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제국사: 통합과 차이의 정치학

분기점: 분열의 세계를 읽는 눈

by 소묘

"세계제국사"(원제: Empires in World History)는 전통적인 역사 서술에서 흔히 다루는 '제국에서 국민 국가로의 전환'이라는 분류를 넘어 세계사의 제국들을 심층적으로 탐구한다. 이 책은 제국들이 수천 년 동안 어떻게 사회와 국가를 형성하고, 야망과 상상력을 고취했으며, 정치적 가능성을 열고 닫았는지 보여준다.


서문 및 1장: 제국의 궤적


이 책은 저자들이 아프리카의 영국 및 프랑스 식민 제국과 러시아 및 소비에트 제국의 역사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미시간 대학교와 뉴욕 대학교에서 '제국과 정치적 상상력' 강좌를 진행하며 시작되었다. 저자들은 역사학자와 정치 이론가들 사이에서 진행 중인 많은 논쟁을 배경으로 삼으며, 현대 국민 국가의 '정상적이고 보편적인' 주권 경로라는 개념에 묶여 있는 오해를 피하고자 한다.


제국은 "새로운 사람들을 통합하면서도 구별과 계층을 유지하는, 확장적이거나 공간적으로 확장된 권력의 기억을 가진 거대한 정치 단위"로 정의된다. 이는 단일한 영토 내 단일 민족을 기반으로 하는 국민 국가와 대조된다. 제국은 내부의 다양한 인구의 비동등성을 선언하는 반면, 국민 국가는 사람들의 공통성을 선포하며 동질화를 추구한다.


제국은 본질적으로 다양한 집단을 통합하고 포용하는 유연한 능력을 지녔으며, 이는 급변하는 세계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책은 제국이 권력을 확장하고 통치하는 방식에서 다양성을 어떻게 활용했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이는 문화적 인정 이상의 광범위하고 중립적인 의미에서의 '차이의 정치학(politics of difference)'을 의미한다. 이 '차이의 정치학'은 동질화와 차이 인정이라는 스펙트럼의 양 극단을 완벽하게 실현한 적은 없지만, 각 전략과 그 혼합의 결과를 숙고하게 한다.


저자들은 17세기에 유럽인들이 잠재적으로 국민적이고 분리된 국가들의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었다고 가정하는, 주권의 근본적인 재정의에 대한 주장에 회의적인 시각을 보인다.


2장: 로마와 중국의 제국 통치


로마 제국


로마는 통치하는 지역과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제도를 조정했다. 왕 대신 두 명의 집정관을 두었으며, 법의 원천은 '로마 인민'과 그들의 선출된 대표자들이었다. '임페리움(imperium)'은 처음에는 왕의 권력을 의미했으나, 나중에는 '지배할 권리'를 의미하게 되었다.


로마의 행정 시스템은 '관료제 없는 정부'라고 불렸다. 대부분의 권력은 프라이토르(praetor)나 집정관과 같은 단일한 권위자의 손에 있었으며, 소수의 조수들만이 보조했다. 통치의 주요 목적은 세금 징수와 군대 징집이었다. 옥타비아누스(카이사르의 양아들)는 자신을 로마 최초의 황제로 만들었으며, 상위의, 종신적인, 합법적인 권위를 가졌다. 그는 '아우구스투스(Augustus)'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공화정은 '프린키파투스(principate)'라는 새로운 종류의 정부로 대체되었다.


로마법은 통치의 수단이자 사회 질서의 지지대였다. 6세기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 의해 단일한 법전으로 집대성되었다. 로마는 다른 문명의 요소를 모방하고 통합하며 발전시켰다. 카라칼라 황제의 212년 시민권 확대는 필요성의 조치로 해석될 수 있는데, 이는 제국의 모든 자유민 남성을 시민으로 만들어 군대에 징집하고 상속세를 부과할 수 있게 했다. 이 확대는 종교적 결속에도 초점을 맞췄다.


중국 제국 (진(秦)과 한(漢) 왕조)


진 왕조는 기원전 221년에 강력한 중앙집권적 제국을 세웠다. 진은 많은 언어를 사용하는 지역에서 사용되는 간소화된 문자를 만들고, 새로운 황제 화폐를 발행하며, 통일된 도량형을 사용함으로써 회계와 통신을 용이하게 했다. 상앙(Shang Yang)의 개혁은 주권자, 그의 법, 그리고 규제된 사회라는 세 가지 기둥에 기반한 정치 시스템을 강화했다. 그는 인민 스스로가 감시 시스템을 통해 법을 집행하도록 제안했다. 이러한 '현대적' 통치 방식은 진나라에 의해 기원전 3세기에 완성되었다.


