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날 3월 2일 일요일-3
저녁 시간이 가까워지자 서둘러 왕푸징으로 다시 돌아간다. 베이징을 거닐다 부러웠던 점이 하나 있다면 자전거 도로다. 땅덩어리가 워낙 넓어서인지 아무나 자동차를 탈 수 있는 형편이 안 되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전거 도로가 우리나라의 웬만한 2차선 도로보다 널찍하게 조성되어 있는 곳이 많았다. 우리나라는 자전거를 좀 타보려고 해도 자전거 도로가 마땅치 않고, 마음먹고 한강에 따릉이를 끌고 나가도 온갖 장비를 장착하고 쌩쌩 지나다니는 싸이클족 때문에 마음 놓고 자전거를 즐기기가 어려운 환경이다. 이에 비해 베이징은 어디서든 공공자전거가 널려 있고 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 부러웠다. 전문대가에서 왕푸징까지 자전거를 탈 수도 있었지만 오늘 여행 콘셉트는 '걷기'였기 때문에 걸어가기로 한다. 참고로 이 날은 하루 2.5만보를 걸은 날이었다.
저녁 장소는 헌지우이치엔 很久以前羊肉串 이라는 양꼬치집으로 정했다. '아주 먼 옛날에'라는 뜻이라는데 이름에서 풍기는 서정적인 이미지와 다르게 아주 세련되고 트렌디한 식당이었다. 상해에도 위치하고 있어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아주 유명한 맛집인 듯했다. 웨이팅을 기본 1시간은 해야 할 거라는 경고글을 많이 본 터라 급한 마음을 부여잡고 허벅지에 모터를 매단 듯 열심히 걸었다.
중국의 트렌디한 몇몇 식당은 손님에 대한 세심한 서비스 마인드가 돋보인다. 점심에 방문했던 훠궈집에서는 벗어둔 외투에 씌울 수 있는 가리개를 주어 음식물이 튀지 않도록 해주었는데, 대충 만든 천조각이 아니라 짜임새 있게 각이 잡혀 있어 쓸만했다. 헌지우이치엔에서는 뜨거운 화로에 얼굴이 달아오는 것을 덜어주기 위해 아이스 패드를 줬는데, 모두가 하나씩 이마에 붙이고 뜨거운 화로를 마주하고 있는 것이 이 집에서 볼 수 있는 진풍경이라 할 수 있다. 두 집 모두 앉자마자 머리끈을 테이블에 놓아주는 건 기본. 사소하지만 꽤나 감동받은 포인트였다. 항상 충분히 사두어도 어디 갔는지 필요할 땐 꼭 보이지 않는 '머리끈 미스테리'를 고질적으로 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서비스 마인드는 양꼬치 굽기에서 그 정점에 이른다. 나오자마자 프로페셔널하게 화로에 얹어지는 건 물론, 적당한 굽기 상태에 맞춰 어디선가 짜잔 하고 등장한 담당 서버가 양꼬치를 우리 앞접시로 가져다준다. 사실 나는 양에서 나는 특유의 냄새 때문에 평소 양꼬치를 즐겨 먹지 않는다. 헌지우이치엔도 어느 정도 걱정을 안고 찾은 곳인데, 걱정이 무색해질 정도로 양 고기의 신선함이 느껴졌다. 양 냄새도 거의 나지 않는 수준이어서 까다로운 내 입맛에도 딱 맞았다.
