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를 비난하던 어느 날

갑자기 자기 객관화가 됐다.

by 블레어

2월 1일.

1월이 끝나고 2월이 시작됐다. 드디어 이 길고 긴 설 연휴가 끝났다. 백수라 무감할 줄 알았는데 모두가 잠든 밤, 홀로 스탠드를 켜고 앉아 날것으로 써 내려간 일기에는

무감은 무슨 오만 가지 저열한 감정들로 가득했다.

분노, 질투, 열등감, 시샘, 우울, 불안, 초조 등등

부정적 감정 31로 하면 탑에 들 단어들이 일기장에 한 바닥이었다. 저주하듯 흘려 쓴 글씨체는 덤이었다.


쉬익 쉬익 대며 그래도 먹은 걸 좀 소모시켜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헬스장을 갔다.

때론 먹고 싶은 음식이 머릿속에 계시처럼 내려오는 데 그날은 서브웨이의 '이탈리아 BMT에 에그마요추가'가 내려왔다. 인터벌로 러닝머신 위를 팡팡 달리면서 '끝나고 서브웨이 가야지'만 생각했다.


서브웨이 가서 샌드위치를 사 먹고 욕심내어 잔뜩 빌린 7권의 책을 딱 한 권만 읽은 채 반납하러 간 도서관.

새해 버프 끝난 거 아니었나? 사람이 바글바글 했다. 테이블 여기저기 놓인 책을 피해 겨우겨우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조용히 노트를 꺼냈다. 전 날 밤에 저주하듯 쓰인 감정을 달래보고자 펜을 들었는데


웬걸


어제가 우울과 불안에서 비롯된 질투, 열등감, 시샘이었다면

오늘은 질투, 열등감을 비웃는 비아냥과 비난이었다.


매번 그렇게 자기 연민에 빠져 스스로를 애틋하게 여기는 거 지겹지 않냐 너 맨날 말로만 하잖아. 아가리로는 고고한 척, 세상의 지혜를 깨달은 척 하지만 너 결국 해낸 게 뭐가 있어?

지금 네 나이가 몇 살인데 모은 돈이 고작 그거야? 그래서 뭘 어쩌겠다고? 사실 부럽잖아 질투 나잖아. 백수라 무감한 척했지만 다들 떠나는 모습 보며 부러웠잖아

너 뭐 돼? 뭐가 된다고 그렇게 자꾸 아무것도 안 하고 가능성이 있는 존재에만 머무려고 해.

읽고 쓰는 거 잘하지, 근데 그래서 뭐. 그걸로 어떻게 할 건데? 맨날 용기만 모아서 뭐 할래 드래곤볼이야 뭐야 용기만 모으고 행동하지 않잖아.

생각하는 대로 다됐으면 인생이 평온했겠지. 자꾸 인생 날로 먹으려고 할래 시간을 들여야 한다는 걸 자꾸 이렇게 외면할 거야? 너 자기 계발서 읽으면서 '마치 네가 뭐라도 된 것 마냥' 분위기에 취해있는 거 알지


대충 쥔 펜으로 흘려 쓴 글씨체에 담긴 스스로를 향한 비아냥과 비난 그리고 비판.

정신 놓고 미친 듯이 썼다. 시간이 쏜살같이 지났다.


훌쩍


마음이 아파서 눈물이 날 줄 알았는데, 웬걸 외부 좌석이라 추운 공기에 콧물이 훌쩍였다.

아플 줄 알았는데 웬걸 후련했다.


'자기 객관화해야지, 메타인지 잊지 말자, 중요하다'라고 되뇌었는데 이런 식으로 될 줄 몰랐다 정말.


그렇게 스스로의 문제를 들여다봤다.


1. 1월 중순이 돼서야 회사 다녀야지 생각해 놓고 혼자 초조해하던 나

-> 입사지원 한 군데 했다. 그러고서 단박에 되길 원한 말도 안 되는 행운 바라지 말아야지

2. 나 그래도 책계정도 있고 이렇게 브런치도 있는데 왜 날 몰라봐줘! 쉬익 쉬익

-> 나처럼 자기만의 호흡과 글로 리뷰를 쓰는 사람 수두룩 빽빽하다.

브런치? 브런치 작가들이 얼마나 많은데 꾸준하게 쓰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어쩌다 가끔 쓰면서 '했다!'에 의의를 두다니 당신은 의미부여를 좀 자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3. 그래도 나 이렇게 여러 가지 경험하는 사람이야. 이것도 하고 저것도 했어.