한 왕조의 창시자인 유방(Liu Bang)은 진나라의 엘리트 예속자 소외로부터 교훈을 얻어 덜 중앙집권적인 행정 방식을 채택했다. 그는 유교(Confucianism) 사상을 통치 이념으로 삼아 사회 질서를 강조했다. 한 왕조는 로마와 달리 거대하고 복잡하게 조직된 관료 집단이 제국 권력에 중요했다. 황제는 귀족이 아닌 지주들의 아들들 중에서 관리를 선발했으며, 124년에는 통치 기법과 유교 이념을 훈련시키기 위한 제국 학술원을 설립했다. 중국 제국은 유목민들과의 관계에서 전쟁과 결혼 동맹이라는 두 가지 기본 형태를 취했다.


3장: 로마 이후: 제국, 기독교, 이슬람


비잔틴 제국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24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제2의 수도로 세웠으며, 이는 비잔틴 제국의 시작이었다. 비잔틴 제국은 로마의 핵심 제도(군대, 관료)와 조세 관행을 유지했다. 비잔틴 제국의 기독교 정교는 제국의 정치에 혁신적이고 적응력 있는 방식으로 녹아들어 거대한 공간에 조직적, 이념적 유대를 형성했다. 황제의 권위는 유일한 신에 대한 헌신으로 보완되었다. 황제의 통치는 보상과 처벌 능력, 관료제의 예측 가능한 규제 적용, 그리고 지역 엘리트들의 제국 보호를 통한 상호작용이라는 세 가지 균형에 의존했다.


이슬람 제국


이슬람은 비잔틴 제국이 흔들리던 시기에 탄생했다. 초기 무슬림들은 공동체 내 높은 수준의 동질성과 평등을 열망했으며, 이는 부족 간의 분쟁과 씨족 지도자들의 폭정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무함마드가 건설한 정치체는 단일한 종교 공동체라는 개념에 기반했다.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Sharia)와 종교 교리는 점진적으로 발전하여 소속의 최소한의 요건을 충족시켰다. 움마(Umma)가 확장되면서, 칼리프의 성격과 종교적 지도자 및 백성의 통치자로서의 역할에 대한 논쟁이 빠르게 발생했다.


우마이야 왕조(Umayyad dynasty)는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 수도를 두었으며, 아바스 왕조(Abbasid dynasty)는 750년에 새로운 왕조를 세워 바그다드를 수도로 삼았다. 아바스 왕조는 노예 출신의 고위 관리와 장군들을 활용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단일한 신을 숭배하는 단일한 공동체가 단일한 제국을 건설하는 것으로 시작된 이슬람은 결국 다중적인 제국 권력의 중심지로 변모했다.


4장: 유라시아 연결: 몽골 제국


칭기즈 칸은 유라시아 전역의 유목민 부족들을 통합하여 몽골 제국을 건설했다. 그는 '텐그리(Tengri, 하늘의 최고신)'로부터의 통치 권한을 내세웠다. 칭기즈 칸은 부족 간의 유대를 단절하고, 개인적인 충성을 강력하게 집행하여 자신의 권력을 강화했다. 몽골 제국은 칭기즈 칸과 그의 후계자들의 군사적 성공을 통해 빠르게 확장되었다. 몽골은 정복한 지역에서 현지 귀족과 성직자를 그대로 통치자로 남겨두는 전략을 사용했다. 그들은 인구 조사를 실시하고 조세를 징수하며, 효율적인 통신망(얌(yam))을 구축했다.


몽골 제국은 종교적 다양성을 인정했다. 이는 기독교, 이슬람, 불교, 그리고 토착 종교들이 공존할 수 있게 했다. 그들은 종교 기관을 보호하고, 성직자들에게는 세금 면제 혜택을 주었다. 칭기즈 칸 사후, 제국은 몇 개의 칸국(Khanate)으로 나뉘었지만, 여전히 유라시아 전역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했다.


5장: 지중해 너머: 오스만 제국과 스페인 제국


이 장은 제국적 권력을 조직하는 두 가지 방식인 가산제적 통치(patrimonial rule)와 계급 위계적 통치(class hierarchy model)를 대조하며 오스만 제국과 스페인 제국을 분석한다.


