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내 삶을 디자인 하기로 했다.
2017
학원에서 만든 포트폴리오를 기반으로 이력서를 작성하고 구인구직 사이트에서 디자인 회사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냥 아무 곳에나 이력서를 뿌리고 싶지 않았다. 끌림포인트가 중요했다.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기 때문에 아래 두 가지를 회사를 선택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기준으로 잡았다.
1. 가치 있는 서비스
2. 좋은 기업 문화 및 복지
마음에 드는 회사가 없어서 꽤 오랫동안 사이트를 탐색하다 두 곳의 회사에 지원했다. 첫 번째는 자가출판 서비스를 비즈니스 모델로 삼는 곳이었다. 고객이 원고를 올리고 원할 경우 책 표지 디자인을 제공하여 쉽게 나만의 책을 만들 수 있도록 돕는 곳이었다. 책을 내는 것이 내 버킷리스트 중의 하나였고, 출판이 매우 까다로운 과정이라고 생각했던 터라 이렇게 쉽게 책을 만들 수 있도록 프로세스를 구축한 것이 출판 생태계의 혁신이라고 생각했다.
두 번째는 자체 제작 디자인 에디터를 개발한 회사였다. 다양한 템플릿 디자인과 에디터를 무료로 제공하여 고객이 기본 디자인에서 내용만 수정하고 홍보물을 주문할 수 있는 서비스였다. 소상공인은 비용상 상주 디자이너를 따로 둘 수 없는 문제가 있었고, 근처 인쇄 업체에 맡기자니 불필요한 수정과 커뮤니케이션 비용이 든다는 불편함이 있었다. 이런 단점을 한번에 해결해주는 서비스였다. 그리고 유투브를 보니 종종 소상공인을 선정하여 무료 컨설팅 및 브랜딩 작업을 도와주는 프로젝트도 하고 있었다. 사회적 기업처럼 보여서 마음에 들었다. 여기서 일을 한다면 나도 의미 있는 디자인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두 번째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비전공 디자이너
디자인 비전공자라는 이유로 평가절하를 받고 들어갔지만(아마 고졸 연봉 테이블이었을 것이다) 공부를 하면서 돈도 버는 것이라 생각하기로 하고 입사를 결정했다. 사실 너무 낮은 연봉으로 잠깐 고민을 하기는 했지만 디자인 비전공이라는 것도 맞았고, 지금은 경험을 쌓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한번 열심히 해서 내 가치를 높여보자는 포부도 가졌다. 비전공이어도 열심히 하면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업무는 명함, 리플렛, 전단지, 현수막 등 모든 인쇄물 템플릿을 디자인하는 것이었다. 학원에서 과제용 디자인만 하다가 실제 고객에게 제공되는 디자인을 하게 되어서 살짝 설레였다. 한번 쓰고 버려지는 디자인도 아니었고, 웹에 템플릿으로 등록을 해두면 모든 고객이 무제한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이런 설렘과 함께 걱정도 있었다. 동료 디자이너들이 거의 디자인 전공자였기 때문에 비전공자로서 내 작업물의 퀄리티가 괜찮을지, 너무 비교당하는 것은 아닐지 신경쓰였다. 그렇게 작은 설렘과 긴장감을 지니며 일을 시작했다. 그래도 같이 입사한 동료 디자이너들과 야근을 하면서도 서로 으쌰으쌰하며 디자이너로서 첫 회사 생활을 해나갔다.
(과거를 돌아보는 글을 적어보며 4~5년 전에 했던 디자인 작업물들도 조금씩 정리를 하고 있다. 역시 지금 보면 매우 부족한 퀄리티지만 그때 당시의 내 실력이 이 수준이었다는 것은 확실하니 추억으로 남겨두려고 한다. 기록이라도 해둬야 나의 시간과 경험을 잃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또 찾아오다, 그 이름 '무기력'
디자인이라는 것은 창의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거의 공장처럼 하루에 n개씩 디자인을 뽑아내야 했다. 어느 순간 디자인 기계가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색상과 레이아웃 등 감각적인 것을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팀장님은 디자이너가 아니라 마케터였다. 디자이너의 성과는 작업한 디자인의 개수로 평가받았다.
'아, 이게 디자이너의 현실인가?'
