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회색빛이었다.
꿈을 이룬 뒤에 나는 무엇을 향해 나아가야 하나.
책을 냈다. 책 표지의 저자 이름들 가운데 내 이름이 있다. 순식간에 써 내려갔던 세 개의 글, 내가 나를 소개했던 소개 페이지, 후기까지. 그 모든 글들이 한 데 모여 한 권의 책이 됐다.
잊으래야 잊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하고 심장이 떨렸던 일이었다.
왜냐면 어릴 때부터 나의 꿈은 '작가'였기 때문이다.
그 꿈은 초등학생으로 돌아간다. 어릴 때 나는 정말이지 지독하게 내성적인 아이였다. 동시에 의욕이 넘치는 아이였다. 선생님이 날 봐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가득하면서도 혹시라도 날 시킬까 덜덜 떨었던 아이. 소심하고 내성적이었던 내 친구는 책이었다. 나는 쉴 새 없이 책을 읽었고 또 책을 좋아했다.
학교에서 열렸던 글짓기 대회에서는 나가기만 하면 상을 타고 돌아왔다. 그런 내 작은 재주를 알아봐 주는 선생님들이 몇 분 계셨다. 그들은 내게 '글을 정말 잘 쓴다'라고 칭찬을 해주었고 나는 그 문장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 '작가'가 되고 싶었다.
"엄마 나 작가 되고 싶어"
"그거 돈 못 벌어"
작가가 되고 싶단 내 말에 엄마는 차갑게 말했다. 엄마는 기억 못 하겠지만, 나는 그날의 분위기와 집안의 온도를 기억한다. 어쩐지 서늘했던 집안의 온도. 등 돌려 누운 엄마에게 재잘재잘 말했던 꿈이 바사삭 부서진 순간들까지. 그 이후 나는 엄마에게 뭐가 되고 싶단 얘길 안 했던 거 같다. 학창 시절 장래희망은 언제나 안전한 것들을 써 내려갔다. 이를테면 교사, 공무원, 외교관. 하지만 단 한 번도 내 심장을 설레게 한 적은 없는 그런 단어들.
그리고 나는 평범한 직장인이 되었다.
하나도 감사하지 않으면서도 '감사합니다'로 마무리를 하는 메일을 쓰는 평범한 직장인이.
작가 혹은 글쓰기를 향한 나의 구질구질한 짝사랑은 끝날 줄 몰랐다. 굳이 책을 내야만 작가인가? 그냥 쓰는 사람은 모두 작가 아니겠어? 하는 마음으로 혼자 쓰고 또 썼다.
어떤 날엔 일기를 썼고, 어떤 날엔 취준생활을 겪으며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썼고, 잊지 못할 하루도 썼고, 남들에겐 내비칠 수 없는 마음에 대해서도 썼다. 대상이 무엇이든 간에 나는 끊임없이 썼다.
그렇게 쓰고 또 쓰는 이에겐 기회가 오는 걸까, 우연히 원고 공모전을 보았다.
원고의 주제가 마침 내가 자주 하던 일 중 하나라 나는 큰 기대 없이 그 자리에서 원고를 후루룩 써서 보냈다. 게시글에 내 이름이 있었다. 동명이인일 거라고 생각하며 침을 삼켰다. 메일이 왔다. [작가님]이라고 나를 불렀다.
나는 작가가 됐다.
책이 나왔다. 인세도 받았다. 그리고 나는 허무해졌다.
그러니까, 작가는 내가 아주 먼 훗날에나 이룰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꿈이었다.
내가 4~50대가 되었을 때, 지금 보다 더 많은 삶을 경험했을 때 겨우 이룰 거라 생각한 꿈.
그렇지만 이건 내 생각보다 더욱 빨랐다. 인생이 변수로 가득하고 제 뜻 대로 되는 거 하나 없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올해라니. 너무 일렀다. 기쁨보단 당혹감이 더욱 컸다.
그리고 여전히 나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 내가 책을 냈어? 내가 저자로 올라가 있어? 내가?
나 뭔데.
주변에서 어떠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고 그럴 때마다 나는 꽤 회색빛 표정으로 답했다.
"내 예상보다 빨라서 얼떨떨하고, 그래서 오히려 방황하고 있어"
누군가는 그걸 배부른 소리라고 할 것이다. 그토록 바라던 것을 이루었는 데 기쁘지 않냐고
그렇지만 내게 그건 어릴 때부터 갖고 있던, 숨죽여 말했던 꿈이었다.
누군가 꿈이 뭐냐고 물어보면 '부자 되는 거요, 행복하게 사는 거요'라고 얼버무리며 숨겨왔던 꿈이었다.
큰 소리로 말하면 그대로 사라질까 봐 두려워 작은 목소리로 겨우겨우 말할 수 있었던 꿈이었다.
그건 내 동경이고 꿈이고 나아갈 방향이고 되고 싶은 나였고, 닿고 싶은 미래였다.
방향을 잃어서 오히려 나는 허무해졌다.
공허가 찾아왔다.
다들 이제 네 이름으로 에세이를 내면 되지 않느냐고 나를 북돋아줬지만 어쩐지 와닿지 않았다.
그러게, 이제 그럼 되겠다 대답하며 웃었지만 여전히 씁쓸했다.
어떤 꿈은 이뤄지면 기쁨보다 조금의 슬픔이 오기도 하는구나.
꿈이란 단어엔 무지갯빛의 찬란함만 있는 게 아니구나
그곳엔 회색빛의 공허도 있구나.
그럼 나는 이제 무얼 향해 나아가야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