스페인 제국


스페인 제국은 카스티야와 아라곤이 연합하여 대서양으로 진출하며 시작되었다. 카나리아 제도와 같은 인근 대서양 섬들을 식민화하고, 사탕수수 재배에 아프리카 노예 노동을 체계적으로 활용했다. 스페인 제국의 재정은 외부 자본에 크게 의존했으며, 군주국의 부채는 주로 유럽 영토 방어에서 비롯되었다. 아메리카에서 유입된 막대한 금과 은은 이베리아 반도를 거쳐 네덜란드와 독일로 흘러갔다. 왕실 수입(royal fifth)은 유럽과 해외 영토 방어에 사용되었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하느님과 폐하를 섬기고, 어둠 속에 있는 자들에게 빛을 주고, 또한 부자가 되기 위해" 왔다고 선언했다.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는 원주민 아메리카인들을 "문명화된 행동"과 "인간성"을 지닌 존재로 보고, 그들의 문명적 지위를 인정하며 제국의 신민으로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페인 왕은 군주 직속의 사법 및 행정 기관인 아우디엔시아(audiencias)를 통해 멀리 떨어진 영토에 대한 통제를 유지하려 했다. 초기 엔코미엔다(encomienda) 시스템은 원주민을 특정 스페인인에게 할당하여 노동력과 공물을 받게 했으나, 이후 세금 징수로 전환되었다. 스페인 제국은 계급 위계 모델을 따랐는데, 이는 신민이 군주와 수직적 관계를 맺고, 귀족은 특권을 유지하는 방식이었다. 스페인 제국의 형태는 로마 제국의 전통, 특히 서유럽 지역이 분리되었던 방식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로마의 권력은 흡수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지만, 후기 제국은 모든 영토에서 식별 가능한 단일한 로마 문화를 만들어냈고 이는 엘리트들에게 설득력이 있었다.


오스만 제국


튀르크계 셀주크 제국과 다양한 부족 지도자들의 영향 속에서 오스만 왕조가 형성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카간(khaqan)의 이상, 즉 천국의 축복과 법을 제정하는 지도자의 개념을 받아들였으며, 전략적인 외혼 정책과 유동적인 동맹 및 종속 관계 정치를 활용했다. 술탄은 자신을 이슬람의 수호자이자 다른 모든 무슬림 군주보다 우월하다고 칭했다.


술탄은 의도적으로 오스만 사회 외부에서 모집된 하급자들을 자신의 가신으로 편입시켜 통치했다. 이는 이슬람 금기를 어기면서까지 술탄의 병력으로 충원된 예니체리(Janissaries)를 포함한 데브쉬르메(devshirme) 시스템(술탄의 봉사를 위해 기독교 소년들을 징집)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는 술탄에 대한 개인적 충성도를 확보하기 위한 혁신적인 해결책이었다. 술탄 즉위 시 다른 아들을 처형하는 왕조 내 형제 살해를 "세계의 좋은 질서"를 명분으로 정당화하는 법을 제정하기도 했다.


오스만 제국은 종교적으로 정의된 공동체들(millets)이 자체적인 법적 문제를 해결하고 지도력을 행사하도록 허용했다. 이는 술탄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세금을 내며 평화를 유지하는 한에서 가능했다. 이는 실용적인 포용성을 특징으로 했으며, 이슬람 법과 제국 법의 미묘한 결합, 그리고 영구적인 가족 권력으로부터 분리된 관료제를 기반으로 했다. 오스만 제국은 아나톨리아에서 지배적이었던 하나피 학파의 수니 이슬람 법을 채택하고, 이 전통에 따라 판사를 양성하는 학교 시스템을 구축했다. 또한, 오스만 제국 영토 내 외국인 공동체에 자체 법률 적용 권한을 부여하는 치외법권(extraterritoriality)을 인정했으며, 이는 비잔틴 제국의 관행에 뿌리를 두고 유럽의 국제 관행에도 영향을 미쳤다.


스페인과 오스만 제국의 비교


오스만 제국은 술탄에게 수직적으로 연결된 관리들이 이질적인 공동체를 통치하는 가산제적 모델을 따랐다. 반면 스페인 제국은 계급 위계 모델을 따랐다. 술레이만 대제는 거의 9만 명에 달하는 상비군을 보유하며 강력한 중앙집권적 군사력을 과시했던 반면, 카를 5세는 유럽 영토에서 귀족들의 병력 지원에 의존해야 했다.


두 제국의 대조는 통치자들이 직면한 광범위한 문제와 그에 대한 다양한 해결책을 보여주며, 실제 정치 시스템의 복잡한 작동 방식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이상형"을 제공한다.


6장: 해양 경제와 식민 사회: 유럽, 아시아, 아메리카


이 장은 15세기부터 18세기까지 유럽의 해외 팽창과 그것이 전 세계 경제 및 사회에 미친 영향을 다룬다. 특히, 본국 내 사회적 긴장이 어떻게 해외 경제적 이니셔티브로 이어졌는지를 탐구한다.


