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날, 3월1일 토요일
베이징 공항에 도착했다. 후추향 같은 강렬한 중국 냄새는 없었지만, 역시나 공산당스러운 긴장감이 곳곳에 서려있었다. 짐을 찾고 택시 존으로 이동한다. 중국은 알리페이나 위챗페이로 모든 게 통하는 나라다. 모든 거래가 카드, 현금이 아닌 QR 코드로 연동된다. 2년 전 연태 여행에 현금만 챙겨 갔다가 길거리 음료 하나 마시지 못한 서러움을 잊지 못해 이번에는 알리페이를 착실히 잘 깔아왔다.
중국 택시인 디디택시를 타고 처음 마주한 베이징의 모습은 그야말로 회색의 삭막한 도시. 택시를 타고 시내로 나가는 길 내내 나무가 아스팔트로 만들어졌다면 이런 모습일까, 하는 광경이 이어졌다. 회색 도화지에 어두운 색으로 거칠게 선을 그은, 그 속에 서있으면 곧장 공포영화라도 시작될 듯한 회색 숲이었다. 상해 와이탄의 이미지가 강해서인지, 베이징도 괜시리 삐까뻔쩍한 그런 첫인상을 줄 거라 넌지시 기대한 모양이다. 베이징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꺼내든 마스크를 한번 더 푹 눌러썼다.
도착한 호텔은 IHG의 가성비 브랜드인 홀리데이 인 익스프레스. 회사에서 여러 번 장기로 나갔던 미국 출장의 유일한 장점은 호텔과 항공사의 멤버십 제도에서 조금은 대우받는 수준의 등급이 주어진다는 것이었다. 2년 전 출장으로 쌓은 IHG 포인트로 2박을 무료로 예약한 터라, 호텔에 도착해 체크인하는 순간 가성비의 만족감이 차올랐다.
베이징 여행의 콘셉트 중 하나는 단연 먹부림이었다. 꽤나 늦어진 시간이었지만 짐을 간단히 풀어놓고 바로 식당으로 향했다. 베이징의 메인 거리라는 왕푸징 거리로 30분 정도 걸어가는데, 호텔 근처에서 꽤나 근사한 작은 서점을 발견했다. 알폰소 무하를 비롯한 인상주의 화가 그림들을 박스 표면에 깔끔하게 붙여서 판매도 하고, 에코백 같은 굿즈를 곳곳에 비치하고 있어서 트렌디한 느낌을 주는 서점이었다. 중국에만 가면 까막눈 처지가 되는 탓에 책 구경은 남의 얘기였지만 작은 동네 서점 특유의 아늑함과, 세련되게 장식한 영 young 한 감성이 마음에 들었다.
동네의 이모저모를 구경하며 도착한 왕푸징 거리. 왕푸징 거리는 한눈에 봐도 명동의 거리를 연상케 했다. 이런 관광 특화 거리에 오면 관광의 메커니즘이 신기하게 느껴진다. 왜 하필 그곳일까. 마케팅 효과일까, 한번 다녀온 관광객들의 입소문 영향일까, 아니면 실제로 그곳이 외국인 상대로 질 좋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는 방증일까? 어느 쪽이 정답이 될는지는 모르겠다. 허나 회사 근처임에도 불구하고 명동을 자주 찾지 않는 나로서는 이런 게 관광의 한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관광을 하면서도 현지인들의 '찐일상' 근처에는 다가가기 힘든 거구나 하는 생각. 하긴, 삼사일 일정으로 로컬의 일상다반사를 다 익혀 올 수 있다면 세상은 너무 납작한 곳이 될 것이다.
