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관리론>을 읽었으면 무라도 썰어야지
해야 할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 수동적인 삶에서 벗어나 능동적으로 의미 있는 삶을 살자고 다짐했었다. 방법을 잘 몰랐기에 일단은 다양한 루틴을 지속하려고 했다. 그중의 하나가 브런치에 꾸준히 글을 쓰는 것이었다. 브런치는 작년에 시작했다. 게으름이 도져서 흐지부지되었는데, 이번 연도에 다시 마음먹고 일주일에 1건의 포스팅을 하기로 했다. 회고를 해보자면 1주에 1건은 실패했다. 루틴을 다시 시작한 약 한 달이 지난 지금 총 2개의 글을 올린 것이 다였다. 주기는 2주였다. 그리고 마지막 글을 올리고 이번 주가 2주째 되는 날이다. 하지만 아직 주제도 못 정했다. 이유는 잘 알고 있지만 잘 알지 못하기도 한다. 또 걱정과 우울함에 시간을 뺏겨서 해야 할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떤 이유로 내가 부정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최근 데일 카네기의 <자기관리론>을 읽었다. 책의 핵심 내용은 ‘쓸데없는 걱정에 시간을 버리지 말고 생산적인 일에 시간을 쓰자’로 요약할 수 있다. 이 책을 읽었음에도 계속 시간 낭비를 하는 것은 독서를 한 시간 자체도 무의미한 시간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기에 책에서 나온 걱정 없애는 방법이라도 따라 해보기로 했다. 이렇게 내 감정도 다스리지 못하고 또 하릴없이 시간만 버리고 있다면 너무 한심할 것 같아서.
걱정과 불안 없애기는 아래 3가지 프로세스로 설명할 수 있다.
ⓐ 문제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하라
ⓑ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라
ⓒ 당장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건설적인 일을 하라.
그리고 데일 카네기는 쓰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문제가 해결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래서 일단 뭐가 됐든 적어보기로 했다. 적어보기만 해도 절반은 해결된다는데 안 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
나는 사실을 글로 적으면 훨씬 더 쉽게 분석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했다. 종이에 사실을 적어보거나, 문제를 말로 옮겨보는 것만으로도 현명한 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높아진다. 찰스 케터링Charles Kettering의 말을 빌자면, “문제를 명확하게 정의했다면 절반은 해결한 것이나 다름없다”.
<자기관리론>에서는 걱정을 떨쳐버린 다양한 사람의 이야기도 나온다. 그들도 하나같이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여러 번의 경험으로 저는 결정을 내리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었습니다. 목표에 다가서지 못하고 계속 같은 자리에서 맴돌며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다면, 누구나 신경쇠약에 걸리고 지옥 같은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저는 명확하고 확고한 결정을 내리는 순간 걱정의 50퍼센트가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40퍼센트는 결정을 실천에 옮길 때 사라지더군요. 결국 저는 다음 네 단계를 밟아 걱정의 90퍼센트를 사라지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1) 내가 걱정하는 문제를 정확하게 써본다.
2)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써본다.
3) 무엇을 할지 결정한다.
4) 결정한 대로 즉시 실행한다.
문제를 정확히 파악해보려고 해도 이 부정적인 감정이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지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최근에 기분 좋지 않았던 사건과 상황 등 생각나는 것들을 모두 적어보기로 했다.
앞서 적었듯 브런치에 글을 꾸준히 올리는 목표가 있었다. 더 이상 소비하는 삶이 아니라 생산하는 삶을 살자고 다짐하며 세웠던 계획이었다. 이번뿐만 아니라 작년부터 세웠던 목표였는데 계속 실패해왔다. 주기적으로 회고도 진행하면서 생각만 하지 말고 행동을 하자고 정리했지만,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스스로가 한심해졌다. 어느 날은 피곤하다는 이유로, 어느 날은 시간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가지각색의 이유를 들며 합리화하면서 계속 미뤘다. 실수가 반복되면 더 이상 실수가 아니라고 했다. 왜 이렇게 의지가 약하고 나태한지 답답해졌다.
사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매주 주제도 정했고 끄적거리기도 했다. 글을 잘 쓰고 싶어서 예전에 매력적인 글의 요건을 정리해본 적이 있었다. 단순히 포스팅하는 것 자체가 목표가 아니었고, 누군가는 내 글을 보고 어떤 분야에서든 삶이 나아지거나 긍정적인 영향을 받기를 원했다. ‘스스로 성장하고 타인에게 도움이 되는 글’을 쓰고 싶었다. 따라서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는 감정 쓰레기 같은 글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단순한 감정의 나열이나 어디서 봤을 법한 의미 없는 정보 전달이 아니라 유용한 정보 전달과 함께 실제로 삶에 적용해 본 후의 생생한 경험을 콘텐츠로 만들고 싶었다. 따라서 담아야 할 것도 많았고 직접 실행하고 느껴야 했다.
글에 담고 싶었던 항목은 아래 6개였다.
목적 : 글의 목적을 명확하게 이해하기
독자 : 대상 독자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정보 : 유익한 정보 전달하기
진정성 : 구체적인 경험을 통하여 생생함 드러내고 공감 포인트 만들기
실행 : 생각하게 하거나 실행할 수 있도록 돕기
구조화 / 라벨링 :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도구 추가하기
그런데 막상 어떤 주제를 정하고 자료를 정리하면 실행하기가 애매했고, 실행은 할 수 있을 것 같으면 너무 개인적인 경험이라서 보는 사람들에게 딱히 도움이 될 것이 없어 보였다. 뭘 해도 계속 부족하게 느껴졌다. 머리와 손에서 나오는 것들이 하나같이 형편없어 보였다. 그렇게 썼다 버렸다 하면서 시간은 흘러갔고 나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시간만 버리고 만들어낸 것이 없으니 막막해졌다.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감정이 방황하고 있으니 잘 될 리가 만무했다.
조만간 언니의 결혼식이라 주말에 아빠와 동생의 정장을 사러 나갔다. 오랜만에 온 가족이 모인 날이었다. 부모님이 좋아하셨고 새로운 경험이다 싶어서 기분이 괜찮았다. 서로 옷도 봐주고 사진도 찍어주고 커피도 마셨다. (동생과는 불편한 관계여서 그렇게 편하지는 않았지만) 그런데 옷을 살 때 갑자기 아빠가 직원에게 반말로 되물었다. “그래서 얼만데?” 굉장히 예의 없어 보였고 창피하기까지 했다. 물론 누가 봐도 아빠가 나이가 많고 직원이 어렸지만 그게 처음 보는 사이에 반말할 이유는 되지 않았다. 정작 당사자인 아빠와 직원은 아무 생각이 없었을 수는 있지만 나 혼자 그 무례한 모습에 기분이 확 나빠졌다. 좋았던 기분이 갑자기 푹 꺼져버렸다.