포르투갈 제국


포르투갈 군주는 본국의 귀족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해외 영토, 네트워크, 수입에 대한 통제를 유지하려는 시도에서 해외 진출을 후원했다. 카나리아 제도에서 시작하여 브라질 북동부 사탕수수 지대로 확장되었으며, 노예 획득이 체계화되었다. 브라질은 거의 3세기 동안 세계 최대의 노예 구매지였다. 교황 칙서 해석에 기반하여 독점, 관세 부과, 통행증 발급, 사법권 행사를 정당화하는 "해양의 주권자" 이론을 내세웠다. 포르투갈은 봉건적 위계질서보다는 술탄 통치 하의 실용적 포용성을 강조한 오스만 제국과 유사한 가산제적 전략을 채택했다. 국왕이 관직을 할당하고, 식민지 거점의 엘리트들이 후원 네트워크의 중심이 되었다. 아시아에는 소수의 행정관과 병력만 주둔한 식민 거점 제국(enclave empire) 형태였다.


네덜란드 제국


17세기 초, 군주제가 아닌 부유한 상인 엘리트와 상업 회사(VOC)에 의해 시작되었다. VOC는 자체적으로 평화와 전쟁을 선포하고, 정의를 집행하며, 식민지를 건설하고, 요새를 구축하고, 군대를 유지하며, 심지어 화폐를 주조하는 "일종의 주권과 지배권"을 가진 절대적인 존재로 묘사되었다. VOC는 현지 통치자들에게 핵심 수출품의 독점권을 강요하고, 주민들이 더 많은 후추와 향신료를 재배하도록 압력을 가했으며, 회사 노동력을 공급하게 했다.


스페인 아메리카 (재론)


코르테스 군대의 병사였던 베르날 디아스(Bernal Diaz)는 "하느님과 폐하를 섬기고, 어둠 속에 있는 자들에게 빛을 주고, 또한 부자가 되기 위해" 정복했다고 밝혔다. 피사로(Pizarro)는 "나는 종교적 이유로 온 것이 아니다. 나는 그들의 금을 빼앗으러 왔다"고 말했다. 스페인 남성 침략자들은 원주민 엘리트의 딸들과 혼인하거나 자손을 남기면서 메스티사(mestizaje)(혼혈) 과정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는 단일한 히스패닉 문화를 형성하지 못하고, 스페인과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 고위층 엘리트, 저지대 농장의 노예, 고원 지대 공동체의 농민, 국경 지대의 개인주의적인 목축업자 등 단편적인 사회를 형성했다. 스페인 제국 전체의 자금 조달은 주로 스페인 외부의 자본에 의존했다. 아메리카의 금은 광산에서 벌어들인 막대한 수입의 대부분은 이베리아 반도를 거쳐 네덜란드와 독일로 흘러갔다.


잉글랜드 아메리카 (초기 식민지화)


버지니아 컴퍼니(Virginia Company)와 같은 왕실 인가 회사(royal charter company)를 통한 사적 이니셔티브로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왕실이 "통치권(imperium)"이 아닌 "소유권(dominium)"만 부여했다. "자유로운 잉글랜드인(freeborn Englishmen)"이라는 이상이 있었지만, 아프리카인들에 대한 급진적인 인종적 배제가 동시에 이루어졌다. 영국 국가는 넓은 영토와 강력한 경쟁자들에 맞서 싸우면서 상당한 통치 수단을 발전시켰다.


제국 간 상호작용과 법


오스만 제국은 외국인 공동체에게 자체 법률에 따라 통치될 권리를 부여하고, 다른 국가에 파견된 대사 및 대사관 보호를 주장하며 유럽 국가들의 국제 관행에 영향을 미쳤다. VOC와 동인도 회사가 경쟁하는 상황에서 휴고 그로티우스(Hugo Grotius)는 "바다의 자유(Freedom of the Seas)"라는 논문을 발표하며 국제 해상법 발전에 기여했다. 외교와 법은 동등한 국가들 간의 관계를 규제하기보다는 매우 불평등한 세계에 정당성과 질서를 부여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제국은 항상 다른 사람들을 다르게 통치하는 것을 의미했으며, 아메리카의 제국들은 "차이의 정치"가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명시적인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7장: 초원 너머: 러시아와 중국의 제국 건설


이 장은 러시아와 중국이라는 두 대륙 제국의 건설 과정을 추적하며, 특히 유라시아 초원 지대의 정치적 전통과 그것이 각 제국의 형성에 미친 영향을 강조한다.


