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의 향에서 질감을 느끼다
와인은 공감각적이다. 학창 시절 문학 시간에 배웠던 '공감각적 심상'이라는 말에 딱 들어맞는다.
'심상'이라는 말은 사전에 '감각에 의하여 획득한 현상이 마음속에서 재생된 것'이라고 되어 있다. 여러 가지 감각이 하나의 물줄기로 합류하듯 내 안에서 동시에 흐르는 느낌을 잘 포착해 주는 단어인 것 같다.
와인의 공감각에도 여러 감각의 조합이 있겠지만, 나를 가장 강렬하게 사로잡는 건 후각과 촉각의 결합이다.
와인의 향에서는 질감이 느껴진다. 특히 와인의 1차향이라고 표현되는 과실향은, 맡으면(후각) 그 과실의 질감(촉각)이 함께 전해져 온다.
서로 비슷한 산도의 화이트와인이 2가지 있다고 하자. 우리가 느끼는 신 향의 정도는 비슷할지라도, 한 와인은 찌르는 듯 날카로운 신 향을 가지는 반면, 다른 와인은 둥글게 감싸는 듯한 신 향을 낼 수도 있다.
또 한 가지 신기한 건 과실향에서는 바로 그 과실의 크기와 질감(texture)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레드와인의 향에서 주로 발견할 수 있는 레드/블랙커런트는 열매의 크기가 작아 밀도와 집중도가 높다. 이런 과실은 향으로 맡았을 때도 딸기나 자두, 블랙체리와 같이 비교적 큰 과실보다 더 농축된 향이 난다.
포도로 만든 와인에서 다른 과일의 향을 감지하는데, 그 과일의 질감까지 느껴진다는 건 신기한 일이다.
그래서 와인을 마신다는 건, 총체적인 모습의 자연이 내 입안에서 어우러지는 경험을 하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또, 와인의 향은 복합적이다. 여름에 차갑게 칠링해서 먹기 좋은 화이트와인 같은 경우는 1차 과실향에서 뚝 끊기기도 하지만, 좋은 와인일수록 향은 여러 개의 층계를 간직하게 된다.
와인의 향은 대개 1차, 2차, 3차 향으로 구분된다. 1차향은 품종에서 기인하는 향으로, 과실향을 낸다. 2차향은 수확 이후 어떤 양조 방식을 거쳤느냐에 따라 훈연, 나무 등의 오크향을 낼 수 있다. 3차는 양조 이후 숙성을 거치면서 발현되는 향이기 때문에, 오래된 빈티지 와인에서 찾을 수 있다.
그래서 좋은 와인은 2/3차향이 두드러지면서 레이어가 풍부하고 여운이 길게 남는 와인이 된다. 양조에 들인 노력과 숙성한 시간의 흔적은 마지막에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저 마실 것에 불과한 주류일 뿐인데, 잔에 담기는 순간 그 안에서 과실뿐 아니라 유제품, 나무, 심지어는 휘발유와 가죽향까지 난다니, 그 점에 나는 홀려버리고 말았다.
와인을 머금고 젖은 숲바닥과 나뭇잎 향이 난다고 표현할 수 있다는 게 참 시적인 것 같아 좋다.
와인을 마신다는 건 어떻게 보면, 하나의 감각에서 시작해 또 다른 감각으로 넘어가는 감각의 여정과도 같다. 코와 혀, 손끝과 마음으로 느끼는 이 공감각의 예술을 앞으로도 다채롭게 즐겨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