-> 그것은 내 인생을 바꾼 하나의 계기가 된 건 사실이지만, 포트폴리오로 녹이기에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경험이자 유희'에 불구하지 않은가?

4. 그래도 내 주변에 이렇게 날 응원해 주는 사람이 많다니까!

-> 그래서 용기 모아서 뭐 할 건데, 드래곤볼 마냥 모아서 어디다 쓸건대

어디다 '써야' 그게 빛을 발하는 거지 넌 그냥 좋은 말만 믿고 안주하는 게 전부야

5. 나 그래도 매일 읽고 쓰고 운동하고 자기 계발러 아닌가?

-> 아니오 당신에게 그건 그저 습관의 일부분일 뿐, 당신은 자기 계발의 정의를 다시 세울 필요가 있습니다.

6. 헬스를 두 달이나 했는데 체중감량이 없어 아무래도 PT를 다시 받아야 했나 봐 ㅠㅠ

-> 운동 끝나고 버거킹 가서 햄버거 먹고 스타벅스가서 케이크를 먹던 당신을 기억하세요

7. 사랑하고 나누는 삶을 살 거야 love is all이라고 love wins all이라고!!!!

-> ㅇㅋ 추구하는 건 오케이지만 당신의 가장 내밀한 욕망은 그게 아니었음을 기억하세요



진짜 웃겨

나는 내가 나한테 제법 박하고 칼 같은 줄 알았는데 세상 물러터졌다.

대체 나는 어떤 때 스스로에게 박하고 칼 같았지?


와라라라라라 쏟아내고 나니 현실이 보였다.

패기 어린 마음으로 긴 성찰 끝에 내린 결론을 바탕으로 직무 전환을 시도하기엔 뭣도 없었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패기도 필요하지만 쓸모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인풋이 있어야겠지.


해낸 게 딱히 많지 않다는 사실이 새삼 와닿았다.

하지도 않고서 '가능성의 나날'만을 머리로는 믿으면서

다이어리에는 '행동하지 않고 징징대지 말기'라는 모순적인 글을 쓰던 것까지.

진짜 웃겨

너나 잘해 너나!! 너 자신이나 잘하라고!!


우와 나 진짜 가진 것도 없고 제대로 뭐 하나 해낸 것도 없구나

그럼 어떡하지



어쩌긴


'가뿐해서 뭐든 다 할 수 있지 뭘!'


인스타 스토리를 둘러보다 좋아하는 인플루언서의 무물 답변에 머리를 한 대 팡 맞은 느낌이었다.


부담 없이 시작할 수 있겠네.

해놓은 게 없으니 지금부터 하면 뭐라도 생겨나는 거네.

음 오케이 그럼 해볼까.


뭘 해야 하지? 뭘 하는 게 좋을까, 어떤 행동을 해야 할까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가 생각났다.

"스스로에게 어려운 방향으로 향하라"는 메시지가.


내게 어려운 방향, 평소의 나라면 안 할 것 같은 것. 그것은 바로 디자인 툴 배우기 현 노트북으로는 돌아갈 것 같지 않아 포토샵과 일러트스레이터를 제쳤다.

피그마와 미리캔버스 중 고민하다가 챗GPT에 물어보며 장단점, 현 노트북 사양으로 두 개가 무사 구동되는지를 물어봤다. 속전속결로 문제가 해결된다.


그렇게 갑자기 미리캔버스에 회원가입을 하고 이것저것을 누르며 생에 첫 디자인을 냈다.


그리고 기록들을 엮어 나가기 위해 블로그를 새 단장했다.

쓰고 결심하고 행동한 지 24시간 만에 일어난 일.


역시, 실행 없는 배움과 문장은 산산이 부서질 뿐이구나.


그리고 이건 나의 실행에 대한 기록들이 쌓일 곳 https://blog.naver.com/somm_archive



사주를 봤는데

올해 나 진짜 잘된다고 했다.

근데 잘 되고 싶으면 계획을 '잘 세워서 잘 움직이고 행동하랬어'.


그래서 2월은 1월과 달리 보내려고 한다.

2월의 테마는 어제보다 오늘 한 개 더 배우기


명수 옹이 그랬지.

중요한 건 꺾여도 그냥 하는 마음이라고.


마침 빅뱃에서 그랬다. 새로 시작할 시기를 직접 설정하여 의미를 부여하라고

새해 버프를 다 떨쳐 보낸 지금, 새로운 시작점이 생겼다.

입춘. 봄이 들어온다니, 이렇게나 찬란하고 따뜻한 단어을 손에 쥐고 시작한다.


레쮸고

작가의 이전글들어내야 새로 채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