어디선가 들은 것 같다. 회사에서는 상업적인 디자인을 할 수밖에 없다고. 자기가 하고 싶은 예술을 하려면 혼자 일해야 한다고. 맞는 말이긴 하다. 회사는 회사의 목표가 있으니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는 없었다. 이해는 갔지만 아쉬웠다. 하지만 나는 열심히 일했다. 다른 선택지는 딱히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비전공자임에도 잘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뭐, 내가 예술을 하고 싶은 것도 아니니 이렇게 사는 것도 괜찮지 않냐는 생각도 들었다. 작업물 퀄리티가 괜찮게 나오면 만족스럽기도 했고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웹사이트에 디자인을 모두 게시하기 때문에 계속 남아 있는 것은 좋았다. 디지털은 무한 복제가 가능했다.
생각해보니 나는 사라지지 않고 무언가 남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다. 학원네 다닐 때 북커버 디자인을 해보자고 생각한 이유도 바로 이거였다. 전단지를 받고 집에 보관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책은 책장에 계속 꽂혀있다. 디자인의 가치를 어떻게 비교하겠냐마는 나에게 있어서 전단지 디자인보다 책 표지 디자인이 훨씬 가치 있게 느껴졌다. 회사에서 디자인을 뽑아낼 때도 너무 기계 같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만든 것들이 전부 웹에 남아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괜찮았다. 내가 이런 작업을 해왔다고 보여줄 수 있으니까. '버려짐', '사라짐', '증명', '남아있다', '인정', '쓸모'…. 뭔가 내가 중시하는 가치가 잡힐 것 같으면서도 아직은 애매모호하다. 느낌만으로 남아있는 것 같다.
2018
서비스 개선 제안
템플릿 디자인을 하면서 우리 웹사이트가 디자인 탐색이 제대로 되고 있지 않다는 불편함을 느꼈다. 템플릿 페이지에서 복수의 키워드를 입력하면 각 키워드가 포함된 디자인이 검색되는 것이 아니라 복수의 키워드 자체를 한 단어로 판단하여 아무것도 검색이 되지 않았다. 카테고리는 상품별로 중구난방이었다. 디자인이 수만 개가 있었지만 정작 필요한 디자인을 찾는 것이 너무 불편해서 제대로 된 가치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지고 있는 것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고객은 탐색이 불편했지만 내부적으로는 설정에 불필요한 시간을 많이 낭비하고 있었다. 하나의 디자인을 다양한 상품으로 비율만 바꿔서 변환하는 작업을 했는데, 이를 웹에 게시할 때 같은 디자인이라도 상품별로 각각 다른 카테고리를 설정하는 노가다를 해야 했다.
현재 탐색의 불편한 부분과 개선하고 싶은 방향에 대하여 문서를 작성했다. 목적은 다음과 같았다.
1. 고객이 원하는 콘텐츠를 쉽게 찾을 수 있도록
2. 콘텐츠 설정 시 불필요한 노가다 작업 줄이기
팀장님이 글을 보셨고 기획한 대로 서비스 개선 작업을 한번 해보라고 하셨다. 키워드 단위 검색 개선, 색상/스타일 검색 추가, 상품별 카테고리 통일, 정렬 방법 추가 등 하고 싶은 탐색 방법들을 모두 리스트업하여 사용성 개선 작업을 진행했다. 이 업무를 시작으로 UXUI 디자이너가 되었다. 편집 디자이너로 입사한 지 약 6개월이 지난 뒤였다. 초기에는 템플릿 디자인과 UXUI 디자인을 병행하다가 2018년부터 본격적으로 UXUI 업무만 집중적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UXUI의 장점은 서비스와 더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템플릿 디자인은 수많은 콘텐츠 중 하나만 차지하기 때문에 고객에게 선택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었지만, UXUI는 서비스 그 자체였다. 고객이 사이트에 들어와서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고 나가는 것. 그 모든 과정이 UXUI였기 때문에 더 의미 있는 일을 하게 된 것 같아서 좋았다. 물론 그만큼 책임감이 더 커져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기도 했지만.
2019 ~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지만 'UXUI 디자이너'라는 직군이 '프로덕트 디자이너'로 변경되었다. 2022년 현재까지 진행 중인 나의 직무다. 회사마다 UXUI와 프로덕트를 의미하는 바는 다르지만 UXUI보다 프로덕트가 더 큰 범위인 것은 확실하다. 단일 기능이 아니라 서비스 전체적으로 큰 그림을 책임지는 역할로 바뀐 것이다. 더 많은 것들을 책임감 있게 맡아달라는 회사의 요구였을 것이다. 프로덕트에서는 커뮤니케이션과 개발, 마케팅, 데이터 지식이 훨씬 중요해졌고 리더십까지 요구되었다.