생각해보면 계속 존댓말을 했었고 그 순간에 아무 생각 없이 튀어나온 말일 수도 있었다. 혹은 내가 잘못 들었을 수도 있고. (사실 그때는 이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다. 그냥 지금 적으면서 그럴 수도 있었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냥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는데 그 몇 초의 경험과 감정이 며칠을 부정적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래도 좋은 하루였다고 생각하고 지나갈 수도 있었을 일을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여서 기분을 망쳐버린 것 같았다. 이런 비합리적인 사고와 태도에 또 자책했다.
며칠 전에는 아빠에게 짜증을 냈다. 보통 저녁은 아빠가 차려주시는데 그날도 평소와 같이 문을 두드리며 밥을 먹으러 나오라고 했다. 아직 일하는 도중이어서 알겠다고만 대답하고 바로 나가지는 않았다. 잠시 후 아빠가 두 번째로 문을 크게 두드렸다. 살짝 귀찮음을 느끼며 또 알겠다고 대답하고 방에서 자료를 찾아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다시 세 번째로 크게 문을 두드렸을 때 갑자기 짜증이 확 솟아서 그 감정이 다소 느껴질 정도로 크게 말을 해버렸다. 그러고 후회했다.
나에게 실망스럽고 짜증이 났다. 왜 이렇게 까탈스러운 성격이 되었는지. 항상 저녁을 챙겨주시는 부모님인데 그 수많은 긍정보다 살짝 부정적인 감정에 사로잡혀서 소중한 사람들에게 막 대하는 모습이 인간쓰레기같이 느껴졌다. 감정이 태도가 되지 말자고, 그런 사람들이 싫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을 발견하니 자기혐오가 싹텄다. 그렇게 며칠 동안 내가 왜 그랬을까, 다신 그러지 말아야지 생각하며 우울했다. 사실 누구보다 잘 해드려야 하는 분들이 부모님인데 오히려 생판 처음 보는 남들에게는 친절하면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불친절한 태도가 되는 것이 너무 미안해졌다.
친구에게 힘들다는 카톡이 왔다. 항상 회사가 힘들다, 사람이 힘들다고 하는 친구였다. 다소 형식적인 위로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내가 해결해 줄 수는 없는 문제였기 때문에 약간의 공감과 함께 이직 준비를 해보는 것은 어떻겠냐는 식의 이야기를 해주곤 했었다. 근데 이번에도 똑같은 문제로 카톡이 날라왔다. 뭔가 늘 부정적인 이야기가 지속되는 것 같았다. 항상 결론은 한국에서 살기가 힘들다는 이야기였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고 속으로는 정 힘들면 이민이라도 가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예전에 이 이야기를 했을 때 이민 준비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왔기 때문에 굳이 또 말로 꺼내진 않았다. 뭔가 매번 도돌이표가 되고 애써 긍정적으로 끌어올린 내 감정도 괜히 부정적으로 변하는 것 같아서 이번에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 대화방에는 나 말고도 다른 친구가 한 명 더 있었다. 같은 방에 있어서 나와 똑같은 상황을 겪고 있는 친구였는데, 그 친구는 매번 그 힘들다는 이야기에도 잘 반응해주고 공감해주고 이야기를 이어 나가 줬다. 이번에도 그랬다. 결론적으로 해결된 것은 없겠지만 생각해보면 힘들다고 하는 친구도 그냥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나는 내 감정과 생각만 우선되어서 그냥 무시해버리는 태도를 취했다. 잘 받아주는 친구와 비교를 해보니 내가 너무 이기적인 것 같았다. 사회성이 떨어지는 성격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 또 느끼게 되었다.
이 밖에도 부정적으로 느껴진 사건들이 꽤 있었던 것 같은데 결국 생각해보면 환경이나 주변 사람, 사건 자체가 문제는 아니었다. 그냥 편협하고 이기적인 스스로에게 짜증이 났던 것 같다. 끈기가 부족한 것도 싫고, 이해심이 부족한 것도 싫고, 감정이 태도가 되는 내 모습들이 다 싫어졌다. 사람은 누구나 장단점이 있고 웬만한 사람은 장점이 더 많은데 너무나 작은 단점만 크게 받아들이는 부정적인 태도도 싫었다. 나이를 먹으면 마땅히 성숙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너무 미성숙한 사람 같아서 회의감이 들었다. 아무리 책을 읽고 일기를 쓰고 좋은 사람이 되자고 다짐했어도 결국 하지 말자고 다짐했던 부정적인 행동을 반복하는 것이 나는 태생적으로 안 될 사람인 것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했다. 너무 한심했다. 난 평생 혼자 살아가야 할 사람인 것 같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위에는 최근에 있었던 사건이었고 한 번 우울의 소용돌이에 휩싸이니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들었던 모든 걱정도 화수분처럼 튀어 올라왔다. 나는 왜 이렇게 걱정이 많을까에 대한 걱정으로 또 우울해졌다. 다들 즐겁게 살아가고 별로 신경도 쓰지 않을 부분에서 혼자 예민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면서 힘들게 살아가는지 나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참 피곤한 성격같았다.
그래도 걱정에 대한 주제를 쓰는 김에 더 큰 불안에 대해서도 적어보기로 했다. 모든 불안을 객관적으로 파악해보라고 했으니까.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는 강박은 곧 ‘돈을 많이 벌지 못하면 어떡하지?’라는 같은 불안을 낳는다. 그렇다면 나는 왜 돈을 많이 벌고 싶은 것일까. 물론 돈 걱정 없이 살고 싶은 것도 있지만, 물욕이 많지는 않아서 좋은 집이나 차, 옷, 그런 것들이 삶의 목적은 아니다. 다만 지금 생각나는 것은 부모님이 나이가 들었고, 꼭 나이 듦이 아니더라도 갑자기 사고를 당한다거나 할 때 병원비가 많이 나올 텐데 돈이 없어서 치료받지 못하고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경우가 무섭다. 당장 뭘 하기 위해서 돈이 많이 필요하기보다는 돈이 꼭 필요한 상황에 돈이 없어서 부모님을 잘 챙기지 못할 것 같아서 두려운 것 같다.
그리고 부모님이 돈을 아끼느라 경험도 아끼는 삶을 사는 것도 싫다. 집이 가난한 것은 아니지만 풍족한 것도 아니다. 부모님은 내 기억에 평생 일하면서 살아오셨다. 쉬는 것을 제대로 본 적도 없다. 그러나 항상 일했지만 돈은 많지 않았다.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면 쓰지 않았고 그렇다 할 여행도 가본 적도 없다. 제대로 쉬는 것도 모르시는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항상 자식들을 위해서 희생하신 삶을 사신 것 같아서 이제는 내가 성인이 되었으니 그동안 하지 못했던 다양한 경험을 해드리고 싶었다. 뭘 먹고 싶을 때 돈이 아까워서 먹지 못하는 경우도, 어딜 가고 싶은데 돈이 아까워서 가지 못하는 경우도 없게 만들고 싶다. 세상이 돈이 다는 아니지만, 돈이 없으면 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아서 돈을 많이 벌어두고 싶다. 그러나 이 말이 돈이면 다 된다는 말은 아니다. 돈 버는 것에만 치우쳐서 지금 이 순간에 친절한 말 한마디로도 부모님을 긍정적으로 만들 기회를 버리지는 말자. 결국 돈은 ‘써야’ 의미가 있는 것임을 잊지 않도록 해야겠다.
