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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점점 Apr 15. 2022

디자이너가 되기로 한 이유

쉽게 대체되지 않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첫 사회 생활의 시작


2015년 9월. 24살에 다니던 대학의 교학팀에 취업했다. 대학교 4학년 2학기 때 도서관에서 근로를 하게 되었는데, 모범 시민이었던 나는 아주 부지런히 일했고 학기가 끝나갈 무렵 도서관 관장님이 학교에서 일을 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하셨다. 2년 계약직이었다. 졸업이 다가왔지만 전공을 살릴지 살리지 않으면 앞으로 어떤 일을 하며 살아야 할지 매우 막막한 상태였다. 어차피 하고 싶은 것이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에 돈이라도 벌면서 미래를 계획하면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제안을 수락했고 졸업을 하자마자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내 전공은 광고 홍보였다. 동아리도 광고 홍보 동아리를 들었는데, 안타깝게도 4년간 전공을 배우고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나는 광고와 맞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수업에도 크게 흥미가 없었고(그래도 장학금을 받기 위해 공부를 하기는 했다) 스스로도 창의적이라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더 큰 문제는 내향적인 성격이어서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어려워했다. 상상 속의 광고인은 크리에이티브한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다양한 사람들과 활발히 논의를 주고받고 주도적으로 팀을 이끌어 파급력 있는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이었다. 크게 흥미가 가지 않았고 내가 할 수 있을 거라고 감히 상상도 되지 않았다. 다른 길을 찾아야 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

교학 업무는 크게 어렵지 않았다. 매뉴얼만 잘 따르면 되는 일이었다. 공문 작성 및 회계 처리와 졸업 사정 관리. 시급을 받던 아르바이트와는 달리 연봉 계약을 했기 때문에 본격적인 사회생활이라는 기대감과 걱정이 나를 긴장되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약 3일 간 인수인계를 받았고, 혹시나 실수할까 싶어서 인수인계 과정을 모두 녹음하고 집에 돌아와 다시 들어보며 중요한 것들을 정리했다. 지금 생각하면 바로 퇴사 사유였는데 팀장님께 커피 타는 방법도 인수인계로 받았다. 블랙커피에 각설탕 1개. 이런 것도 일이라고. 그러나 막 사회초년생이 된 나는 별생각이 없어서 아침마다 팀장님께 커피를 타 드렸다. 그러다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 비합리적인 일이라 생각해서 까먹은 척 커피를 만들지 않았던 적도 있다. 다행히 어느 날 캡슐 머신이 배치되어서 수동으로 커피 타는 업무는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내 단계에서 끝나서 다행이었다.


한두 달 간은  일하면서 돈을 번다는 자체가 좋았다. 급여 내역서도 받는 진정한 사회인이 된 것 같아서. 첫 월급을 받았을 때 정말 보람도 컸고 부모님에게 어떤 선물을 해드릴까 즐거운 고민도 했다. 그러나 이 마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진상 팀장과 무의미한 하루의 반복

바쁜 일은 없었다. 아니, 할 일이 없었다고 해야 맞는 것 같다. 졸업 기간에만 반짝 바쁘고 거의 매일 같이 시간을 때우는 일이 반복됐다. 심지어 팀장님이 일이 없으면 영화를 보라며 USB를 공유해 주시기도 했다. 한번은 결재를 받으러 갔는데 팀장님의 모니터에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가 떡하니 켜져있었다. 이래나 되도 싶을 정도의 환경과 의미 없이 정해진 규칙을 따르는 것만이 중요한 업무. 띄어쓰기를 몇 번 할지, 마침표는 어디에는 찍고 찍지 않을지가 관건인 공문 쓰기. 띄어쓰기가 틀렸다며 공문이 반려당하기도 했는데, 그러면 다시 쓸데없어 보이는 담장자와 팀장, 학장의 결재라인을 다시 거치며 정보는 느릿느릿 전달되었다.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팀장님은 정말 닮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본인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들에게는 반말을 하며 때로는 결재 서류를 휙 던지기도 했다. 그러나 자신보다 어리더라도 더 높은 직급인 학장님에게는 달려가 인사를 하는 사람이었다. 때로는 술을 마시고 늦게 나오기도 했고, 아예 출근하지 않는 날도 있었다. 당연히 연가는 아니었다. 한 번은 나에게 자기 딸의 통장을 만들어오라고 시켰다. 결혼 선물로 통장에 돈을 넣어서 주기로 했다나 뭐라나. 요새는 타인에게 통장을 잘 만들어주지 않는다고 이야기했지만 막무가내였다. 그렇게 은행으로 헛 발걸음을 했다. 당연히 만들어주지 않았다. 팀장님께 전화했다. 은행은 학교에 소속된 은행이었는데 팀장님은 거기서도 진상이었다. 본인이 아니면 통장을 만들기 어렵다는 직원의 말에 내가 여기서 일 몇 십년이나 했는 줄 아냐는 라떼 발언을 하며 어찌저찌 통장을 만들고야 말았다.


