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짓날엔 긴 밤과 긴 술을

일년 중 해가 가장 긴 날과 짧은 날에 마시는 술이란

by 블레어

연말답게 송년회가 야금야금 잡히기 시작했다.

빠른 건 당장 일주일을 앞두고 잡혔고 긴 건 두 달 전에 미리 잡힌 일정이 있었다. 아무래도 각자 사는 모양새가 다 다르다 보니 한꺼번에 만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니까.


개인적으로 '술을 즐기세요?'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아니요'라고 대답할 것 같다. 혼술을 즐기지도 않고 무엇보다 내 친구들 중 대다수는 술을 마시지 않는 친구들이다. 그래서 술자리가 희귀하고 술친구들이 매우 소중하다. 정말 아주 가끔가다 술 먹고 싶은 날, 한 잔 하고 싶은 날 그들에게 슬쩍 한 잔 할래? 얘기를 해야 하므로.

시작은 독서모임이었으나 엔딩은 술모임으로 마무리 됐던 모임이 3년째 이어지고 있다. 다들 각자의 자리에서 살다가 우연히 막내가 '다들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다'의 한 마디에 총알같이 달려온 언니오빠들. 그게 올해 1월이었고 어쩌다 보니 올해엔 꽤나 자주 만났다. 1월의 시작을 함께 했으니, 12월의 마무리도 함께 해줘야지.

날짜를 잡고 보니 동짓날이었다.


동지!


오늘 술을 마시면 우리는 일 년 중 가장 긴 밤동안 술을 마시게 된다.

이 얼마나 낭만스러운 술자리인가!


그냥 똑같은 날 아니야?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365일 중 해의 길이가 길어졌다 짧아졌다 하는 이 많은 날들 가운데

가장 해가 짧고 밤이 긴 날 술을 마신다는 건 꽤나 의미 있다.

몇 잔을 마시든,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오가든 그날 밤 한 이야기는

다른 날 만나 나눌 이야기보다 더 많은 밤의 시간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주종은 알아서, 주량도 알아서 각자

혼자 홀짝홀짝 마시는 것도, 그러다 눈 마주치면 '챙' 소리가 나게 잔을 부딪히는 것도, 우리는 어른이니까 알아서 합시다


가 기조인 오늘의 술자리. 스페셜 땡스 투 동짓날까지.


개인적으로 동짓날 마시는 술보다는 하지날 먹는 술을 더 좋아한다.

이렇게 말하니 마치 술쟁이 같아 보이는데 정확히 표현하자면

해가 가장 긴 날에 마시는 술의 '낭만'을 좋아한다.

아무래도 나는 낭죽낭살

낭만에 죽고 낭만에 사니까

일상 속 낭만을 잘 찾아내는 사람이니까.


모두에게 호들갑을 떨었다.

"오늘 동지야! 다들 팥죽 먹었어? 오늘 술을 마시면 일 년 중 가장 긴 밤에 술을 마시는 거야! 어때 낭만 있지!"


나의 호들갑에 다들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생각해도 가끔 나는 지나치게 낭만이라던가

감성적이라던가 그런 거러 추구할 때가 있으니까.

하지만 뭐 어떤가

가성비, 가심비, 빠른 것, 효율, 누군가 내 결정을 내려주길 바라는 이 세상에서 굳이 굳이 아날로그적이고, 낭만적인걸 찾아내는 게 내게는 너무나 즐거운 일인걸.


1차 2차 술자리를 끝내고 총총 언니네로 향했다.

포트와인에 얼음을 넣고 잘그락

부드러운 치즈에 짭짤한 감자칩을 곁들여 한 입

은근히 올라오는 취기에 잔뜩 풀어진 표정으로 헤실거리며

괜히 가볍게 툭 꺼내보는 요즘의 깊은 고민들.

달그락 거린 잔에 와인을 쪼록, 사이다를 콸콸

좀 더 달아진 맛에 한껏 취하며 보내는 동짓날의 밤.


낭만은 참 별게 아니구나 싶다.

강아지 산책을 시키다가 문득 올려다본 하늘이 다채로울 때

이 맘 때, 딱 이 계절에만 볼 수 있는 하늘의 색채를 마주했을 때

별거 아닌 술자리가 단지 동짓날, 하지날이라는 이유만으로

의미를 부여하며 괜스레 들뜨는 기분을 갖출 때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꽃다발을 건네고 친구의 해사한 웃음을 보며 나도 덩달아 웃음 질 때 그렇게 전해 듣는 ' 로맨틱해 '라는 말에

마음이 몽글몽글 피어오를 때 등등

별 거 아닌 낭만을 두고 나는 왜 멀리서 찾았나 싶다.


다시금 내년의 하지와 동지를 손꼽아 기다린다.

원래는 하지날 마시는 술의 낭만을 기다렸는데

올해 기념한 동짓날의 술자리 덕에 동짓날 역시 기다리게 됐다.


또 어떤 일상 속 낭만을 찾아볼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시선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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