쓸데없는 일 하기가 싫다. 이건 연차가 쌓일수록 더 심해지고 있는 것 같다. 이진선 님의 글 <실력은 연차에 비례하지 않는다>가 터닝포인트였던 것 같다. 나는 연차가 쌓이면서 과연 그에 비례하는 실력을 갖추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뭔가 아니다 싶었다. 여전히 모르는 것이 너무 많고 어떻게 해야 할지 답답한 것들이 많아서.
요즘에는 직원을 채용하기 위해서 포트폴리오도 많이 보고 있다. 그런데 정말 경력이 많다고 실력이 좋은 것은 아님을 깨달았다. 나도 아무 생각 없이 일하다가는 이렇게 물경력이 되지 않을까 걱정되기 시작했다. 나중에 이직하거나 프리랜서가 된다면 결국 지금까지 진행한 일로 실력을 평가받게 될 텐데, 막상 포트폴리오를 만들려고 준비하면 지금까지 작업했던 것이 너무 평이하고 부족해 보였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포트폴리오를 볼 때는 디테일한 부분까지 체크를 하면서 내 작업물의 완성도에 대해서는 신경을 못 썼다. 내가 과연 누구를 평가할 자격이 있을까에 대해 의문이 들었고 창피해졌다. 내로남불이었다.
일 뿐만이 아니라 삶을 전체적으로 놓고 보더라도 나만의 것을 남겨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 것 같다. 회사에 헌신했는데 결국 회사를 나와보니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경험을 많이 접하게 되어서 주기적으로 월급을 받는 회사 생활에 익숙해져 가는 것이 무서웠다. 태풍이 몰아치기 전에는 평온하다고 했던가. 지금의 안정감이 꼭 미래의 어려움이 닥치기 전의 고요인 것 같아서 이 안정감에 젖어있는 것이 걱정이었다.
부정적인 감정을 초래했을 수도 있는 다양한 사건들과 걱정들을 적어보았다. 더 있을 수도 있지만 일단 생각나는 것들은 이 정도다. 이것들의 원인은 무엇일까.
ⓐ 문제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하라.
ⓑ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라.
ⓒ 당장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건설적인 일을 하라.
사실 나는 걱정 속에서 사는 사람이다. 매일 아침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두려움을 느낀다. 엘리베이터가 추락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에. 길을 걸으면 자동차가 갑자기 나에게 돌진할 것 같고,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혹시 묻지마 살인을 당하지는 않을까 걱정하기도 한다. 지하철이 잠깐이라도 흔들리면 탈선하지는 않을까, 은행에 가면 갑자기 강도가 들며 어떡하지 상상하고, 비행기를 타면 추락할 것 같다. 공사하는 장소를 지나면 갑자기 건물이 무너져 내리지는 않을지, 그냥 일반적인 길을 걸어가다가도 간판이 떨어져서 나를 덮치지는 않을지.
말이 많지 않은 성격 때문일까, 왜인지 모르게 사람들은 내가 착할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난 속으로 욕도 하고 부정적인 생각도 많이 해서 그런 타인이 보는 내 모습과 현실의 나 사이의 괴리에 또 불편해진다. 그렇다고 나쁘게 봐주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나도 나를 잘 모르겠다. 여하튼 그래서 깊이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무섭다. 사람을 만날 때 별로인 내 모습이 들통날 것 같아서 무섭다는 걱정이 기본적으로 깔려있는 것 같다.
남들의 시선도 많이 신경 쓴다. 착한아이 증후군이라고 해야 할까. 누군가가 나에게 어떤 기대를 하면 그것을 충족시켜야 할 것 같았다. 실망하게 하면 안 될 것 같고. 왜 이렇게 자랐는지 나도 이해할 수가 없다. 부모님이 엄격하신 분들도 아니었는데. 오히려 방임주의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일탈을 해 본 적은 없다. 오히려 모범생이었다. 공부를 열심히 하지는 않았지만, 규칙은 정말 잘 지켰다. 지각도 잘 하지 않고 머리나 옷 규정도 항상 지키는 학생이었다. 대학생 때는 출석하지 않는다고 아무도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었는데 그냥 혼자 지켰다. 시간을 지키지 않으면 심장이 떨리고 불안했다. 통학도 편도 2시간이었는데 4년 동안 지각을 해 본 적이 없다. (수업 하나를 딱 한 번 빠진 적은 있다.)
리라 손 박사님의 <임포스터>를 읽을 때 이런 내 모습을 잘 설명하는 구절을 발견해서 반가웠다.
임포스터가 느끼는 핵심 정서는 불안이다. 성공을 거둔 임포스터는 겉으로는 행복해 보일지 몰라도 마음속에서는 불안 증상들에 끊임없이 시달린다. 아임즈 척도 가운데 임포스터의 속마음을 정확하게 반영하는 문항이 '나에게 중요한 사람들이 내가 그들이 기대하는 만큼 실력이 좋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될까 봐 두렵다'이다. 이 문항에 동조하는 사람일수록 임포스터이즘을 강렬하게 경험한다. 임포스터는 자신의 무능이 들통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성공해도 온전한 기쁨을 느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임포스터는 자기 능력에 대해 칭찬을 받으면 행복해할까? 안타깝게도 능력과 기량에 대한 칭찬은 임포스터이즘을 한층 더 강화시킨다. 타인이 나의 성공을 '내 능력'이라고 오해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본모습을 들키지 않기 위해 더욱더 두꺼운 가면을 쓰게 되고, 실수 없이 더 완벽하게 행동하려고 한다.
항상 잘해야 한다는 강박도 있고 기대치도 높아서 누군가가 잘했다고 했을 때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오히려 여기서 안주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못 한 것에 더 집중하며 스스로 피곤하게 만든다. 장점보다는 단점을 더 크게 받아들이는 성격이었다.
그래도 나만 그런 것은 아니라는 살짝의 위안
태생적으로 걱정이 많은 사람인 것 같다. MBTI를 잘 믿는 것은 아니지만 예전에 추천 음악 모음을 들으려고 검색한 적이 있는데 특정 MBTI의 플레이리스트가 눈에 들어왔다. MBTI 검사를 할 때마다 조금씩 다르게 나오기 때문에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때 당시에 내 MBTI의 플레이리스트였던 것 같다. INFJ였나 ISFJ였나 여하튼. 아무래도 하나의 공통점으로 들어온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댓글에는 서로의 성향을 이야기하는 내용이 많았다. 흥미로워서 댓글을 쭉 읽고 있었는데 하나 같이 이야기하는 것이 있었다. ‘자기 검열이 심한 성격’.
그때 본 댓글들이 이것인지는 정확하진 않지만 비슷한 것 같다. 가장 인기 있는 댓글은 자기의 특성을 적은 내용이었다.
