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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민 Jul 26. 2018

강동원, 정우성, 한효주, 그리고 아무것도 없었다

영화 <인랑>

돈을 받고 글을 쓰는 블로거들이 많다. 나도 블로그를 꽤 오래했고, 그런 유혹도 여러 번 받았다. 돈을 받고 글을 쓴 건 아니지만 한 책의 공식 서평단으로 활동하기도 했고, 과거 이글루스의 "렛츠리뷰"에 참여하기도 했다. 상품을 제공받고 체험하고 써보는 것, 그건 서로에게 윈윈인 일이지만, 아무래도 을의 자리에 있을 수밖에 없는 블로거들이 속된 말로 "솔직한" 리뷰를 남기기란 정말로 쉽지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번 영화, "변산"은 내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수준이라 깔 수밖에 없었고, 이번 영화도 마찬가지다. 이번 영화는 강도원, 정우성, 한효주 주연의 "인랑"이다.


CHAPTER 1 - 영상미

솔직히 상영관을 나오면서 나는 이 영화에 불만이 굉장히 많았고, 누구나 이 영화를 흠씬 두들겨패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의외로 그렇지 않았다. 생각보다 이 영화는 많은 지지를 받고 있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영상미"였다. 그래, 솔직히 말해서 이 영화의 영상미는 썩 괜찮은 편이다. '특기대(특수기동대)'의 모습은 "이게 겨우 6년 뒤라고?"라는 의문을 품을 정도로 미래적인 디자인을 하고 있다. 이들의 이런 모습은 굉장히 이질적이지만 영화 속에서는 이질감이 과하지 않도록 잘 조절했다. 영화를 보다보면 특기대는 원래 저런 옷을 입는구나, 하고 세계관에 금방 동화될 수 있다. 적어도 이러한 연출력은 인정해야하는 부분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 밖에도 액션씬은 꽤 괜찮았다. 원없이 총소리도 들어봤다. 총과 같은 연출은 하나같이 과하지만 그 과함이 기진맥진으로 곧장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서 봐줄만하다. 뜬금없이 왜 지하도에서 자꾸 싸우는지 모르겠지만 여튼 지하도(정확히는 수도)에서의 전투씬도 어둠과 소리에 의존해서 쫄깃쫄깃한 긴장감을 뛰어나게 살렸다. 최소한 액션이 시작되면 지루하지는 않은, 그 정도의 영화는 된다.


그러나 문제는 내가 액션 무도 영상을 보러 간 것이나 연출력 자랑 영상을 보러 간게 아니라는 점이다. 나는 영화를 보러 갔다. 왜, 영화인들이 자주 하는 말 중에 "영화는 종합미술"이라는 이야기가 있지 않나? 영화는 당연히 서사만으로는 끌고갈 수 없는 장르라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연출만으로 모든 단점을 커버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마치 강동원의 얼굴만으로 이 2시간 반짜리 영화를 끌고 나갈 수 없는 것처럼. 뛰어난 연출력이나 액션씬은 한 10분 보면 어느새 익숙해지고 무덤덤해진다. 반면에 그럴수록 이 영화의 빈약한 구성은 속속 눈에 들어온다. 

그래도 강동원이 잘생긴 것 만큼은 인정


CHAPTER 2 - 개연성 없는 전개와 더 개연성 없는 인물의 끝없는 향연

이 영화의 가장 큰 비극은 전개에 개연성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는 데에 있다. 원작을 가지고 그대로 영화화를 하는게 아니라 한국의 현실, 특히 '통일'이라는 화두에 맞춰 각색을 하고, 거기에 한국적인 정서를 끼얹었는데, 그 과정에서 인물들의 설정은 붕괴되고 전개는 하나같이 이해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관객들은 감독이 펼쳐놓는 '인랑'이라는 세계를 허덕이며 쫓아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조금의 친절함도 베풀지 않는다. 인물의 감정선도 마찬가지다. 갑자기 강동원과 한효주가 키스를 하는데 저 둘이 애정을 느낄 어떤 이유도 전개도 근거도 없다. 한효주야 다른 생각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강동원은 왜? 

알 수 없는 전개는 이야기하자면 끝도 없다. "우리는 늑대의 탈을 쓴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탈을 쓴 늑대"라는 정우성의 대사, 그리고 영화 초반 나레이션에서 "인간성까지도 지워져갔다"라는 오글거리는, 딱 일본 만화에서 쓸 법한 설명까지가 무색하게 강동원은 겉만 늑대고 속은 한없이 인간이다. 이에 대해서 '인랑의 인간성'에 주목했다는 설명을 어거지로 갖다 붙일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이 영화 속에서 그려지는 인랑이 단순한 살인마나 훈련된 특별 요원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영화의 설명에 따르자면 소위 '피의 금요일'(오발사고로 15명의 학생이 죽은 사건에 '피의 금요일'이라는 정치적인 수사를 가져다 붙힌 것도 과도한 묘사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이후 자기방어를 위한 일종의 방어기제로 인간성을 포기하고 늑대로 살아간다는 설정인데, 아무런 감정적 연대도 없는, 심지어 자기를 배신한 여성에게 흔들리는 강동원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늑대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즉, 감독이 만들고 싶었던건 '인간성을 숨긴 늑대'였던 것 같은데, 아쉽게도 '늑대인 것처럼 보이려고 아둥바둥하는 인간' 밖에 되지 못한 것이다. 