왕푸징에서 APM 쇼핑몰을 찾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곳 5-6층엔 한국인들에게 유명한 맛집이 다수 포진되어 있었다. 다음날 폭풍 검색으로 찾아갔던 맛집들도 하나같이 APM 내부 식당이었으니, 베이징을 방문했다면 검색 없이 그냥 일단 APM으로 직진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것 같다. 첫 번째로 당도한 맛집은 Grandma's Home 이라는 중국 가정식 전문점이었다. 깔끔한 내부 인테리어와 그에 걸맞은 단정한 메뉴들을 보니 왜 그토록 한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꽤나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대기를 했어야 했는데, 앞뒤로 한국인이 끊이지 않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주문한 것은 다름 아닌 맥주(피지우). 베이징에서는 옌징 맥주를 마신다. 베이징을 비롯한 중국 북부에서 많이들 마시는 맥주라고 한다. 단연 중국 3대 맥주 중 하나이기도 하다. 옌징 맥주는 종류가 다양해서 여러 가지를 마셔보고 비교하는 재미가 있었다. 중국 맥주는 값도 싸고 맛이 있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는데, 그건 맥주가 충분히 '시원하지 않다는' 것이다. 한국 사람으로서 퍽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마실 것은 그게 무엇이든 간에 따뜻하게 마시는 중국 문화가 있어서, 맥주를 주문하면서 목소리 높여 '삥더!' (차갑게요!) 라고 외쳐봤자 소용없는 짓이다. 그래도 미지근하지는 않은 맥주를 준 것에 감사해야 할 노릇인 것 같다.
Grandma's Home에서 먹고 싶었던 동파육과 마파두부는 솔드아웃이었다. 늦은 시간 때문인가 싶었지만 그러기엔 우리보다 훨씬 먼저 온 한국인의 식탁에도 그 모습은 볼 수 없었으니, 꽤나 이른 시간부터 솔드아웃이었겠지 위안을 삼았다. 대신 블로거들의 또 다른 추천 메뉴인 마늘새우는 주문이 가능했다. 우리나라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통실한 새우살, 그리고 감칠맛 나는 마늘기름까지 맥주 안주로 제격이었다.
2차로 향한 곳은 24시 딤섬집인 금정헌. 꽤나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하는 탓에 디디택시를 또 불러 탔는데, 24시간 영업하는 지점이 아닌 다른 지점으로 잘못 와버렸다. 시간은 21:44분. 이 지점은 22시까지가 영업이라 택시까지 타고 와서 허탕을 쳤나 벙쪄서 잠시 우왕좌왕하던 순간, 어떤 커플이 아무렇지도 않게 금정헌으로 입장하고 있다. 덩달아 따라 들어가 보니 뜻밖에도 식사가 가능하다는 답변을 받았다.
우리나라는 보통 영업 종료 시간을 기준으로 30분 정도 앞서 '라스트오더' 시간이 있는데, 중국은 참 정직하게도 영업시간이 곧 주문 가능 시간이었던 것이다. 영업 종료 시간에 셔터 내리고 말 그대로 그날 영업을 '종료'하는 개념에 너무 익숙한 나머지 지레 우리 문화를 대입해서 생각한 게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이런 사소한 (그렇지만 마냥 사소하지는 않은) 부분에서도 문화적 차이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여행의 묘미겠지. 그나저나 22:10분 정도에 방문한 한국인 관광객들은 입장을 거절당했으니, 10분 정도만 빨리 오셨으면 되었을 텐데 괜히 나까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금정헌에서 먹은 음식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이름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마라새우딤섬이었다. 우리나라에 마라가 유행을 탄지도 어언 10년이 다 되어 가니, 마라 맛에 익숙한 사람들은 누구나 좋아할 것 같은 메뉴다. 금정헌의 마라맛은 우리나라 마라탕 집의 얼얼/맵기 레벨의 중간 단계 이상이었다. 그 '마'함이 너무 좋고 자극적이어서 입에 감기는 새우살과의 조화를 옌징맥주와 충분히 즐겼다. 아, 그리고 이곳의 샤오롱바오는 일부러 좀 식혀서 서빙해주셨나 싶을 만큼 '미지근'한 온도다. 갓나온 샤오롱바오의 육즙을 느끼고 싶어 자주 혀를 데고서야 마는 나로서는 여간 배려받는 느낌이 아닐 수 없어 보이지도 않는 셰프님께 괜히 감사한 마음이 느껴졌다.
첫날은 이 정도의 먹부림으로 만족하고 다음날을 기약하기 위해 숙소까지 걸어서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