맨날 자기 직전에 자책 꼭 1번씩
말하거나 지금처럼 댓글 달기 전에 생각 수천만 번
표정 무섭다고 듣다가 막상 친해지면 정반대라는 소리 들음
새벽에 혼자 감성 돋아서 노래 듣다가 소리 없이 펑펑 오열
하나에 빠지면 미친 듯이 빠져듦
뭐든지 완벽해지려고 해서 나는 생각 안 함
내 기분보다 타인 기분이 백만 배 더 중요
상처받아도 안 그런 척하지만, 속으로는 쥐어뜯고 있음
괜히 울적할 때면 우울할 때 듣는 플리 찾아서 돌아다님
지금도 댓글을 슬쩍 보면서 위로받고 있다. 가장 눈에 들어온 것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 주위를 둘러보면 나만 예민한 것 같아서 우울했는데, 막상 비슷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에 안심을 했다. 그냥 내가, 나만 이상한 것이 아니라고.
도대체 왜 아빠가 방문을 계속 두드린 것에 짜증이 났을까 생각해보았다. 밥을 먹으라는 말이 짜증 난 것은 아니다. 정말 그랬다면 인간쓰레기가 아닐까. 누가 밥을 챙겨주는데 짜증이 날까. 그건 아니었고 문을 너무 쾅쾅 치는 소리가 거슬렸던 것 같다. 예전부터 긴가민가하고 있었지만 난 소리에 매우 민감한 사람인 것 같다고 조금 확신이 든다. 검색도 해봤다. 사소한 소리에 신경과민을 겪는 ‘미소포니아’라는 청각과민증이 있다고 한다.
미소포니아는 청각과민증(hyperacusis) 계열의 질환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청각과민증과는 다르다. 삼성서울병원 이비인후과 조영상 교수는 “청각과민증은 모든 소리가 역치보다 크게 들려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는 것”이라며 “미소포니아는 소리 강도와 상관없이 특정 주파수나 상황 속 소리에 혐오감이 생기는 것이다”고 말했다. 미소포니아가 있는 경우 특히 특정 소리가 지속해서 날 때 큰 고통을 호소하는데, 심하면 식은땀이 나거나 심장이 두근거리는 등의 증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미소포니아를 앓는 사람들은 민감해지는 특정 소리를 들으면 견딜 수 없어 대응해 싸우거나, 피하는 등의 반응을 보이게 된다.
뭔가 속이 시원한 설명이었다. 그러고 보면 시계 초침 소리가 너무 신경 쓰여서 잠을 못 자기도 하고, 어느 날은 누워서 자려고 하는데 화장실에서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가 거슬려서 바로 가서 끈 적도 있다. 쿵쿵거리며 걷는 소리, 냉장고 문을 쾅 닫는 소리 등 신경 쓰이는 소음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밥 먹을 때 쩝쩝거린다거나 후루룩거리는 소리도 너무 듣기 싫었다. 그래서 가족과 밥을 먹을 때면 분명 화목한 가족이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했는데, 음식을 먹는 소리가 거슬려서 기분이 좋지 않은 적이 많다. 나도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그냥 그런 감정이 불쑥 생겨난다.
회사에서도 자주 그랬다. 음식을 소리 내서 먹을 때, 타자 소리가 너무 클 때, 습관인지는 모르겠지만 계속 책상을 두드리는 것, 뭔가 알 수 없는 습관에서 나오는 소리 등 신경 쓰이는 것이 많았던 것 같다. 언제 한 번은 타자 두드리는 소리에(대부분 조용하지만 드물게 심한 사람이 있다)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도저히 참지 못하고 그냥 자리를 박차고 나간 적도 있다. (마음으로는 박차고 나갔지만 실제로는 그냥 조용히 일어나서 나갔다) 회사를 한 바퀴 돌면서 답답한 마음을 다스리려고 했다. 그러나 남들은 아무렇지도 않고 다 잘 참고 사는 것 같은데 참을성이 없는 내 모습이 또 답답해져서 운 적도 있었다. 이런 사소한 것에 기분 나빠하는 스스로가 짜증이 났다. 총체적 난국이었다.
그래도 이게 오로지 내 잘못이라기 보다는 저런 병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조금은 위안이 된다. 내가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니까. 물론 그렇다고 아무 노력도 안 할 것은 아니지만.
일단 첫 번째 방법은 처음에 적었듯이 이 글의 목적이었던 <자기관리론>에 나왔던 3가지 프로세스를 따르는 것이다. 지금이 3번째 과정이다.
ⓐ 문제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하라.
ⓑ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라.
ⓒ 당장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건설적인 일을 하라.
사실 내가 걱정이 많은 성격이라는 것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고 이런저런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기도 했다. 따라서 지금까지 실행해본 것 중 효과가 있었던 것들을 적어보려고 한다.
엘지 매코믹Elsie MacCormic은 「리더스 다이제스트」 기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피할 수 없는 일과 싸우기를 멈춘다면 우리는 그 에너지를 좀 더 풍부한 삶을 사는 데 쓸 수 있습니다.”
<자기관리론>에서는 걱정하는 문제에 대하여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보고, 어쩔 수 없다면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사실 당연한 말이다. 해결할 수 없는 일을 계속 생각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걱정은 또 다른 걱정을 낳는다. 해야 할 일에 집중이 되지 않아서 이런 상황을 초래한 지금 당장의 걱정과 불안에 대해 적어보고 있었는데 계속 적다 보니 지금까지의 모든 걱정이 계속 쏟아진 것처럼.
중력문제
이진선 님의 <사수가 없어도 괜찮습니다>에는 ‘중력 문제’라는 것이 나온다. 자전거를 타고 내리막길을 내려가는 것은 쉽다. 그러나 오르막길을 오르는 것은 어렵다. 페달을 돌리는 다리는 무겁고 몸은 지치고 숨이 차다. 이런 상황에서 몸을 짓누르는 중력을 탓한다고 갑자기 몸이 가벼워지지는 않는다. 세상의 법칙인 중력을 탓하지 말고 자전거에서 내려서 주위 풍경을 보면서 걸어가거나 그냥 당연히 힘든 것임을 인정하고 묵묵히 올라가는 수밖에 없다. 이처럼 지금 하는 걱정이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중력 문제인지는 아닌지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돈 잃고 친구 잃고
1년 전에 친구에게 적지 않은 돈을 빌려준 적이 있었다. 사실 친한 관계에서 돈이 얽히면 피곤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오죽했으면 집안 사정을 이야기하면서 말을 했을까 싶어서 빌려주었다. 친구는 정말 고맙다고 했고 당장은 힘들겠지만, 조금씩이라도 갚아 나가겠다고 했다. 나도 힘들면 무리하지 말고 여유가 생기면 갚아도 된다며 훈훈하게 마무리했다. 그래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어서 보람을 느끼기도 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별생각 없이 연락했을 관계였는데 그 사이에 돈이 끼어들자 편하게 연락할 수가 없게 되었다. 왠지 내가 먼저 연락하면 돈을 갚으라고 닦달하는 것 같은 부담감을 줄 것 같기도 해서 선뜻 먼저 연락하지 못했다. 그래도 친구가 사정이 있으면 먼저 이야기를 해줄 줄 알았다.