팀장님만 문제랴. 이슈가 생겨서 다른 팀의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면 그 사람은 상대방의 목소리를 듣고 어린 티가 나면 짜증부터 냈다. 담당자로서 당연히 알려줘야 할 정보를 알려주지 않았고 알아서 찾아보라며 소리를 지르곤 전화기를 팍 내려놓았다. (놀랍게도 팀장님과 친한 인간이었다) 교수님들은 학생 지도비를 개인적으로 사용하기도 했고 학생에게 사용했다는 근거가 부족해서 회계처리가 되지 않으면 담당 직원과 싸우기도 했다. 학생 때는 교수님들이 대단해 보였지만 일하면서 존경심은 사라졌다. 나는 이런 하루를 반복하고 있었다



일을 하 않기 위한 일

어느 날 졸업에 문제가 생겨서 학생과 부모님이 찾아온 적이 있다. 팀장님은 곧바로 다른 부서로 그들을 유도했고 우리 부서 직원들에게 우리와 관련이 없다는 정보를 찾아서 리스트업을 하라고 시켰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일이 아니라 회피하기 위한 일을 시켰다. 문제가 생긴 학생들이 찾아오면 다른 팀으로, 그 팀은 또 다른 팀으로 학생을 안내했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그렇게 빙빙 돌려진 학생들의 문제는 도대체 누가 처리했는지 궁금하긴 하다. 교직원들은 표정이 없었고 전화를 하면 감정이 없거나 이유 없는 짜증이 목소리에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분명 일에 소명을 가지고 일을 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주변에는 이런 사람들이 있었다.


일이 없을 때면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읽곤 했다. 그때 <캐비닛>이라는 책을 읽으며 문득 내가 옷걸이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하루 종일 책상에 그냥 앉아 있었다. 정말로 화분처럼 그냥 앉아 있었다. 아무도 나에게 일을 시키지 않았고, 아무도 나에게 관심이 없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도대체 누구일까? 여기는 어디일까? 이런 철학적인 질문도 스스로에게 던져봤고... 회사는 도대체 나를 무엇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혹시 달력이나 옷걸이 같은 것을 뽑으려 했는데 잘못해서 내가 뽑히게 된 것은 아닌지...

“여긴 그냥 자리를 지키는 게 주 업무야. 생각하기에 따라선 그냥 자리를 지키는 것도 꽤나 고된 노동이지.”

실제로 그랬다. 여기는 그냥 자리를 꾸준히 지키는 게 주 업무다. 과장도 그 일을 하고 있고, 계장도 그 일을 하고 있고, 대리도 그 일을 하고 있다. 즉! 모두 자리를 지키는 일을 한다. 그리고 자리를 지키면 월급이 나온다.

솔직히 조금 맥 빠지는 기분이었다.

견뎠다. 밤나무와 벚나무와 단풍나무가 사이좋게 한 그루씩 피어 있는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육 개월 내내 창밖을 바라보며 그 시간들을 견뎠다. 아니다. 견딘 것이 아니라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고 시간들이 그냥 지나갔을 뿐이다. 어떤 날은 길 건너편 붕어빵장수 부부가 하루 종일 붕어빵을 몇 개나 파는 지 세어 본 적도 있었다.

“하루 종일 칠백 쉰 두 봉지! 우와, 부자 되겠군.”

그리고 왠지 모르게 늦가을의 비쩍 마른 옥수수 대처럼 내 속은 텅 비어갔다. 세상은 전쟁이라는데 내 인생이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편안해도 되는 것일까.

