역시나 내가 알던 드링킹과는 차원이 달랐다.
첫날의 그 낯선 마음은 뒤로 하고, 수업이 계속될수록 와인을 뱉어내는 테이스팅에 이제 조금은 적응한 것 같다. 버려지는 와인에 대한 미련이 완전히 없어졌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 개념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나 할까? 이 뱉어냄의 원칙을 이해하게 된 여러 수업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첫 번째는 <스파클링과 주정강화 와인> 수업 시간이었다. 이 두 와인은 일반 와인들과 달리 품종이나 기후 차이에 따른 세밀한 풍미 차이가 크지 않기 때문에, 와인을 마시는 것이 허용되는 분위기였다.
일반 와인의 테이스팅 순서를 따르기보다, 각기 다른 산지의 스파클링과 주정강화 와인 몇 가지를 비교 시음해 보는 정도로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퇴근 이후 갔던 수업이라 노곤한 상태였지만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내 앞에 놓인 이 와인들을 마구 삼켜버리겠다 하는 마음이 들었다.
시음 와인은 5가지로, 각 30~50ml였으니 총 200ml 정도였는데, 빠른 속도감 때문인지 적은 양으로도 정신이 취하는 느낌이었다. 수업 내용을 하나라도 놓치고 싶지 않은 욕심에 마시면서 필기까지 병행하려니 무척 힘에 부쳤다.
그 순간, 테이스팅에서 와인을 마시면 안 되는 이유를 남이 하는 언어를 통해서가 아닌 내 언어로 직접 깨달았다.
이거 몇 모금 마신다고 감각이 그렇게 흐트러지겠어? 하던 오만함이 고개를 수그리고, 뱉어내는 행위의 의미가 내 속에서 번지듯 빠르게 짙어졌다.
두 번째로 비슷한 깨달음을 얻었던 때는 <카르베네소비뇽과 메를로, 쉬라> 시간이었다. 레드 와인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국제 품종으로, 이름도 익숙하고 경험도 많이 해본 만큼 더 잘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적포도 품종에서는 가장 메인이 되는 수업이랄까.
특히나 카르베네소비뇽과 메를로는 프랑스 보르도에서 주로 혼합해서 생산하는 품종으로, 이 보르도 블렌딩은 미국 나파밸리 같은 신세계 국가에서도 널리 쓰이기 때문에 욕심이 더 컸던 것 같다.
이 수업에서 와인을 왜 삼키면 안 되는지를 또다시 깨달은 이유는 '테이스팅이 너무 어려워서'이다. 껍질이 두껍고 높은 산도와 탄닌을 자랑하는 카르베네소비뇽과, 그에 비해서 구조감이 더 좋고 과실의 상큼한 풍미가 특징이라는 메를로의 비교는 이론만 배웠을 때는 일견 쉬워 보였다.
그러나 4개의 테이스팅 와인이 내 앞에 놓이는 순간, 좀 전의 그 자신감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길을 아주 크게 잃은 듯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4개의 와인에서 나는 향이 다 비슷했기 때문이다.
카르베네소비뇽 100% / 메를로 100% / 카르베네소비뇽 메인 블렌딩 / 메를로 메인 블렌딩 이렇게 네 가지를 비교하는 테이스팅이었는데, 비교는커녕 내게는 그저 맛있는 와인들일뿐이었다.
이론 수업에서 살짝 다시 고개를 들 뻔했던 나의 오만함은 이제 갈기갈기 찢겨 저세상으로 날아가버린 듯했다.
이 기분은 사실 레드와인에서뿐만 아니라 화이트와인에서도 같았다. 세미용, 소비뇽블랑, 샤도네이, 슈냉블랑, 리슬링,... 이 모든 화이트 품종에 대해 후각과 미각을 분석하는 작업에서 좌절감이 다시 찾아왔다. 내가 재능이 없는 게 확실한 건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때부터는 비싼 와인이어도 호들갑 떨지 않고 차분하게 뱉어내는 법을 배운 것 같다. '체화'했다는 말이 잘 어울릴지도..
앞으로의 와인 여정에서도 이 초연함을 잃지 않고 언제나 일깨워진 감각으로 와인을 공부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