그런 일이 있는 후로 1년 가까이 그 친구와 연락하지 않았다. 부담감을 주는 것이 껄끄러워서 나도 먼저 연락하지 않았고 그 친구에게서도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최근에 그 친구를 포함하며 고등학교 친구들과 함께 모이는 자리가 있었다. 몇 달 전에 모두 가능한 날짜로 잡았기에 그때는 볼 수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약속 일주일 전에 그 친구는 모든 메시지에 답장이 없었다. 몇 개월이 지난 지금도 숫자 1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확실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왠지 나를 피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만났던 친구 중 한 명이 그 친구와는 한 달 전에 따로 만난 적이 있다고 했다. 나를 피하는 것이 맞는 것 같았다.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나는 그 친구가 정말 힘든 것 같아서 도와주었는데 오히려 도움을 준 나만 피하는 것이 실망스러웠다. 돈이 문제는 아니었다. 지금 당장 그 돈이 없다고 해서 내가 못 살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다만 오히려 좋은 일을 하고 오래된 관계가 망가진 것이 이해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그 친구는 왜 그랬을까 계속 생각을 해봤는데 내가 당사자가 아닌 이상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계속 생각한다고 해결되는 것은 없었다. 고민만 한다고 친구에게서 연락이 오지도 않을 것이고, 빌려준 돈이 갑자기 걸어 들어오지도 않을 것이다. 최악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빌려준 돈을 받지 못하는 것이고 친구를 한 명 잃는 것이다. 그래서 그냥 없는 돈이라고 생각하고 그 친구와의 인연도 이 정도뿐이었다고 여기기로 했다. 자기합리화일 수 있지만(자기합리화 맞다) 그렇게 해서라도 내 마음이 편해지고 더 이상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일에 시간을 쓰지 않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뭐 돈이야 앞으로 벌면 되는 것이고, 인간관계야 한 사람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니까 어쩔 수 없으니. 그리고 생각해보면 그 친구도 돈을 갚지 못하는 상황이 미안해서 연락하지 못하는 걸 수도 있겠다 싶었다. 지금까지 봐온 친구의 성격상 다른 사람에게 돈을 빌리고 마음 편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계속 신경 쓰고 마음이 불편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지옥일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좋은 점은 하나 있는 것 같다. 이렇게 특정 주제에 대해 적을 경험적인 사례가 생긴 것.
여하튼 그냥 잊고 편해지기로 했다.
“기꺼이 받아들이라. 기꺼이 받아들이라. 이미 일어난 일을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모든 불행을 극복하는 첫 단계이기 때문이다.”
심리적으로 볼 때 최악을 받아들이면 새로운 에너지가 솟구친다. 최악을 받아들이면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 그러면 얻을 수 있는 것만 남는다. 윌리스 캐리어의 말을 더 들어보자. “최악의 상황을 직면하니 당장 마음이 편해지고, 며칠 동안 느끼지 못했던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생각’이란 걸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이 분노의 소용돌이 속에서 스스로 삶을 망가뜨린다. 이들은 최악의 상황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최악을 상정한 다음 이를 개선하려 들지 않으며, 난파선의 잔해에서 인양할 수 있는 것들을 건져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자신의 삶을 회복해보려고 애쓰는 대신, 억울함에 가득 차서 ‘최악의 경험과 격렬한 싸움’에 몰두한다. 결국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은 채 생각이 고착된 우울증의 희생자가 된다.
데일 카네기, <자기관리론> 중
이건 그냥 ‘해결할 수 없는 일’을 생각하니 떠오른 경험이었고, 지금 나를 힘들게 하는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자. 잘해야 한다는 강박과 지나친 이상, 걱정이 많은 성향, 소리에 민감한 것 등. 어떻게 보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보이기도 한다. 사람의 성격과 기질에 대해서는 바꿀 수 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없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내 생각은 그 중간에 있다. 당연히 사람들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남들과 다른 기질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쉽게 바꿀 수 없는 것도 인정은 하는데, 노력하면 어느 정도의 범위 내에서는 바꿀 수 있다고 본다. 설사 세상의 진리가 ‘성향은 바뀌지 않는다’라고 하더라도 나는 조금은 바꿀 수 있다고 믿으면서 살아갈 생각이다. 내가 낫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꾸준히 행동도 하면서.
나는 태생적으로 부정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소한 것에서 감사하는 습관을 들이려고 했다(사실 이렇게 스스로를 틀에 가두는 말을 적는 것이 조심스럽긴 하다. 점점 나아지고 있어서). <타이탄의 도구들>을 보다가 감사 일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매일 아침과 저녁에 감사할 점을 3가지씩 적는 방법이었다. 여기에는 규칙이 있었다. 첫 번째는 각 항목에 최소 3개 이상을 적어야 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중복으로 적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아침에 적을 감사 일기
내가 감사하게 여기는 것들
오늘을 기분 좋게 만드는 것
오늘의 다짐
밤에 적을 감사 일기
오늘 있었던 굉장한 일
오늘을 어떻게 더 좋은 날로 만들었나?
굉장히 유명한 방법이기 때문에 검색만 해도 꾸준하게 감사 일기를 쓰는 좋은 레퍼런스를 찾을 수 있다. 나는 대략 21년 말에 시작한 것 같다. 처음에는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하루에 감사할 것이 도대체 무엇이 있는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일단 쓰기로 마음은 먹었으니 쓰긴 해야 했는데 도무지 생각나지 않아서 다른 사람들이 적은 것을 보고 ‘이거 괜찮네’하는 것들을 그냥 옮겨 적은 적도 있다. 그러다가 사람들이 꽤 사소한 것이 감사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내 신체의 일부들에 감사하기 시작했다. 혀가 있어서 맛을 느낄 수 있음에 감사하다, 눈이 있어서 앞을 볼 수 있음에 감사하다, 손가락이 있어서 이렇게 타자를 칠 수 있음에 감사하다 등. 사실 진짜 감사함을 느껴서 적은 것은 아니고 그냥 적기 위해서 적었던 것이었다.
작은 변화
그런데 어느 순간에는 정말 사소한 것들도 감사하고 기분을 좋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변화는 급격히 오지 않았고 알듯 말듯 사소하게 왔다. 엄마가 고구마를 깎아서 가져다준 것도 감사 일기에 적었고, 다른 사람의 콘텐츠를 보고 영감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감사 일기에 적었다. 그러다가 내가 너무 행복의 기준을 높게 정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해보게 되었다. 사람은 늘 행복할 수가 없는 것은 당연했다. ‘희로애락’이라는 단어가 있는 것도 인간의 삶에는 수많은 감정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항상 행복하지 않으면 그것은 불행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또한 엄청나게 대단한 일을 해야만 성공한 것이고 행복한 것이라고 여겼다. 전혀 이룰 수 없는 것을 행복이라 생각하고 추구했으니 달성할 수는 없는 것이 당연했다.