그맘때쯤 가끔 불안이 엄습했다. 이렇게 살면 안 되지 않나? 달려온 세월이 있는데, 남들보다 더 빨리 달리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남들이 뛸 때 대충 같이 뛰고 같이 고통 받았는데. 무엇보다 나는 심심했다. 술자리에 가면 친구들은 배부른 소리 하고 있네, 하고 빈정댔다. 맞는 말이다. 나는 상상임신을 한 것처럼 자꾸 헛배가 불러왔고, 나태와 굴욕과 아무 생각 없는 날들과 무엇이든 귀찮아지는 병이 스멀스멀 기어들어와 나의 뱃속을 채웠다.

이건 아닌데. 정말 열심히 살고 싶었는데.

<캐비닛>



몸은 편한데 마음이 불편한 시간이 계속됐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건가? 일은 없었고 불합리한 것들만 조금 참으면 누워서 돈을 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건 아닌 것 같았다. 이런 하루를 평생 반복한다고 생각하면 내 삶을 그냥 쓰레기통에 던져 넣는 것 같았다. 2년이 지나면 또 이 자리를 채울 누군가가 올 것이고, 나는 무능력한 상태에서 쉽게 대체된 후에 대체되길 기다리는 누군가의 자리에 다시 들어가서 또다시 대체되길 기다리는 삶을 반복하게 될 것이었다. 삶을, 시간을 이렇게 버리기 싫었다. 철밥통이 되기도 싫었다. 엄청나게 거창하지는 않더라도 조금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계약직이 아니라 정규직을 시켜준다고 해도 이런 곳에서는 일하고 싶지 않았다.


졸업할 때까지 어떤 일을 하며 살아야 할지 정하지 못했지만 이 철밥통 같은 직장에서 일하면서 앞으로는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고 쉽게 대체될 수 없는 일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새로운 직업을 찾아서


2016년 2월. 국비 지원을 받아서 편집디자인 양성 10개월 과정에 등록했다. 이렇게 한 줄로 적었지만 디자인을 시작해보자고 생각하기까지도 참 고민이 많았다. 8시부터 10시, 하루에 2시간씩 평일 주 5일을 학원에 꾸준히 나갔다. 6시에 업무가 종료되면 7시까지 남아있다가 학원으로 출발했다. 집과 학교까지 거리가 2시간이었으니까 학원이 끝나고 집에 가면 거의 자정이었다. 출근하려면 적어도 아침 6시에는 일어나야 했기 때문에 몸이 굉장히 피곤했다. 하지만 정신은 맑았고 보람도 있었다. 그저 출퇴근만 반복했었을 때보다 직접 학원을 알아보고 수업을 듣고, 디자인 툴을 이용하여 무언가 만들고 있는 것이 좋았다. 학교에서 일이 없으면 학원 과제를 하면서 열심히 다녔다. 만든 디자인 콘텐츠들은 블로그에 종종 기록해 두기도 했다.


지금 보면 촌스럽 창피한 실력이지만 그래도 나름 귀여운 기록들이다.

다양한 과제들








나의 첫 작품


디자인 과정 10개월 중 2개월은 포트폴리오 과정이었다. 이전 코스의 수업을 들으면서 과제도 열심히 하고 잘했다고 칭찬을 받았기 때문에 포트폴리오도 무사히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산이었다. 첫날에 어떤 회사에 취업을 하고 싶은지 리스트업을 해보라는 과제를 주었다. 강사님의 가이드에 따라서 순차적으로 작품을 만들 줄 알았는데 회사를 알아 오라니. 정말 막막했다. 디자인을 배우고 있었지만 디자인도 산업디자인, 편집디자인, 인테리어 디자인, 그래픽 디자인, 영상 디자인, 광고 디자인, 패션 디자인 등 너무 많았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커리어를 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정말 꾸역꾸역 디자인으로 유명한 회사와 광고로 유명했던 회사를 몇 군데 알아가기는 했다. 물론 꼭 가고 싶은 회사는 아니었다. 그리고 두 번째 과제가 나왔다. 어떤 디자인을 하고 싶은지 구체적으로 정해오라는 것이었다. 또 막막했다.