키예프 루스 (Kievan Rus')


북유럽인인 루스족(Rus')이 9세기 후반 키예프에 정착하여 국가를 형성했다. 이들은 동방 기독교(정교회)를 국교로 채택했는데, 이는 화려한 의례와 건축물을 가진 비잔틴 제국의 제국적 권력 강화 방식을 모범으로 삼은 결과였다. 몽골의 지배 하에 있으면서 루스 교회는 몽골 칸들의 보호를 받았고, 교회 지도자들은 칸들을 위해 기도했다. 키예프의 중요성이 줄어들면서 정교회 교계는 모스크바로 이전했다.


모스크바 러시아 (Muscovite Russia)


다닐로비치(Daniilovichi) 가문의 모스크바 공작들은 몽골 칸의 충성스러운 신하로서 세력을 키웠다. 모스크바는 점차 핀족, 슬라브족 등 다양한 민족과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포함하는 다민족적, 다종교적 제국으로 확장되었다. 아스트라한(Astrakhan) 칸국을 합병하여 볼가 강과 아시아 초원 경로를 연결하는 중요한 지점을 장악했다. 러시아 통치의 대부분 역사는 가산제적 원칙, 즉 통치자가 모든 자원의 궁극적인 소유자이며, 엘리트들에게 땅과 주민을 조건부로 부여하여 충성과 봉사를 대가로 삼는 방식을 따랐다. 이는 단일한 귀족 계층이 형성되는 것을 막는 데 기여했다.


이반 4세(Ivan IV)는 1547년 차르(Caesar)라는 새로운 칭호를 사용하여 자신을 로마의 과거와 연결하고, 전제군주가 이끄는 기독교 공동체의 이미지를 구축했다. 이반 4세는 "토지 회의(Council of the Land)"를 소집하여 모든 신민이 차르에게 명예와 복지를 보호받을 권리를 법으로 제정했다. 표트르 대제(Peter the Great)는 "원로원(senate)" 설립, "과학 아카데미" 창설, "계급표(Table of Ranks)" 사용 등 로마식 행정 개혁을 단행하여 강력한 제국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는 가산제적 원칙이 계급 원칙을 이긴 사례였다.


원 왕조 (Mongol rule in China)


몽골은 탕구트(Tangut), 금(Jin), 송(Song)을 정복하여 중국을 재통일하고 그 영향력을 크게 확장했다. 원 왕조는 몽골과 중국 방식을 혼합하여 사회적 지위를 강력히 구분했으나, 제국의 새로운 우선순위에 따라 재편했다 (예: 몽골 전사들이 가장 높은 지위). 제국 전체를 중앙에서 임명된 관리와 군 사령관이 다스리는 성(province)으로 나누어 통치했다. 유목민 전사들에게 보상을 제공하고, 종교를 전략적으로 보호하는 정책을 적용했다. 쿠빌라이 칸(Khubilai Khan)은 티베트 라마인 팍스파(Phags-pa)를 보호하며 그를 보편적인 불교 통치자로 선포하고, "라마-후원자" 시스템을 통해 정치적 종속을 대가로 종교적 권위를 지원했다.


명 왕조 (Ming Dynasty)


원 왕조 멸망 후, 명 왕조는 수도를 남쪽인 난징(Nanjing)으로 옮기고 몽골이 통제하던 대륙 횡단 무역을 중단하며 과거 원 왕조가 거의 포기했던 과거 시험 제도를 부활시켰다. 원 왕조 하에서 번성했던 활기찬 도시 문화는 명 왕조에서 학습과 창의성의 역동적인 혼합으로 발전했다. 엘리트들은 편안한 주택, 세련된 요리, 그림과 시를 논하며 풍요로운 생활을 누렸다.


청 왕조 (Qing Dynasty)


여진족(Jurchens)이 만주족(Manchus)으로 이름을 바꾸고 청 왕조를 세웠다. 팔기군(banner system)은 군인 가족을 별도의 부대로 조직하여 이전의 혈족 집단을 해체하고 황제에게 여러 군대에 대한 직접적인 연결 고리를 제공했다. 이는 칭기즈 칸(Chinggis Khan)의 전술을 상기시켰다. 중국 행정 모델을 본떠 관료제를 구축하고, 중국인 병사와 몽골인을 위한 새로운 깃발 부대를 창설했다. 원 왕조 황제의 인장을 받은 후 왕조 이름을 "청(순수하고 맑은)"으로 개명했다. 천명(Mandate of Heaven)을 주장하며 중국을 재통일했다.