이렇다보니 오히려 진지한 척 근엄한 척 대사도 없이 '인랑'을 연기하는 강동원의 모습이 오히려 한없이 어색하고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혀놓은 것 같은 느낌이 난다. 이 부분이 이 영화를 가장 루즈하고 지루하게 만드는 부분인데, 강동원을 포함하여 모든 등장인물이 과도하게 진지하고 과도하게 과묵하며 과도하게 정색하고 과도하게 소리지르고 과도하게 감정을 폭발시키는데, 이게 2시간 반동안 이어지면서 텐션은 전혀 유지하지 못하고 있고, 주요 등장인물들의 감정이나 사건의 전개에 대한 단서, 설명, 묘사가 엄청나게 생략되어 휘릭 하고 지나가버리기 때문에 도통 영화를 따라가기가 어렵다. 


그런가하면 일종의 히로인을 담당하고 있는 한효주는 또 어떤가. 한효주는 일단 각본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초반 한효주가 치는 대사 하나 하나가 문어체도 구어체도 아닌 묘한 번역체의 느낌이 났다. 문어체라고 하기엔 다듬어지지 않았는데, 구어체라고 하기엔 어색하기 짝이 없다. 그러다보니 한효주의 연기가 공중에 붕 떠있는 것 같은 느낌이 났고, 이 인물은 전혀 이야기로 녹아들지 못했다. 의도된 '거리두기'라고 주장해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뿐만 아니다.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갈등 축 중 하나는 '공안부'(아니 6년동안 왜 멀쩡한 경찰조직은 날아가고 유신정권스러운 공안부라는 이름을 들여왔나... 일본 영화를 애매하게 각색한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네이밍 센스다 정말..)에 소속된 한상우(김무열)와 특기대 임중경(강동원)의 갈등이다. 사실 이 이야기의 대부분의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임중경과 이윤희(한효주)가 겪는 일련의 이야기는 모두 한상우가 기획한 것이었다. 그럼 당연히 이들의 갈등이 이야기의 주축으로 단단히 버티고 서있으며, 관객은 한상우와 임중경 중 한 사람을 마음 속으로 응원하든, 둘 다 싸잡아 까대든 하면서 그 흐름을 쫓아가도록 만들어야 했다. 그러나 이 영화는 한상우가 죽을 때까지 도대체 한상우가 왜 임중경을 못잡아 먹어 안달인지, 도대체 무슨 계기로 한상우는 특기대를 내팽개치고 공안부로 옮겼는지, 그리고 그렇게 조직을 배신하고 나온 인물이 뭘 잘해서 공안부 차장까지 올라간건지, 아무런 정보를 주지 않는다. 관객들은 한상우가 임중경을 싫어하는 것 같고 얘를 조지려고 하는 것 같긴 한데, 뭐 때문에 조지려는거야? 무슨 성격파탄잔가? 하고 쳐다보고 있을 수밖에 없다. 

결국 관객들은 막바지에 한상우가 "너랑 내가 뭐가 달라!!"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일종의 열등감이 이 모든 사건을 벌인 이유라는 것을 알게 되는데, 애석하게도 이 시점까지 거의 2시간을 달려왔을 영화는 단 한 번도 한상우가 임중경에게 열등감을 가졌다는 식의 묘사를 한 적이 없다. 굳이 설명하자면 조직에 버티고 남은 임중경에 대해 그렇지 못하고 공안부로 자리를 옮긴 한상우가 열등감을 가지게 되었다, 라고 할 것인데, 누가 봐도 특기대 내의 임중경 보다는 공안부에서의 한상우가 지위도 훨씬 높아보이고, 애초에 한상우가 조직을 떠난 이유가 임중경과 어떻게 관련되는지 등에 관한 어떠한 묘사도 해준 적이 없다. 이러다보니 마지막에 한상우가 그렇게 소리를 질러 봤자 관객들은 "저 새끼가 왜 저래...?"하고 벙 쪄서 쳐다볼 수밖에 없다. 시체가 부자연스럽게 편안한 자세로 돌아눕고 물에 떠내려가는 장면에서 실소를 터뜨리게 되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말이다.