여전히 조금은 이기적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제 주변 사람들과 환경에 감사하는 마음을 살짝 장착했다. 지금까지는 개인적인 삶과 앞으로 달리는 것에만 관심을 둬서 주변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부모님도 열심히 일하고 계셨고 항상 자식들을 생각해주시는 분들이었다. 회사에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친절해서 서로서로 잘 챙기는 사람들이었다. 주변을 객관적으로 돌아보니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인 것 같았다. 뉴스에서는 직장 내 괴롭힘이라던가 크나큰 사건·사고가 많았지만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크게 나쁜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그동안은 내 마음이 편협해서 그것들을 인지 못 하고 스스로 고립해서 살고 있었던 것 같다.
부모님과 오래 잘 살고 싶었지만 정작 일만 하느라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을 아끼고 있었다. 실력을 빨리 쌓아서 돈을 많이 벌면 부모님을 행복하게 해드릴 수 있을 거로 생각하면서. 주객전도가 된 것 같았다. 언제 올지도 모르는 날을 위해서 지금 이 순간에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먹고 살기 위해서는 일해서 돈을 벌어야 하지만 가족들에게 긍정적인 말 한마디를 하거나 밥도 같이 먹고 잠깐 산책하러 갈 정도의 여유는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로 했다. 가족뿐만이 아니라 다른 인간관계도 그랬다. 나는 사람을 불편해하는 사람이라는 틀에 나를 가두면서 일부러 피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먼저 말을 걸어주고 챙겨주는 사람들은 고마운 존재였다. 이렇게 살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 누군가 뭘 하자고 할 때는 더 이상 피하지 않고 좋은 경험이라 생각하고 같이 어울리기도 하고 때로는 용기도 살짝 내서 먼저 제안하기도 하는 등 관계를 구축하려고 조금 노력을 하고 있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는 것과 비슷하다. 너무 자기혐오가 심해져서 답답할 때는 그냥 스스로 최악의 인간이라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너무 이상적인 자기의 모습을 추구하기 때문에 별로인 현실의 나와 그 괴리로 괴로워지는 것일 수 있다. 이상과 현실에 괴리가 있다면 그냥 이상을 낮춰버리면 된다. 보통 실망이라는 감정은 기대보다 결과가 좋지 않을 때 나온다. 그렇다면 기대를 낮추면 실망한 일도 적지 않을까. 실제로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오더라도 이미 좋지 않을 거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 결과를 합리화할 수 있으니까.
나도 종종 내가 성격파탄자에 인쓰*같다고 생각하곤 하는데 그럴 때는 그냥 내가 애초에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난 성격이 안 좋으니까 앞으로 좋게 바꿀 일밖에 없다고. 나는 그리 능력이 있는 사람도 아니니 거창한 것을 만들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고. 그러면 적어도 지금 내 수준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자고.
*인간쓰레기 (뭔가 이렇게 적으면 나에게 미안해서 귀엽게 ‘인쓰’로 줄였다.)
주변에는 대단한 사람들이 많다. 능력이 있는 사람도 있고. 하지만 다른 사람은 그 사람이 성공하기까지의 노력을 볼 수가 없고 결과만 보기 때문에 그 사람이 얼마나 힘들게 그런 환경을 만들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게 긍정적인 성격이든 뛰어난 실력이든) 누군가가 열심히 높은 계단에 오른 것을 보고 나의 계단과 비교하면서 한 번에 그곳까지 도달하려고 했었고, 그게 불가능하기 때문에 힘든 것 같다. 내 수준은 아직 밑바닥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냥 지금 할 수 있는 수준에서 한 계단씩 오르기로 하자. 비교는 먼저 달려간 사람이 아니라 어제의 나와 하는 것이다. 어제와 같은 계단에 머물러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정말 문제고 한 계단이라도 올라왔다면 잘했다고 생각하자. 적어도 어제의 나 보다는 나아졌으니까. 설사 그게 쓰레기에서 덜 쓰레기가 된 것이라 하더라도. 언젠가는 재활용이 될 수준까지는 되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시간과 퀄리티
앞서 고민했던 ‘실행력 부족’ 문제를 보면 1주에 1회 포스팅이라는 목표도 있었고, 글의 내용은 6가지의 요건을 충족해야 했다. 즉 시간과 퀄리티 사이의 싸움이었다. 당연히 좋은 퀄리티를 위해서는 시간을 더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반대로 시간에 맞추면 퀄리티가 낮아질 수밖에 없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논리이지만 나는 짧은 시간에 고퀄리티의 콘텐츠를 만들겠다는 무리한 목표를 세웠고, 당연히 실행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실패하고 낙담했다.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시간을 포기하거나 퀄리티를 포기 하거나. 조금 마음 편하게 시작할 수 있는 것은 퀄리티와 어느 정도 타협을 보는 방법인 것 같다. 너무 완벽하게 하려는 강박에 시작도 못 하는 경우를 수도 없이 경험했기 때문에.
3D를 공부하고 있어서 그런지 요새는 어떤 패턴을 점, 선, 면에 빗대어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점이 계속 이어지면 선이 되고 선이 계속 이어지면 면이 된다. 또 면이 많아질수록 구에 가까워진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런 점과 선, 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은 세상에서 나를 만들어가는 과정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떤 공간에 나만의 입체를 만들어가는 것. 나는 점이다. 경험도, 사고도. 열심히 노력해서 선을 잇고 면을 만들어서 자기만의 도형을 만들고 있는 사람들과 비교하니 당연히 부족함이 느껴지지 않을까. 지금 할 일은 점에서 갑자기 멋진 구가 되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적어도 직선이라도 만들려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모든 것은 단계가 있는 법이니.
보도 섀퍼의 <돈>에는 에디슨의 이야기가 나온다. 단번에 도형이 될 수 없다고 아무 것도 안 하는 것보다 실패라는 점이라도 찍으면서 나만의 선과 면 그리고 삶이라는 입체적인 도형을 점진적으로 만들어가면 좋을 것 같다.
우리는 실수에 대한 두려움 없이 행동해야 한다. 우리는 실수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자 할 것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전구를 발명한 토머스 에디슨이 9,000번 정도 실패를 거듭하고 있었다. "나는 실수는 하고 있는 게 아니라 전구를 발명할 수 없는 새로운 방법을 계속 배우고 있는 거라네. 매번 실수는 나를 점점 더 발명에 가까워지게 하고 있다네."
조지 버나드 쇼의 말을 기억하는가? “비참해지는 비결은 자신이 행복한지 아닌지에 대해 고민할 여유를 갖는 것이다.” 늘 움직이라! 바쁘게 살라!