관료제 최고위층에 한족과 만주족을 위한 병행 직급 시스템을 마련했다. 만주족이 한족과 경쟁할 수 있도록 시험 준비 과정과 채점 시 우대를 제공하는 일종의 차등 대우 정책이 시행되었다. 청 제국은 차이의 제거가 아닌 차이에 대한 수용을 특징으로 했다. 다민족적 구성에 걸맞게 황제의 공표는 만주어, 중국어 등 최소 두세 개 언어로 기록되었고, 유교는 황제를 수장으로 하는 제국 가문에 다양한 인구를 통합하는 데 유용한 가부장적 도덕 이론을 제공했다.


유럽 제국과의 대비


러시아 통치자들은 정교회를 장려했지만 통제하에 두었고, 초기에 무슬림 영토로 확장하면서도 개종을 강요하지 않았다. 청 제국은 유교를 장려했지만 다른 신앙에도 관대했다. 이는 가톨릭 및 개신교 제국의 통일적인 종교 프로젝트와 근본적으로 달랐다.


8장: 혁명의 시대에 제국, 국가, 그리고 시민권


이 장은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반까지의 상호 연결된 혁명들이 제국, 국가, 시민권이라는 개념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를 다룬다.


7년 전쟁(1756-1763)


유럽 제국들 간의 이 전쟁은 전 세계적인 권력 균형을 재편했으며, 아메리카 식민지들의 반란을 포함한 일련의 혁명적 변화를 촉발했다.


미국 혁명


"대표 없는 과세는 없다"는 구호와 함께 자유와 인민 주권을 주장했다. "자유의 제국(Empire of Liberty)"은 대륙을 가로지르는 확장(루이지애나 매입 등)을 통해 영토를 늘렸으나, 노예와 대부분의 아메리카 원주민을 시민권에서 배제했다. 연방주의는 상원은 각 주가 동등하게 대표되고, 하원은 인구에 비례하는 구조였으나, 노예는 인구 계산 시 5분의 3으로 간주되었다. 원주민 토지 매매를 정부에만 허용하고, "국내 종속 국가(domestic dependent nations)"로 간주하며, 강제 이주(체로키족 눈물의 길)와 보호구역(reservation) 시스템을 도입했다.


프랑스 혁명


인민 주권과 국가에 대해 "모든 주권의 원칙은 본질적으로 국가에 있다"고 선언하며, 국가는 "하나이고 불가분"하며, 자유, 평등, 박애를 핵심 원칙으로 삼았다. 여성은 시민으로 간주되었으나 "활동적인" 시민은 아니었으며, 사회적·경제적 평등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초기에는 유색인종(장바티스트 베이예)에게 시민권을 부여했고, 생도맹그(Saint Domingue)의 노예들에게도 시민권을 부여(1793년)했다. 식민지들은 본국의 "불가분의 일부"로 선언되었다.


아이티 혁명(생도맹그)


전 노예들이 자유를 위해 싸웠고, 투생 루베르튀르(Toussaint L'Ouverture)는 생도맹그의 새로운 헌법을 제정했다. 아이티의 독립은 다른 제국들에게 통제 상실의 위험을 상징하며 기피 대상으로 여겨졌다. 프랑스는 아이티가 보상금을 지불한 후에야 조건부로 주권국가로 인정했다.


나폴레옹 제국


나폴레옹은 식민지 종속과 노예제를 부활시키며 새로운 제국적 모험을 시작했다. 로마와 카롤링거 제국의 형태를 융합하고, 군주제와 인민 주권을 결합시켰다. 오스만/러시아 제국의 가산제적 통치 방식을 채택하여 관리 임명과 충성스러운 엘리트 육성을 통해 권력을 강화했다. 나폴레옹 법전은 통일된 법을 제정했으나, 동시에 새로운 위계질서도 확립했다.


스페인령 아메리카 혁명


크리오요(Creole)들은 유럽의 계몽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각 지역의 주권을 주장하며 독립 운동을 주도했다. 스페인령 아메리카는 다수의 독립적인 국가들로 분열되었고, 원주민들은 "열등한 인종"으로 취급되었다.