마지막에 정우성과 강동원의 격투씬도 마찬가지다. 갑자기 이어진 정우성과 강동원의 격투씬을 보면서 내가 느낀건 "아... 이건 서비스씬이다... 이렇게 된거 잘생긴 얼굴들이나 신나게 구경하라는 거구나..."라는 거였다. 마지막, 둘이 주먹다짐을 하면서 결국 정우성이 강동원을 보내주는 결론은 영화의 여운도 책임지지 못하는 데다 도대체 둘이 갑자기 맞다이를 까는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다.


한마디로, 이 영화는 2시간 반이라는 어마어마하게 긴 러닝타임을 사용했으면서도 감독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못했고, 그러다보니 많은 부분을 잘라먹었고, 그게 이야기들의 개연성을 엉망진창으로 뒤집어놓은 셈이다. 한 인물의 행동에 충분한 근거를 붙여주지 않으니 관객이 보기에 인물은 혼자서 설치고 돌아다니고 괜히 화내고 울고 정색하는 감정과잉처럼 보일 뿐이다. 인물들의 행동은 일관되지도 않고 입체적이지도 않다. 애써서 발신기를 누른 한효주가 도대체 왜 갑자기,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어서 발신기를 눌렀다는 사실을 강동원에게 알려주는지 어떠한 설명도 해주지 않는다. 장면이 바뀌더니 갑자기 한효주의 생각이 변한 셈인데, 영화의 전체적인 구성에서 보자면 그 장면은 그저 한효주가 강동원이 '인랑'이라는 사실에 충격받는 사건의 개연성을 만들어내기 위함이다. 즉, 하나의 개연성을 위해 두세개의 개연성을 포기하는 과정이 영화 내내 반복된다. 그런 주제에 영화는 온 힘을 다해 인상 팍 쓰고 정색을 유지하고 있어서 관객은 이런 텐션을 따라가다 금새 지쳐버린다. 


CHAPTER 4 - 아무런 메세지도 던지지 못한 영화

"어렵지만 가능성이 있는" 영화의 좋은 사례인 인셉션

그럼 이 영화는 이런 무리수 전개를 통해 어떤 메세지를 던졌을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인데, 엉망진창인 서사를 가지고 어떤 성공적인 메시지를 던졌으리라고 기대하기란 쉽지 않다. 그 기대대로다. 이 영화는 어떤 유의미한 메세지도 던지지 못하고 끝을 내린다. 사실 이 영화의 가장 큰 문제는 여기에 있다.


혹자는 이 영화가 '아쉬운 영화' 정도라고 평하기도 하고, 각색에서 미스가 있었을 뿐 영화 자체는 나쁘지 않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개인의 취향에 따라 이 영화를 다양하게 평가할 수 있음은 당연히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 굳이 내가 이런 악평을 쏟아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결국 이 영화가 인물과 사건의 개연성을 모두 잃어버림으로써 서사적으로도 교훈적으로도 어떠한 메시지도 남기지 못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어려운 영화에는 크게 두 부류가 있다. 하나는 작가가 교묘하게 배치한 도구들을 모두 이해하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영화들로, 쉽게 말해서 "깊이"가 있고 그 깊이가 한 번 영화를 감상하는 것으로 모두 이해하기 어려운 영화들이다. 다른 한 가지 부류는 영화의 전개와 진행이 엉망진창이라 이해하기 어려운게 아니라 이해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져버린 경우들이다. 안타깝게도 이 영화는 명백하게 후자에 속하는 영화다. 인물의 감정선을 따라가기도, 사건들을 개연성있게 이해할 수도 없다. 


이 영화 속에서 던질 수 있었던 메시지는 무수히 많다. 예를 들어 통일 한국의 혼란상이라거나, 조금 더 낮은 층위에서 비인간화된 군인의 모습, 아니면 단순히 재미를 위해 섹트라는 레지스탕스 조직과 통일 한국의 대립을 그려내도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강동원과 한효주에게 과도하게(그리고 개연성없게) 집중하면서 이러한 서사에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마치며 - 한국 SF는 언제까지 날 배신하나

이번에는 설마, 하는 생각으로 본 한국 SF는 또 성공적으로 날 시원하게 배신했다. 위의 내 평가를 종합해보나,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내리는 평가를 보나, <인랑>에 대한 평가는 액션씬과 화면 등은 모두 볼만한데 시나리오가 아쉽다 내지는 엉망이다 정도인 것 같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지만, 나는 "액션이 좋은 영화"는 "액션이 좋은" 영화지 "좋은 영화"는 아니라고 본다. 영화는 결국 서사 장르이고, 특히 이 영화가 대놓고 예술 영화를 표방하거나 보여주기 위한 어떤 전위적 시도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니므로, 결국 이 영화의 한계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 영화를 상영관에서 제 돈을 주고 볼 가치가 있느냐에 대해 절대 아니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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