쓸데없이 걱정할 시간 자체를 없애는 것도 방법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과거를 돌아보면 참 시간을 많이 낭비했다. 의미 없이 유튜브를 본다거나 아무 생각 없이 누워있다거나. 물론 누워서 쉬면 안 된다는 말은 아니다. 누구나 휴식의 시간은 필요하니까.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누워서 무능한 나를 탓하여 우울하게 시간을 버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음을 먹고 이렇게 시간 낭비하지 않기 위해서 루틴을 만들려는 시도를 계속해왔다. 23년에는 노션으로 기록하고 있다. 진행할 프로젝트와 해야 할 일을 주기별로 정리를 해서 자기 전, 또는 아침에 오늘 요일을 필터해서 차례대로 진행하고 있다. (못하는 항목도 많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피곤하게 산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경험한 결과, 나는 바쁘게 살아야 조금의 보람이라도 느끼는 체질인 것 같다. 작년에도 루틴을 약 5개월 정도 진행하다가 너무 피곤해서 하루만 쉬기로 했던 적이 있었다. 첫 시작이 어렵지 두 번째는 쉽다는 말은 포기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회사 일이 바쁘니 좀 쉬어도 된다, 지금까지 오래 루틴을 해왔으니 좀 편하게 쉬어도 되지 않을까라고 합리화를 하면서 반년을 쉬었다. 그때는 게임도 하고 웹툰과 웹 소설을 보면서 보냈던 것 같다.
그래서 편안해졌냐고 하면 오히려 반대였다. 시간이 지나고 나니 또 삶을 낭비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의미 있게 살자고 목표를 세웠으면서도 실행하지 않는 내 모습에 실망하고 자책했다. 또 난 왜 이럴까의 불안의 굴레에 빠져들었다. 지금은 다행히 새해 목표를 다시 세우고 진행하면서 나아졌지만. 누군가에게는 맞지 않는 방법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는 것이 몸은 편할 수 있지만 마음과 정신이 불편해진다는 것을 느꼈다. 반대로 루틴을 하는 것은 몸은 피곤할 수 있지만 정신적으로는 보람이 있었다. 실제로 루틴을 지속하면서 우울증에서 벗어나기도 했었고.
사실 지금도 우울하고 걱정도 많아서 이 글을 쓰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다행인 것은 예전보다 불안의 주기가 짧거나 깊이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이것들은 단 한 순간에 바뀌지 않았다. 위에 있는 모든 것들을 천천히 지속해오면서 바뀔 수 있었던 것 같다. <자기관리론>에는 불안을 벗어던진 사람들의 생생한 이야기가 나온다. 꽤 자주 등장하는 것이 ‘나는 이제는 불안을 느끼지 않는다’였다. 그런데 나는 아무리 걱정이 좋지 않다고 이해해도 감정 조절이 완벽하게 되지 않는다. 그래서 쓸데없는 걱정을 하지 말라고 다짐하고 루틴을 지속해도 이렇게 종종 불안이 찾아오는 것 같다. 그래도 그 기간과 깊이가 점점 짧아지고 있다는 것에 다행스러움을 느낀다.
삶은 끝없는 변화의 연속이다. 유일하게 확실한 것은 오늘뿐이다. 누구도 예측할 수 없고, 매번 달라지며,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미래의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애쓰느라 오늘을 살아가는 아름다움을 훼손해서야 되겠는가?
<자기관리론> 중
세상에 불안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내가 모든 사람이 되어보지는 않았지만, 왠지 그럴 것 같다. 불안을 느끼는 것도 어떻게 보면 중력 문제라고 생각한다. 예전에 삶의 의미가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어서 괴로웠던 적이 있다. 이 때 삶에는 원래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편해졌다. 없는 것을 찾을 수는 없으니까 더 이상 찾지 말고 만들자고 다짐했었다. 그렇다면 내가 이미 느끼고 있는 것을 마땅히 없애야 한다고 스트레스를 받느니, 이 감정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면 그것도 편해지지 않을까 싶었다.
삶은 불안의 연속이라는 말은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이렇게 흔하게 알고 있는 문장이 되었다는 것은 어쩌면 그게 삶의 진리일 수 있다. 말이 안 되는 것이 사람들 사이에서 전해 내려오지는 않을 테니까. 그리고 대부분의 불안은 시간이 해결해준다고 한다. 책에서 소개하는 것도 불안을 느끼면 일단 객관적으로 다 적어보고 나중에 다시 보라고 했다. 그리고 대부분 나중에 다시 보면 내가 이런 불안을 느꼈다는 것도 이해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렇듯 불안은 잠깐 왔다 사라질 수 있는 것인데, 그 상황의 그 감정에 너무 깊이 빠져 있다 보니 합리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게 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지금 이 불안이 조만간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을 거라고 의식적으로 생각해보자.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을 적고 일주일 뒤, 이주 뒤, 한 달, … 계속 살펴보자.
물론 그중에서도 해결되지 않는 불안도 있을 것이다. 이제 그것은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 설사 개인의 노력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라면 애써 떠올리지 않으려는 노력이라도 기울여야 한다. 감사 일기를 쓰거나 바쁘게 살거나 등.
매일 회고
매일 회고를 하는 것도 방법이다. 거창할 것은 없고 1번에서 적은 감사 일기를 매일 저녁에 써보고 내 감정을 체크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현재 노션에서 회고 루틴만 따로 필터를 해서 한 눈에 만족도를 볼 수 있게 정리를 해두었다. 최근에는 기분 컬럼도 추가하여 좋고, 나쁨도 체크하고 있다.
서비스를 설계하는 UXUI의 방법론 중에 저니맵(Jouney map)이라는 것이 있다. 고객 여정 지도라고도 불리는 저니맵은 고객이 서비스를 이용하는 과정에서 겪는 경험을 순차적으로 체크하여 서비스가 제공하려는 가치를 방해하는 부정적인 경험을 찾아서 개선하는 방법론이다.
'서비스'는 '삶의 목표', '고객'이 '나'라고 한다면 내 삶을 저니맵으로 만들어서 개선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기분을 체크하여 오늘은 왜 기분이 나빴고 좋았는지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개선할 수 있다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이게 회고 테이블에 기분 컬럼을 추가한 이유였다. 노션 테이블에서 기분 컬럼을 90도로 회전하면 나의 감정 사이클을 바로 파악할 수 있다. 굳이 따로 시간을 내서 과거의 기억을 억지로 떠올리지 않고 그날그날 바로 기록하는 것이 나중에 가시적으로 쉽게 살펴볼 수 있기 때문에 더 객관적으로 감정을 제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직 컬럼을 추가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효과가 있는지는 구체적으로 이야기는 할 수 없다. 조금 진행해보고 추후 효과를 측정해봐야겠다.
마지막으로 성공학의 대가 오그 만디노의 말을 가슴에 새기고 감정제어가 필요할 때마다 꺼내보자.
내 마음은 마치 쳇바퀴처럼 끊임없이
즐거웠다가 슬펐다, 슬펐다가 기뻤다, 기뻤다가 우울했다를
반복하고 있다.
오늘 나는 이런 내 감정을 다스리는 법을 배울 것이다.
천만 번도 더 넘게 변하는 내 감정을
나는 더 이상 그냥 내버려두지 않을 생각이다.
나는 안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감정을 다스려야
비로소 나의 운명을 손에 쥘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약자는 기분이 행동을 지배하지만,
강자는 행동이 기분을 지배한다’라는
이 천고의 비법을 배울 것이다.