헌지우이치엔의 장점은 양꼬치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의 꼬치를 화로에 구워 먹을 수 있다는 점이다. 대표적으로 새우꼬치도 개별 주문이 가능한데, 버터의 녹진한 맛이 녹아든 새우 구이가 지금도 잊히지 않을 정도다. 이 날은 빠이주(백주)를 먹기 위해 별러왔던 날이므로 얼굴보다 큰 잔에 나온 호가든 생맥주와 함께 45도짜리 빠이주도 주문했다. 평소 마시는 연태고량주와 비슷하게 깔끔한 맛이었다. 마지막 식사 메뉴로는 중국식 냉면을 먹었는데, 호불호가 있는 음식이라더니 함흥냉면에 비해서도 매우 짜고 자극적인 맛이었다. 물론 나는 마음에 들었다. 헌지우이치엔은 여러 가지 꼬치 메뉴와 사이드를 골라 먹는 맛이 좋아서 단순 음식점이라기보다 정말 여행 온 기분을 한껏 느낄 수 있는 장소인 것 같아 더 좋았다. 다음에 상해를 방문하더라도 꼭 다시 오고 싶은 중국판 또간집이다.
배불리 먹은 우리는 또다시 호텔로 걸어가기로 한다. 그곳에서 재정비 시간을 가진 다음, 베이징의 Night Life를 체험하러 나가기 위해서다. 고심 끝에 목적지로 고른 곳은 산리툰. 산리툰은 베이징에서 가장 세련된 동네이자, 밤문화가 발달한 지역이라고 한다. 오늘 밤 우리의 목적에 꼭 맞는 장소였던 것이다. 디디택시에서 내려 마주한 산리툰의 첫인상은 명품 브랜드가 즐비한, 누가 뭐래도 '핫'한 곳이었다. 우리가 당도한 시간이 10시 즈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편집샵에서나 볼법한 옷가게들은 여전히 영업 중이었다. 이곳 산리툰에서는 물담배가 있는 작고 코지한 위스키바에서 발베니를 한잔 하고, 조금 더 시끌벅적하고 젊은 에너지가 넘치는 비어바에서 엑스트라 스트롱 비어를 마셨다. 10도짜리 작은 병맥주였는데, 먹는 동안 쓴 맛이 너무 강해서 다음부터 맥주는 엑스트라 스트롱은 피해야지 생각하며 한 모금 한 모금 쓴 맛을 목구멍 너머로 삼켰다.
산리툰에서 호텔로 돌아가는 디디택시 안. 오늘의 먹부림도 참 알찼다 생각했는데, 택시를 내리자마자 호텔 바로 옆 로컬식당이 눈에 띈다. 새벽 늦게까지 영업하는 듯하다. 허름한 외부에 넓지 않은 식당 내부, 그 안에 고독하게 끼니를 채우고 있는 로컬 두 아저씨가 우리 마음을 사로잡았다. 우리집 중국인의 반짝이는 눈빛에 넘어가 어느새 나는 앉은뱅이 의자에 앉아있다. "짜이라이 지단차오판! (계란볶음밥 주세요!)" 외치는 우리집 중국인의 목소리 뒤에 이어진 셰프님의 흐뭇한 표정에서 고수의 기운을 느낀다. 이윽고 주문한 우육면과 계란볶음밥이 나왔다. 우육면이야 얼큰하고 뜨끈한 국물이 예상 가능한 맛이었다 해도, 계란볶음밥은 내 기대를 훨씬 넘어서버리는 맛이었다. 계란을 끼얹은 보통의 볶음밥이겠지 그저 안일하게 생각한 나에게 이 계란볶음밥은, 어느 중국 골목 어귀 숨은 고수의 손에서 빚어 나온 다채로운 감칠맛의 집약체였던 것이다. 부른 배를 부여잡고 생각보다 많이 퍼먹게 되는 엔딩으로 끝맺을 수밖에 없었다.
계란볶음밥과 우육면, 그리고 옌징맥주까지 도합 만원이 채 안 되는 가격을 지불하면서, 이제껏 왕푸징에서 갔던 식당들은 죄다 고급 식당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로컬 음식만으로 여행 루트를 채웠다면 놀랄만한 예산으로도 여행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이제 이 이름도 모를 로컬식당은 내 머릿속에서 신비로운 기운이 감도는 비밀스러운 맛집으로 기억될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