포트폴리오 반에서 과제는 곧 생각이었다. 하라는 대로 만들면 됐던 이전의 수업 방식들과 반대였다. 강사님은 어떤 디자인을 해보라고 절대 말을 해주시지 않았다.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이따위로 살면 되는 것이 없다.' 이런 식으로 강하게 말하는 스타일이었고, 모든 것을 스스로 알아오게 시켰다. 무언가 정리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봐주지 않았다. 조금은 불만에 찼던 것 같다. 나는 돈을 주고 학원에 다니고 있으니 방황하는 학생이 있다면 강사로서 조금은 가이드를 해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지금 생각하면 창피하지만 그때는 강사의 자격도 없어 보였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돈을 버는 사기꾼 같았다.


슬럼프를 많이 겪었다. 분명히 포토샵, 일러스트, 드로잉 등을 배우면서 나도 디자이너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과 확신이 조금씩 차오르고 있었는데 갑자기 폭삭 주저앉은 느낌이었다. 잘한다 잘한다 소리를 들어서 정말 나름의 소질이 있는 줄 알았는데, 가고 싶은 회사도 정하지 못했고 구체적으로 하고 싶은 디자인도 못 정했다. 디자이너가 되겠다고 학원을 1년 가까이 다녔지만, 또 이 길이 내 길이 맞는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시간은 야속하게도 그냥 흘러갔다.



북 디자이너

어쩔 수 없이 뭐라도 해야 했기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을 많이 했다. 몇 주간은 작업을 하나도 하지 않았다. 그냥 생각하고 고민하는 시간이었다. 그러다 그나마 서점에 가서 책 구경하는 것이 흥미로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렇게 북 커버 디자인을 해보기로 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명함, 리플렛과 같은 디자인은 쉽게 버려지고 잊혀지지만 책 꽤 오래 남는 디자인인 것 같아서 더 가치 있게 느껴졌다. <파피용>을 생각하면 검은 바탕에 파란 나비가 떠오르는 것처럼 그런 멋진 디자인을 해보고 싶었다. 시간이 지나면 버려지는 디자인이 아니라 누군가가 보관하고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그런 의미 있는 디자인.


다행히 목표가 생기니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나갈 수 있었다. 물론 만드는 과정에서도 심한 슬럼프가 찾아와 울기도 많이 울고 학원도 나가지 않은 적도 있다. 그냥 이대로 포기해버릴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강사님의 문자를 받고 다시 학원을 나갔다. 아쉽게도 문자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지금 생각하면 츤데레 강사님이 아니었나 싶다. 하기도 전에 포기하면 그냥 쫓아내지만 조금은 하려는 노력을 보이다가 슬럼프를 겪으면 나름의 방식으로 위로를 해주는. 그리고 거의 마지막에 가서는 나에게 디자인 센스가 있는 것 같다고도 했다. 촌스럽다고 까이기도 하고 종종 작은 당근을 받으며 그렇게 차근차근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나갔다. 조금씩 정리되기 시작하니 다시 자신감이 살짝 생겼다. 나는 참 오락가락한 인간인 것 같다. 2개월이 생각보다 짧아서 과정이 끝난 후 집에서도 혼자 콘텐츠 완성도를 높여서 포트폴리오를 완성했다.



내 인생 첫 포트폴리오


포트폴리오 반에서 만든 북커버 디자인



의뢰로 마지막에 시간에 쫓겨 만든 잡지 디자인이 마음에 들었다.



좋았다. 아트웍 수업에서 배운 디지털 드로잉을 활용하여 북 커버 일러스트로 사용할 캐릭터를 그렸고, 대학생 때 미디어 수업에서 알게 된 영화감독 알프레도 히치콕에 관한 잡지도 만들었다. 내 생각의 산물이 하나 세상에 태어났다.


대학을 4년 동안 다니고 나서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고 지금까지 학교에 다니면서 무엇을 얻었나 생각해보면 딱히 떠오르는 것도 없었다. 종종 등록금으로 졸업장을 샀다는 생각도 했다. 학점을 잘 받기 위해서 정보를 외우고 시험을 보고 또다시 잊어버리고. 물론 내가 진정한 배움에 대한 철학이 없어서였을 수도 있다. 잘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어서 학점이 좋기는 했지만, 학점보다 다채로운 포트폴리오가 훨씬 만족스러웠다. 이 포트폴리오로 이제 취업을 하고 정말 디자이너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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