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걸 늦바람이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세 번째 모임 : 일이 있어서 못 나갈 것 같아요.

by 블레어

생각보다 재밌고 즐거웠던 두 번째 모임이 끝났다.


숨 끝에 아른거리는 소주 냄새가 어지러웠다. 이렇게 마셔본 게 언제더라. 나는 그날 무슨 이야기를 했었지. 실수한 건 없었는지, 술에 취해 무례한 행동은 하지는 않았는지 곱씹어 보았지만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원래 술자리 후 머리를 쥐어뜯으며 곱씹어보나? 필름이 끊겼다고 하기엔 어딘가 부족했다.


다음부터는 좀 적당히 마셔야지. 그게 두 번째 모임 후 짧은 소감이었다.


세 번째 모임에는 나름의 테마가 있었다.

각자 자신만의 이야기가 담긴 '술'을 가져오는 것.


나만의 이야기가 담긴 술이라. 29년을 살면서 내게 스토리가 있는 술이 있던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대학교 새내기 시절 처음 마셨던 공업용 알코올 느낌의 소주?

20대 초반, 비율 상관없이 누구 하나 죽어야 끝나던 술자리에서의 소맥?

호기롭게 보드카 한 병을 시켜놓고 돌아가며 화장실 가서 토하고 나오던 보드카?

전 연인과 썸 탈 때 떨려서 잔뜩 마셨다가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아요'라고 했던 칵테일?

친구와 둘이 김치전을 부쳐먹으며 곁들이다 나 혼자 취해서 누워있었던 막.사?

추석 명절 단기 아르바이트에서 안면을 텄던 옆 와인 코너 언니가 추천해준 내 첫 와인 모스카토 다스티?


꽤나 다양한 주종을 마셔봤음에도 불구하고 적재적소에 어울리는 나만의 술 같은 건 갖고 있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생각보다 내 친구들 중에 주당은 아무도 없었으며 술을 즐기는 이들이 극소수였기 때문이다.

보통 친구들을 만나면 밥 - 카페 - 구경 or 나들이였으며 술을 마셔봤자 맥주 한두 잔 정도였다.


오히려 술은 회사 다니면서 회사 내 친해진 동료들과 마시는 게 많은 수준이었고, 퇴사 후에는 일 년에 한두 번 마실까 말까 할 수준이었다. 싫어하는 건 아니었으나 '굳이?'가 내 음주 스타일이었다.


그래서일까, 딱히 '술'에 대해 대단히 좋은 기억도 나쁜 기억도 없을뿐더러 '술'로부터 위로를 얻었던 순간도 없었고 기쁨을 얻었던 순간도 없었다. 다들 각자만의 스토리가 있는 건지 뭔지 궁금했지만 아무리 단톡에 이야기를 흘려보아도 다들 이렇다 할 대답이 없었다.


얼어 죽을 완벽주의는 이런 데서도 흘러나왔다. 구면이었으나 사실상 초면에 가까웠기에, 아직은 낯을 가렸으며 '이미지'를 챙기는 시기였다. 이 모든 것의 콜라보는 스스로에게 스트레스를 안겨주었다.


대체 뭘 가져가야 하지. 내게 스토리가 있는 술이 있나? 나만의 이야기가 담긴 음식이 있던가?

나만이 아이덴티티를 표현할 수 있는 무언가가 내게 있던가?


고민하면 고민할수록 스트레스와 압박감이 점점 나를 짓눌렀다. 당시에는 회사 생활로 인한 스트레스 역시 굉장했던 시기였다. 입에 욕을 달고 살았고 미간은 항상 찌푸려져 있었으며 온갖 성질을 다부리며 살았다.

회사 생활조차 버거웠는데, 단순하게 생각했던 모임조차 스트레스라니. 진지하게 탈퇴를 고민했다.


탈퇴하면 환불금액이 얼마 안 된다기에, 이 모임을 가입하는데 들인 돈이 있었기에 나는 고민하다 리더에게 갠톡을 보냈다.


'안녕하세요 OO님. 저 이번 모임에는 일이 있어서 못 나갈 거 같아서 연락드렸어요.'


그렇게 나는 처음으로 세 번째 모임을 빠졌다.



모임을 빠지고 다짜고짜 친구를 찾아갔다. '야 너 시간 되냐' 한마디와 함께.


서로 울분을 토하고 욕을 하기도 했으며 아무 말 대잔치가 주를 이루기도 했다. 이 시간이 문득 너무 재밌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어색함을 견디며 침묵을 깨기 위해 이야기를 리드한다. 누구도 시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낯을 가리지만 나보다 더 낯가리는 이들을 보는 게 더 불편해 애써 '인싸'를 자처하는 것. 그렇게 기빨리듯 소진되고 나면 공허함이 온몸을 맴돈다. 공허하다가도 나를 찾는 눈빛이나 이야기에 귀를 쫑긋거린다.

사람을 좋아하면서도 대규모 인원이 모이는 건 낯설어하는 모순.

잘 지내는 듯 하지만 생각보다 곁을 내주지 않는 것.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유도하고 잘 들어주면서 정작 내 얘기는 잘하지 않는 것까지.

페르소나를 갈아치우고 나면 기가 한껏 빠진다. 너덜너덜 해진 채로 돌아가다 순간순간 내게 보여준 다정과 애정에 다시금 이 모임을 찾는구나 생각한다.


생각보다 내가 외로웠던 걸까, 사람이 그리웠던 걸까, 아님 그냥 나도 사람을 좋아하는 걸까.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스스로에게 혼란과 질문거리를 던져주었던 세 번째 모임도 그렇게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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