연봉 테이블을 상향하는 등 처우도 나아졌고 더 영향력이 생긴 것 같아서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계속 불안했다. 그놈의 인정욕구 때문에 잘 해내지 못하면 내 실력에 사람들이 실망할 것 같았다. 배우고 알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서 도대체 어떤 분야의 공부를 먼저 해야 하는지 막막했다. 그리고 UXUI 전문성도 부족한 것 같은데 개발이나 데이터를 학습하는 데 시간을 들인다면 뭣도 아니게 될 것 같았다. 제너럴리스트냐 스페셜리스트냐….
'프로덕트 디자이너가 내 길이 맞을까?'
고민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결국 직무 자체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졌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지금 고민하는 것들이 어떻게 하면 회사가 바라는 이상적인 디자이너의 모습을 충족시킬까에 대한 것들이었다. 데이터와 개발 지식이 중요하다고 하니까 데이터와 개발을 배워야 해! 리더십과 PM 역할을 요구하니까 리더십을 키워야 해! 내 기준이 없었다. 내가 되고 싶은 디자이너의 모습이 아니라 회사가 원하는 모습에 나를 맞출 생각만 하고 있었다. 처음은 스스로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나아가기 시작했지만 성장하는 과정의 주도권을 빼앗긴 것 같았다.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우선순위 파악도 되지 않는 것은 결국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스스로 정의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앞으로는 주변의 요구에 쉽게 휩쓸리지 않고 나만의 기준을 세워서 성장할 필요가 있었다. 회사에서 리더십을 요구하니까 맞지도 않는 리더십을 스트레스받으며 억지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추후 타인에게 영향력 있는 콘텐츠를 제공하기 위해서 사람들의 심리를 잘 파악하고 그들을 리드하는 연습을 하면 큰 도움이 될 거야'와 같이 개인적인 필요성과 목적의식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2022
주변에 휩쓸려서 이리저리 방황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의 목적과 가치관에 따라 살고 싶다. 나를 돌아보고 생각을 정리하는 자기 발견 글쓰기를 시작한 이유기도 하다.
프로덕트 디자인에서는 UX가 중요하다. UX는 User experience로 고객 경험을 의미한다. 고객이 서비스를 이용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총체적인 감정과 경험을 긍정적으로 디자인하는 것이다. 그러다 문득 고객 경험을 디자인한다면 내 삶을 디자인 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했다. MX, My experience. 나의 삶을 디자인하는 것.
수신제가치국평천하 (修身齊家治國平天下)
: 몸과 마음을 닦아 수양하고 집안을 가지런하게 하며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한다
모든 것에는 단계와 순서가 있으며 더 큰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당장 할 수 있는 나 자신을 돌보라는 의미다. 주기적으로 삶의 방향성을 잃고, 나는 왜 살아가는 것이고 일은 왜 하는지 혼란스러울 때가 많다. 더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살고 싶지만 방법을 잘 몰랐다. 그렇다고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삶의 목적을 찾으려고 열심히 노력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저 우울해하면서 누워있다가 동기 부여 영상을 보고 기분이 조금 나아지면 또 현실 안주를 하고. 지금까지 무한 반복이었다.
일을 잘하고 싶어서 그렇게 고객 경험을 높이기 위한 방법론도 배우고 스터디도 했으면서 내 삶의 경험을 위해서는 별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 같다. 나의 페인 포인트도 해결하지 못하면서 타인의 페인 포인트를 잘 해결할 수 있을까. 그래서 앞으로는 내 삶을 디자인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삶의 목적과 가치관이 분명해진다면 하루하루 의미 있게 시간을 보내고 더 의미 있게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전보다 방황도 덜 하고 무기력한 감정도 덜 느끼고. 회사에서 고과를 잘 받으려고 고객을 생각하는 척 디자인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나의 성장과 고객의 성장을 위해서 디자인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내 삶을 디자인하는 것은 내 생각과 행동, 나아가 내가 타인에게 끼치는 영향까지 긍정적으로 바꾸는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