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때 아니면 안돼!', 란 건 없을지도 몰라

유럽여행과 나이에 관하여

by 블레어

블로그를 둘러보다 친구의 글에서 멈췄다.

신혼여행으로 다녀왔던 유럽 이야기를 쓴 글이었다.

부서지는 햇살 속에서 예쁜 자줏빛의 와인을 마시며 해사하게 웃는 그들이 예뻤고 부러웠다.

이국적인 풍경이 주는 생동감, 유독 뜨겁다던 유럽의 햇빛을 나도 느껴보고 싶었다.

부러움도 잠시, 일상은 이어졌고 나는 금새 그 감정을 잊었다.



애정하는 풍향고2를 보던 토요일 오전,

흔히 유럽여행을 떠나야한다는 나이와 훌쩍 멀어진 그들이 유럽에서 깔깔 웃으며 고군분투하는 과정을 쭉 지켜봤다.

흐드러지는 야경을 보며 감동받아하고 꼭 다시와야지 다짐하는 것,

입에 맞지 않는 음식에 어색해 하면서도 풍경속에 있음에 기뻐했다.


2시간이 채 안되는 러닝타임 내내 내 머릿속엔 '이 나이 아니면 안돼'라는 건 없구나 였다.


30대 초반을 지나가는 나는 타임라인에 스탬프를 찍는 과업들에 굉장히 진지했다.

20~29 / 30~ 39 / 40~ 49 그리고 죽기 전까지

10살이라는 큰 단위 아래 세밀하게 찍힌 1살 단위에는 각 나이마다 해결하고 이뤄내야 할 성취, 과업, 목적들이 가득했다.

지금 내 나이엔 필연적으로 결혼을 해야하며 임신과 출산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진행해야 했다.

어느정도 자산을 모아두고 직업 커리어를 발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되 가정에도 충실해야 했다.

해내지 못했을 시엔 '뒤처짐' '캥거루족' 등 여러가지 단어로 불렸고 그건 곧 도태를 상징했다.


남들 다 가봤다는 유럽여행을 이제와서 가자니 두려움이 앞섰다.

시간을 낼 수 있을까? 다녀와도 괜찮은걸까? 나는 도태되지 않을까?

불안감이 앞섰고 신혼여행으로나 갈 수 있겠다, 하는 체념이 앞섰다.


좌충우돌 그들의 유럽 여행기를 보며 여행에 필요한건 완벽한 나이가 아닌

여유와 마음가짐이었다. (물론 시간과 돈도 중요하지만)

20대의 유럽여행과 20대 이후의 유럽여행은 확연히 다를 것이다.

물론 20대처럼 새파랗게 젊은 체력은 아니겠지만

낯선 여행지에서의 설렘은 같지 않을까?


느끼게 될 감정의 프리즘은 더 선명하고 넓게 펼쳐지지 않을까?


숫자가 주는 강박은 꽤 어마무시해서 나는 자주 그 강박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해내지 못했다는 사실에 스스로를 비난하고 자책했다.


긴 삶의 여정 가운데 반드시 해내야 할 과업같은 건 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증명하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니라 그냥 태어났을 뿐이니까

그냥 살아가면 될 인생에 너무 많은 과업을 지고 의무감으로 살고 싶지 않다.


곱게 접어두었던 꿈을 다시 꾼다.

그 때 못했으니 앞으로 못할 것이란 명제를 지운다.


그토록 뜨겁다는 유럽 햇살 아래 선글라스를 끼고 자유롭게 거리를 걸어다닐 날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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