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넷 뉴먼 <숭고한 영웅>
다음 그림은 현대미술의 '숭고함'에 한 획을 그은 작품이다. 이 그림을 가로 30cm, 세로 20cm의 작은 맥북 화면으로 보는 나는 적잖이 당황한다. 그러나 포기하기에는 아직 이른 법. 나는 난해하고도 기묘한 예술의 세계를 사색하고 이해하기 위해 머지않아 온갖 의미부여를 하기 시작한다. 세상에는 포장테이프로 붙인 바나나가 1억 4천만 원에 팔리는 일도 있다. 나도 분명히 이 그림에서 무언가 큼직한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다. 나는 뚫어져라 그림을 쳐다보고 상상의 돋보기와 줄자로 그림을 여러 각도로 살펴보고 분석해 본다. 하지만 길고 빨간 바탕에 고작 선 몇 개밖에 없는 그림에 도대체 무슨 '숭고함'이 있다는 말인가? 나는 오늘도 나의 얄팍한 예술적 지식과 심미안을 한탄한다...
그러나 이러한 낭만주의적 접근법은 <숭고한 영웅>의 본질 앞에서 모래성처럼 와르르 무너져버리고 만다. 작품 해석에 아주 간단하고도 중요한 요소 하나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림의 크기. 이 그림은 자그마치 가로가 5m에 세로가 2m다. 그리고 딱 맞는 공간에 디스플레이가 되어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실제로 이 그림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 압도당하는 느낌을 받는다. 그것은 인간의 본능적 긴장감을 꿰뚫는 뉴먼 예술의 핵심이다.
리오타르는 낭만주의 미술이 “The sublime is like this”라고 제시하는데 반해 뉴먼은 “The sublime is now”으로 제시 즉, 전자에 있어서는 작품 속에서 숭고의 경험이 일어나고 있지만, 뉴먼에 있어서는 숭고의 경험은 작품을 대면한 순간 관람자에게서 일어나는 것이다(atelier-literature).
낭만주의는 기존 딱딱하던 예술의 틀을 벗어나 작가의 상상력과 개인적 의도를 중요시하는 자유로운 문화적 사조이다. 그런데 <숭고한 영웅>은 이걸 정면으로, 7톤 트럭으로 들이받는다. 그는 ‘의도된 숭고함‘ 자체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위 인용에서도 볼 수 있듯이, 뉴먼에게 있어 숭고(sublime)은 ‘The sublime is like this'의 형태가 아니라 ’The sublime is now'의 형태로 나타난다. 둘의 가장 중대한 차이점은 전자의 숭고함은 이미 작품 안에 내포되어 있다는 점이고, 후자의 숭고함은 작품을 바라보는 개체 안에 내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무척이나 흥미로운 이유는, 이러한 접근법이 숭고의 경험이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서 오는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통 압도되는 경험을 할 때, 그러니까 자연의 장대함을 목도할 때나, 우주의 아득한 크기를 실감할 때, 엄청난 감동, 그리고 충격과 공포가 내면에서 밀려오는 듯한 경험을 한다. 또한, 내가 진정으로 살아있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거대함을 통해 나 자신을 참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자연은, 그리고 우주는 그런 감정을 느끼라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결국 나서서 충격과 공포에 휩싸이고 숭고를 느끼고 눈물을 흘리고 춤을 추고... 한 것은 우리 인간이다. 정확히는 인간의 ‘본능’이다.
뉴먼의 띠는 최소한의 수단을 사용하여 관람자가 자신의 존재를 강하게 의식하게 함으로써 주관세계로 침잠하게 하는 요소로서 사용되었으며 결국 관람자의 “현존(presence)”을 자각하게 하는 것(atelier-literature)
그렇다. “현존의 자각”. 작품을 대면한 바로 그 순간 관람자에게서 일어나는 즉각적인 것. 뉴먼은 그러한 가장 1차원적이고 기본적인 경험을 우리에게 선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