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날 3월2일 일요일
둘째 날 아침 호텔에서 눈을 떴다. 생각보다 호텔 컨디션이 괜찮아서 더 만족스러운 아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뀌지 않은 건 커튼을 걷었을 때 눈에 보이는 회색 정경. 두꺼운 유리창을 뚫고 희뿌연 먼지가 날아와 내 머리 위에 내려앉을 것만 같다. 서울에서는 미세먼지가 심한 날 이거 정말 출근하다 객사하는 것 아닌가 하며 걱정이 되곤 하는데, 이곳 사람들에게는 너무 일상적인 일인 듯하다. 어쩜 이렇게 건물도 하나같이 회색인지. 그래도 다행인 건 저 회색 도시 속에는 어떤 낯선 여정이 기다리고 있을까 하는 여행자의 설렘이 내 안에 여전히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 하루 여행을 시작하기 위해 힘차게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호텔은 무료 조식이 포함되어 있었다. 갓 일어난 사람들 가운데 세상 편안한 차림으로 느긋하게 보내는 조식 시간은 여행지에서 보낼 수 있는 소중한 순간들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하는데, 짧은 베이징 여행에서 미식 경험을 최대한으로 가져가고 싶어 조식은 건너뛰기로 했다. 점심부터 하루종일 예정된 성대한 맛집 탐방을 기대하며 나름대로 타협의 과정을 거친 것이다. 반면 이번 여행의 동행인인 - 앞으로 대부분의 여행에서도 동행할 - '우리집 중국인'은 간단히라도 먹고 오겠다며 조식이 있는 로비로 내려갔다. 여행지에서만큼은 먹성이 좋은 그가 부러울 따름이다.
우리집 중국인은 고등학생 시절 중국에 2년 정도 살았던 적이 있다고 한다. 언어를 스펀지처럼 흡수하기에는 늦은 나이에 간 터라, 중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좀 더 생존 언어에 가까운 현지 바이브는 완벽하게 익혀온 듯하다. 특히나 디디택시 기사님이나 식당 직원분들과 하는 간단한 대화에서 그 중국인스러운 바이브가 도드라져서 신기하다. 조금 거친 어투로 말하는 듯하면서도 간결함과 속도가 돋보이는 바이브. 외국어를 하면서 네이티브들 특유의 바이브까지 재현할 수 있다는 건 멋진 일이다. 어찌 됐건 언어에 대한 걱정은 조금 미뤄두고 우리집 중국인에 의지한 채 손을 꼭 맞잡고 넓디넓은 베이징을 누벼보기로 한다.
호텔을 나와서 점심 식사 장소로 향한다. 이번 여행에서 기대했던 것 중 하나는 길거리 찻집이었다. 카페인에 민감한 탓에 카페에서 차 종류를 자주 찾는 나는, 티백 하나 넣어주고 가격이 5-6천원 수준인 우리나라 카페에 꽤나 불만이 있는 편이다. 중국에서는 밀크티를 비롯한 산뜻한 차를 값싼 가격에 마실 수 있다고 해서 내심 기대가 되었다. 대만에서 겪었던 대중적인 티문화도 이 기대에 한몫한 것 같다. 왕푸징으로 가는 길에 블로그에서 눈에 많이 띄었던 헤이티 Heytea 를 발견했다. 다소 흥분되는 심정을 감추지 못하고 곧장 문을 밀고 들어갔다. 밝은 색감으로 가득한 차분하고 간결한 인테리어가 마음에 들었다.
기쁨도 잠시, 아뿔싸, 메뉴판을 보자마자 카페 내부의 밝은 조명만큼이나 내 머리 속도 하얘졌다. 메뉴를 나타내는 글은 가득한데 나는 그것을 언어로 인식하지 못하는 뇌를 가진 이른바 까막눈인 것이다. 그 흔한 영어 알파벳 하나 병기해두지 않은 것이 원망스러웠다. 얼른 스마트폰을 꺼내 문자 인식을 시도해 봤지만 소용없고, 블로그 후기를 뒤져봤지만 내가 원하는 메뉴는 찾을 수 없었다. 결국 포기하고 밖으로 나오면서 나는 적잖이 시무룩해졌다. 평소에는 느낄 일이 딱히 없는 까막눈의 설움을 온몸으로 느낀 것이다. 우리나라는 쓸데없이 모든 것을 영어로 표기하는 곳이 많은데, 영어를 제대로 배울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에게는 아주 고된 일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갑자기 시무룩해진 데에는 단순히 차를 못 마시게 된 것 이외의 이유도 있는 것 같다. 나는 여행의 과정이 문제 해결의 연속이라고 생각한다. 여정에서 맞닥뜨리는 문제들에 정면돌파해서, 하나하나 퀘스트 깨는 기분으로 여러 단계를 헤쳐가는 일련의 과정. 그런 측면에서의 임기응변에 능한 편이라 여행에 어려움이 생길 때마다 오히려 재미있어하기도 했고, 문제를 해결할 때 느껴지는 짜릿한 기분을 즐기기도 했다. 그러나 헤이티에서 마주했던 의사소통 문제는, 내가 어떻게 해도 이 상황을 돌파할 수 없다는 아득함과 함께 느닷없는 절망감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절망감을 이겨내는 것도 문제 해결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며 훌훌 털고 점심 장소로 계속해서 가보기로 한다. 오늘의 점심 메뉴는 다름 아닌 훠궈. 저녁 메뉴로 선정되었어야 마땅한 훌륭한 메뉴이지만, 양꼬치 맛집에 밀려 점심으로 배정되었다. 좌정우원이라는 이름의 훠궈집인데 이 집도 여김 없이 어제 방문한 왕푸징 APM에 위치하고 있다. 좌정우원은 우리가 흔히 훠궈하면 떠올리는 사천식 훠궈를 전문으로 하는 집이다. 알아보니 베이징식 훠궈의 경우 커다란 냄비가 아닌 독특한 모양의 신선로에 음식이 나오고, 육수 자체도 제대로 간이 되지 않은 맹한 맑은 국이라 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인기를 끌지 못한 것 같다.
좌정우원의 큰 특징은 주문한 소고기가 접시에 담겨 세로로 세워진 채 나온다는 것이다. 고기의 신선함을 부각하려는 목적을 달성함과 동시에 소위 '인스타그래머블'한 사진을 탄생시키는 데도 한몫하는 것 같아 마음에 들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대구 등지에서 맛볼 수 있는 생고기인 뭉티기를 먹을 때 접시를 뒤집어 보는 것과 비슷하다고 해야 하나. 어찌 됐든 실제로 고기 질도 정말 좋았고 얇게 저며져 있어서 매우 만족한 식사였다. 그리고 이곳의 킥은 마장이라고 생각했는데, 훠궈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땅콩장이지만 기분 탓인지 더 가볍고 고소한 느낌이 났다. 셀프바에 구비되어 있는 식후 아이스크림이 맛있다는 후기가 많았는데 훠궈를 다 먹자마자 정신없이 나온 탓에 맛보지는 못했다.
점심을 든든히 챙겨 먹은 우리는 서태후가 사랑했다는 황실의 여름 별궁인 이화원으로 향한다. 이화원과 남은 이야기는 다음 포스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