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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미씨 Oct 11. 2024

정말 역마살이라는 게 존재하는 걸까

LOFT OF SOMI [소명 사담]


     역마살 _(직장)   


"아직은 어리니까 당연히 이곳저곳 다녀보는 게 좋지"

"아직 젊어 더 다양하게 무언가를 해봐!"


다들 저에게 이렇게들 말합니다.

맞습니다. 아직 저는 어리고, 경험해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그래도 불안하고 초조한 나이를 살아내는 게 맞습니다.

그러기에는 대학도 졸업했고, 외국 생활도 해본 저로서는 뭔가 해야 할 듯합니다.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질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 지금 상황이 무언가를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건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교회를 다니지만 역마살에 붙잡혀있다고 말합니다.

역마살이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것인데, 붙잡혀 있다는 것이 모순이긴 합니다만,

그다지 그것이 밉지도 않습니다.

자연스럽게 옮겨가야 할 일들과 상황에 놓인 것이니까요.

감사하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저는 계속 꾸준히 일 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이죠.

저는 일하고, 배우고, 무언가를 탐구하는 일을 좋아합니다.

덕분에 지금 현재 일하는 직장에서도 번역 업무와 사업계획서를 보고 자료를 만드는 일을 합니다. 감사하게도 흥미로운 일을 하는 거 같아 스스로에게 기쁨과 뿌듯함이 있습니다.

왜 역마살이라고 했을까요.

저는 지금까지 많은 직장과 아르바이트를 옮겨 다녔습니다.

짧게는 하루, 길게는 1년가량 일을 하였습니다. 불안하고 초조하고 저에게 일이 성에 차지 않아 계속 일자리를 알아보고는 했습니다. 늘 마음 한편에는 “그래, 평생직장은 없어 일단은 다녀도, 언젠가는 또 옮겨 가는 것이니까.” 나에게 맞는 직무를 찾는 훈련의 과정일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렇지만 아직 저는 정말 어리니까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 과거 조선시대라면 어떠하였을까요.

저는 이런 저의 삶을 역마살이라 여기면서 살았을까요.

아마 저는 어느 집에서 태어나자마자 신분이 정해져서 그 신분으로 평생 살았겠지요.

어디 옮겨가지 못한 채, 한 곳에서 평생 살아야겠지요.

지금 21세기형 역마살이 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저의 첫 번째 직장은 미국이었습니다.

미국 여성복 패션회사였습니다. 1년간 인턴을 하였고, 디자이너 어시스턴트 역할을 하다가 선임 디자이너들이 일을 그만두면 일은 줄어들기보다는 일이 더욱 많아졌습니다.

미국에서 일을 하곤, 유럽여행을 하고서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한국에서는 졸업을 하기도 전에 의류 벤더사에서 일을 하였습니다. 그 역시도 학업과 일을 병행하였는데, 이 조차도 진행하기 어려워 3개월 일하고 일을 그만두었습니다. 그래도 벤더와 해외영업 업무를 경험한 것이 된 것이죠.

학교를 졸업하고, 자격증 시험과 의류 원단 회사에서 근무를 했었습니다. 이 역시도 3개월 업무로, 미팅을 준비하는 팀이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일이 벅찼습니다. 감사하게도 자격증 시험을 같이 준비할 수 있음에 다행이었지요.

이후 진짜 역마살에 사로잡혀 거처 문제로 정신없었습니다. 올해만 해도 3번 집에 살고 있습니다.  

거처의 문제로 일을 잠시 못하다가,

지금 현재 안정을 되찾아서 일을 할 수 있는 여유를 되찾아 연구원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앞으로 역마살에 이리저리 직장과 거처를 옮겨 다니겠지요.

(다들 이렇게 산다는데 그게 아니라 저만 그렇게 사는 기분이 들어서요)

옮겨 다니면서 수많은 시련과 또 좋은 일들이 저에게 찾아오겠지요.

그것이 고난이 아니라 그걸 이겨내면 더욱 큰 기쁨이 있겠지요.

우리 인생에는 고난이 파도처럼 오고 또 옵니다. 그러나 그 고난과는 비교할 수 없는 기쁨과 특권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 일어나 걸어갈 수 있습니다.




  

     역마살_ 주거지   



고등학교에 다니던 때부터 나는 홀로 해야 하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또 홀로 지내는 게 익숙했었죠.

집 밖을 나와 산지 거의 10년이 다 되어가는데 10번 정도 이사를 한 거 같습니다. 한 곳에 무던하게 오래 있지 못한 건지, 아니면 정말 나의 의지가 아니라 타인에 의해서 제가 밖으로 나도는 건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이제는 이사를 생각하면 지긋합니다.