영국 제국의 변화


영국은 경제적으로 중상주의에서 "자유 무역 제국주의(imperialism of free trade)"로 전환되었다. 영국의 인도는 영구 정착 제도(Permanent Settlement)(토지세 부과)를 통해 세수를 확보하고 세포이(sepoy)(인도인 병사)에 의존했으나, 이는 1857년 "세포이 항쟁(The Mutiny)"으로 이어졌다. 항쟁 후 영국 왕실이 인도를 직접 통치하게 되었고, 영국군 비율 증가, 철도 건설, 교육 시설 확충 등 "진보"를 위한 적극적인 정책을 추진했다. 인도 비평가들은 인도의 부가 영국으로 "유출(drain)"되고 있으며, 영국의 자유주의 원칙이 제대로 적용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혁명의 시대에도 제국은 여전히 포용/배제 문제를 해결하는 맥락을 제공했다. 특히, 인종적 배제는 비백인 인구를 정치 체제에 편입시키는 것에 대한 중요한 반대 논리가 되었다.


9장: 대륙을 가로지르는 제국들: 미국과 러시아


이 장은 미국과 러시아라는 두 거대 대륙 제국의 팽창을 비교하며, 이들이 다양성을 관리하는 방식에서 어떻게 차이를 보였는지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두 제국 모두 "편입 제국(empires of incorporation)"으로 묘사된다.


미국


미국은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서쪽으로 확장하며 대륙을 아우르는 제국을 건설했다. 루이지애나 매입과 멕시코 전쟁을 통해 광대한 영토를 획득했다. 백인 정착민들은 "침투(infiltration)" 전략을 통해 원주민 영토로 확장했다. 조약(그린빌 조약, 호스 크릭 조약)을 체결했으나, 이는 원주민의 주권을 부인하고 연방 정부의 우월성을 확인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강제 이주(예: 체로키족의 "눈물의 길")가 이루어졌고, 인디언 보호구역(reservation) 제도가 도입되었다. 1871년 인디언 세출 법안(Indian Appropriations Act)은 인디언 부족을 더 이상 독립적인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노예 제도는 남부의 중요한 경제 기반이었으며, 노예는 인구 계산 시 5분의 3으로 간주되었다. 드레드 스콧(Dred Scott) 판결(1857년)은 노예와 전 노예의 시민권 배제를 강화했다. 남북 전쟁(Civil War)은 노예 해방으로 이어졌으나, 즉각적인 평등을 가져오지는 않았다. 멕시코에서 합병된 지역의 멕시코 시민들에게는 집단적인 시민권(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이 부여되었으나, 원주민은 부족을 떠나야만 시민이 될 수 있었고, 노예와 그 후손들은 시민권이 없었다. 자연화법(naturalization law)은 시민권을 "자유로운 백인"에게만 부여했다. 스페인 제국이 피정복민들을 특정한 공동체로 인정하고 그들을 관리하려 한 반면, 미국은 원주민 공동체에게 사유 재산과 자유의 제국에서 주변적이고 비천한 위치만을 부여했다.


러시아 제국


러시아는 튀르크어, 핀우고르어 등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는 다민족 인구를 편입하며 광범위하게 팽창했다. 러시아 제국은 포용된 인구의 다양성을 인정하며, 그룹마다 다른 권리와 의무를 부여하는 유연한 이념을 활용했다. 이는 특정 집단에게 다른 집단보다 더 좋거나 나쁜 권리를 부여하는 "권리 체제(rights regime)"를 통해 이루어졌다. 차르 전제정(Tsarist autocracy)은 차르의 권력이 중앙집권적이었으나, 동시에 지역 관습과 종교법(무슬림에게 샤리아 적용, 우크라이나/벨라루스인에게 유니에이트 교회 허용)을 활용하여 특정 그룹을 관리했다. 이슬람은 세속 권위 아래 제도화되었으며, 무슬림 신민들은 국무 관리에 참여하도록 장려되었고, 제국 전역의 모스크에서 황제와 가족을 위한 기도가 의무화되었다. 1861년 농노 해방은 개혁 노력의 일환이었다. 러시아는 제국 내 원주민들을 교육하여 제국 체제에 편입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러시아는 그룹별로 권리를 명시적으로 차등화했지만, 미국은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면서도 인종적 배제를 통해 사회적 불평등을 유지했다. 두 제국 모두 대륙 제국으로서 팽창했다.


10장: 제국의 레퍼토리와 근대 식민주의의 신화


이 장은 19세기 "근대 식민주의"의 도래를 다루면서도, 그것이 어떻게 과거 제국의 통치 방식("레퍼토리")을 답습하고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냈는지를 분석한다.


영국 제국 (19세기 재론)


19세기 중반까지 영국 제국은 "세계 인구의 4분의 1"을 지배하며 지구상 가장 큰 경제 단위를 이루었다. 기독교적 인도주의와 반노예 운동("나는 인간이 아니며, 형제가 아닌가?")은 제국 확장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또한, "문명화 사명(civilizing mission)"이라는 이념을 통해 비유럽 사회를 "진보"시키려 했다. 영국 경제는 제국과의 공생 관계 속에서 발전했으며, "자유 무역 제국주의(imperialism of free trade)"가 핵심이었다. 인도와 같은 식민지의 현지 생산자들에게 크게 의존했다.