나는 나의 주인이 되겠다.
그래서 위대한 사람이 될 것이다.
끈기 있게 하던 일을 계속해나가자.
그러면 많은 것을 얻을 것이다.
- 쑤린, <어떻게 인생을 살 것인가>
불안과 걱정이 나쁘기만 할까? 사실 활용하기 나름인 것 같다. 나는 불안은 크게 두 가지 종류로 나뉜다고 본다.
자기파괴적인 걱정
건설적인 걱정
자기 파괴적인 걱정은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 계속 생각하거나, 아직 발생하지 않은 또는 발생하지 않을 일을 계속 생각하느라 지금 중요한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본다. 건설적인 걱정은 과거의 실수를 생각하면서 앞으로 똑같은 실수를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는 것이고, 미래에 닥칠 것이라고 상상되는 위험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 지금 이 순간 노력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 파괴적인 걱정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며, 건설적인 걱정은 시간을 활용하는 것이다.
불안과 걱정, 두려움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는 부정적인 느낌이 강하다. 누군가 이것들을 느끼고 싶냐고 한다면 당연히 아니라는 대답이 나올 것이다. 하지만 정말 살아가면서 불안, 걱정, 두려움이 없으면 좋기만 할까? 사람은 두려움이 있기때문에 목숨을 보전하기 위하여 스스로를 보호한다. 위험하니까 불에 손을 대지 않고, 차가 달리는 도로에 뛰어다니지 않는다. (물론 겁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도 있다) 만약 겁이 없었다면 분명 지금쯤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걱정은 보이지 않는 위험에 대비하여 자신을 더 단단하게 만들어줄 수 있다.
어차피 느껴야 할 불안이라면 나에게 좋은 쪽으로 활용하자. 그 감정에 좀먹히지 말고 내 인생을 더 나은 쪽으로 만드는 곳으로 시간을 사용해보자. 나는 지금 불안에 관한 글을 적고 있고, 이것은 내가 주 1회 포스팅하자고 목표를 세운 프로젝트의 주제가 되었다. 부정적인 감정이지만 그것을 콘텐츠로 만듦으로써 나의 도구로 사용한 것이다. 이슬아 님의 <부지런한 사랑>에는 ‘후회와 아쉬움은 글쓰기의 중요한 씨앗들 중 하나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후회와 아쉬움을 불안으로 바꿔도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꼭 좋고 행복한 경험만이 글이 될 수 있지는 않다. 즐거움, 괴로움, 행복, 불행, 기쁨, 슬픔 그 모든 감정이 내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사실 부정적인 감정으로 글을 쓰고 싶지 않았다. 부정적인 감정이 다른 사람들에게 나쁜 영향을 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래서 현실에서는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주변에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 상대가 내 삶을 해결해 줄 수도 없기도 하고 부정적인 이야기를 듣는 상대도 필연적으로 감정을 전이 받을 수밖에 없으므로. 하지만 이번에는 뭔가 산출물을 내지 않으면 더 우울해질 것 같아서 그래도 이 글을 읽게 되는 사람들이 너무 부정에만 영향을 받지 않고 조그마한 정보라고 얻어갈 수 있도록 여기저기서 영감을 받은 구절들을 추가하려고 노력했다.
쓸데없는 불안과 걱정에 시간을 쓰지 말자고 이해하고 그렇게 다짐해도 불쑥 이런 감정이 찾아오는 것은 잘 막을 수 없는 것 같다. 그냥 불안이 또 왔구나, 이번에는 잠깐만 머물렀다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뿐이다. 막을 수 없으면 관리라도 해서 빨리 보내는 것이 최선인 듯하다. 다행인 것은 여러가지의 노력을 통해서 예전보다 불안을 대하는 태도가 나아졌다. 지금은 울고 있지는 않다는 것도 다르다. 몇 년 전에는 정말 매일 집에서 울면서 글을 쓴 적이 있다. (그 때도 일기를 썼다) 아마 우울증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우울증이었을 것 같기도 하다. 병원을 가보지는 않았으니. 지금 생각하면 그 떄는 뭐가 그렇게 불안하고 막막했는지 모르겠다.
그때 불안장애로 퇴사한 포도 님의 영상에서 많은 위로를 받았다. 그분이 불안에서 벗어난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었고 그저 자기가 힘든 것을 담담히 이야기한 영상이었다. 나는 불안하지 않고 행복해지고 싶었지만 정작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에게서 나아져야겠다는 동기부여를 받은 것이 아니라(성격이 안 좋아서 오히려 이런 것들을 안 봤다. 부정적인 내 모습이 더 최악으로 느껴지는 것 같아서) 나처럼 우울증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서 위안받았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있구나- 하는 위안이었을 수도 있다. 그분도 불안을 건설적인 방법으로 해결한 케이스인 것 같다. 그저 혼자 그 감정을 느끼면서 시간을 보낸 것이 아니라 영상을 만들고 사람들에게 공유했으니까. 만약 그분이 그저 혼자만의 감정이라 치부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나는 위안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부정적인 감정의 글은 쓰고 싶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약간의 기대를 하면서 그냥 적어보기로 했다. 어차피 나는 솔직한 나를 드러내기 위해서 글을 쓰기로 한 것이기 때문에. 임포스터 벗어버리기. 나는 걱정도 많고 불안도 잘 느끼고, 예민하고, 감정적인 태도도 자주 보이는 미성숙한 존재가 맞다. 갑자기 모든 것에 초월한 엄청난 성인군자가 될 수는 없는 것이 확실하니까(사실 예전에는 감정이 없는 부처가 되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그냥 목표는 예전보다 불안의 깊이와 주기를 짧게 하는 것으로 잡아야겠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위와 같은 노력을 덕분에 예전보다 불안의 폭과 깊이를 줄여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어차피 매일 글을 쓰기로 해서 불안도 내 콘텐츠로 삼아야겠다는 다짐도 했다.
쓰다 보면 낫는다는 말이 있는데 사실인 것 같다. 생각을 정리해보니 지금은 부정적인 감정이 많이 해소되었고 오히려 기분이 괜찮은 상태다. 김영하 님이 자기 해방의 글쓰기라는 주제로 강의를 한 적이 있었다. 작가님은 글을 쓰는 것이 자신이 감정 위에 올라서서 객관적으로 상황을 바라볼 수 있게 만들기 때문에 글쓰기는 자기 해방의 과정이라고 이야기했다.
글은 제 아무리 복잡한 감정과 심경이라도 언어에는 논리가 있기 때문에 말이 되게 써야 한다. 이런 논리적인 과정이 우리를 강하게 만든다. 우리 마음 속에 숨어있던 트라우마나 어두운 감정들은 숨어 있기 때문이 두려운 것이다. 이것을 언어화해서 쓰는 동안 우리가 그 감정 위에 올라서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그게 무엇이든 간에 일단 첫 문장을 적어보라. 어쩌면 그게 모든 것을 바꿔놓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