스무 살에 살았던 고시원은 샤워룸 문이 제대로 닫히지 않는 남녀 공용 고시원이었습니다. 외국인들도 많았고, 이상한 사람들도 더러 있었습니다. 저는 집 안에 있기보다는 친구랑 매일 서울 구경을 하며 지냈었습니다.

그러면서 서울과 익숙해지고 친밀해졌습니다. 봄 여름을 줄곧 잘 지내다가. 너무 더운 장마철에 도저히 더위를 이길 자신이 없어서, 원룸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첫 원룸 집은 너무 맘에 들었습니다. 벽 한 면이 라운드였고, 유리창이 있었는데, 재미난 구조의 집이었죠. 붙박이 장이 있어서 잡동사니 물건을 다 집어넣어도 공간이 남는 집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집에 친언니와 살게 되었습니다. 언니는 저 혼자 쓰는 침대가 맘에 안 들었는지 나에게 이사를 가자고 했었습니다. 그렇게 라운드 원룸 집을 2년 정도 살다가, 두 번째 원룸 집은 주택형 집에 작은 원룸이 있는 집이었는데, 나이가 지긋한 할머니가 사시는 집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젊은 시절에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셨다고 했는데, 가끔 집에서 쉬고 있으면 피아노 연주 소리가 내 방까지 울려 퍼졌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지만 늘 항상 집에 문제가 많이 생겼습니다. 누수되어 벽 한 면이 곰팡이가 생겨서 할머니랑 둘이서 도배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저를 손녀딸처럼 이뻐하셨지만 급하게 나는 미국으로 떠나는 바람에 인사도 제대로 못 하고 한국의 삶을 급히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미국 집은 하늘색 페인트가 발려있던 집이었습니다. 집이랑 회사 거리가 거의 2시간 정도 걸렸습니다. 미국은 원래 땅이 넓으니까 두 시간은 아무렇지 않았습니다. 이 집에서는 내가 떠나기 한 달 전에 문제가 생겼다. 내가 렌트비를 냈는데, 하우스 매니저가 렌트비를 받지 않았다고 우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나는 집에서 쫓겨났고. 제 방의 문을 잠그고서는 한 달 비용을 내기 전까지는 문을 열어주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경찰을 불렀고, 경찰과 함께 방문을 열었습니다. 정말 저의 민낯을 보여주는 경험이었던 거 같습니다. 정리되지 않은 저의 방과 한국으로 보낼 짐을 한창 싸던 중이었는데, 그 짐을 모두 공개해버리니 너무 수치스러웠습니다. 그렇게 나는 미국 생활을 급하게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고 한국에서 역시 부모님 집에 좀 머물다가 다시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대략 1년 정도 셰어하우스에 살았다. 사는 동안 조금 불편한 점이 여럿 있었지만, 비교적 만족하며 살았다. 작은 방에서 수많은 옷가지들을 어떻게 정리할지 고민했고, 이 짐들을 줄여야 하나, 정리를 잘할 방법을 구상하기도 했습니다.

여차여차해서 지금 집은 복층 원룸으로 이사했습니다. 이사한 지 한 달 조금 넘었습니다. 층높이가 높아서, 생각도 탁 트이는 기분입니다. 창의력이 마구 자라는 기분이라 집에 있으면 뭐라도 하게 됩니다.


더 이상은 이사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너무 피곤한 일이라서 그런가 너무 이사는 어렵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총 세 번 거주지를 옮겼습니다. 거주지에 대한 역마살이 저에게 있는 건지 진짜 궁금합니다.

거주지를 정할 때 정말이지 많이 고민하게 됩니다. 살아보기 전에는 집을 완전히 모릅니다. 비로소 살아보고 나서야, 집의 장단점을 찾을 수 있는 것이죠. 마치 연애처럼, 만나보고 나서야 사람을 알게 되고 진득하게 처절하게 관계를 지속해봐야지 아는 거죠.

집도 그런 거 같습니다.


저는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역마살에 갇혀 있는 제 자신을, 평생 이리저리 어딘가를 정착하지 못하는 채 살아가는 모습을요.

저는 진실로 역마살에 얽매여 있는 사람이 아닐까요.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운명을 가진 사람이라 아주 멋지지 않습니까

과거에는 매력적이지 않았겠지만, 21세기 시대에는 다르겠지요.

여러 일들을 부딪히고 경험하다 보면 단단한 저를 만들어지는 거겠지요.


저는 역마살이 껴있는 사람입니다.

오늘도 출근을 해서 미련 없이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역마살: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게 되는 운명을 지칭하는 말. 이러한 운명에 처한 사람을 과거 역(驛)에서 쓰이던 말들이 한 군데에 정착하지 못하고 여러 역을 떠돌아졌던 것에 비유한 용어이며, [영마 쌀]이라고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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