세포이 항쟁 이후 영국 왕실이 인도를 직접 통치하게 되면서, 철도와 교육 시설 확충 등 "진보"를 위한 적극적인 의제를 추진했다. 그러나 동시에 카스트와 같은 계급적 구분이 심화되고, 인종적 우월성이 강조되었으며, 인도의 부가 영국으로 "유출(drain)"되는 현상이 심화되었다. 인도인들 사이에서는 점차 "국민적" 개념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직접적인 정치적 통제 없이 경제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비공식적 제국의 형태가 나타났다. 백인 정착민 식민지 (자치령)는 "대영제국(Greater Britain)"의 일부로 여겨졌으며, 높은 수준의 자치를 누렸으나 영국에 대한 충성심과 인종적 동질성이 강조되었다.


프랑스 제국 (19세기 재론)


나폴레옹 3세는 자신을 "아랍인의 황제"라고 칭하며 "아랍 제국" 건설을 꿈꿨다. 무슬림 알제리인들은 프랑스 국적을 가졌으나, 이슬람 법적 지위를 포기해야만 프랑스 시민이 될 수 있었다. 이는 "동등한 사회인가 아니면 비동등한 사회인가"라는 프랑스 제국의 오랜 정체성 논쟁을 심화시켰다. 베트남/인도차이나는 보호국 체제와 직접 통치가 혼재되어 있었으며, 현지 만다린(관리) 계층에 의존하고 수출 지향적 경제를 구축했다. 프랑스인과 "원주민" 간의 명확한 구분이 유지되었다. 아프리카인들이 프랑스식 교육을 받고 프랑스 이익에 봉사하며 관습법 적용을 포기할 경우에만 시민권 문이 열렸지만, 그 수는 극히 적었다.


일본 제국 (19세기 후반)


메이지 유신 이후 급속히 근대화되며 아시아에서 새로운 제국주의 세력으로 부상했다. "대동아공영권(Asian Co-Prosperity Sphere)"을 내세웠다. 조선 및 대만 통치에서 직접적이고 동질화시키는 통치를 시행했지만, 동시에 현지 엘리트를 편입시키려는 시도도 있었다.


독일 제국 (19세기 후반)


해외 식민지 개척에 늦게 뛰어들었으며, "문명화 사명"을 주장했다. 헤레로(Herero)족 반란과 같은 식민지 반란을 잔인하게 진압했다.


벨기에 제국 (19세기 후반)


콩고는 레오폴드 2세의 개인적 소유로 시작되어 이후 국가 통치 하에 놓였으며, 극심한 노동 착취와 잔혹한 통치가 이루어졌다.


미국 (해외 팽창 재론)


미국은 하와이를 합병하고, 쿠바, 푸에르토리코, 필리핀을 획득했다. 필리핀의 자치는 역량을 증명할 때까지 무기한 연기되었다. 미국은 대륙적 팽창을 통해 동질적인 국민을 형성한다는 이상을 가졌으나, 다양한 해외 사회를 통치해야 하는 현실과 이념적 긴장을 겪었다.


"문명화 사명," "발전," "진보"와 같은 신화는 근대 식민주의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근대 식민주의 역시 차이의 통치, 중개자 활용, 폭력과 같은 과거 제국의 통치 방식을 그대로 사용했다.


11장: 주권과 제국: 19세기 유럽과 인근 지역


이 장은 나폴레옹 전쟁 이후 19세기 유럽의 재편 과정을 다루며, 특히 러시아, 오스만, 합스부르크 제국이 민족주의와 자유주의의 부상 속에서 다양성을 관리하기 위해 시도한 노력에 초점을 맞춘다.


빈 회의(Congress of Vienna, 1815)


나폴레옹 이후 유럽 국가 체제를 재편했다. 신성 동맹(Holy Alliance)(기독교 원칙 기반)과 사국 동맹(Quadruple Alliance)(강대국 간 협의)이 형성되었다.


러시아 제국 (19세기 재론)


니콜라이 1세는 데카브리스트 반란을 전제정에 대한 도전으로 해석하고, 법전 편찬, 관리 교육 등을 후원했지만, 개혁 주도권은 황제와 장관들에게 있었다. "국민성(nationality)" 원칙과 관련하여 "서구주의자"와 "슬라브주의자" 간에 러시아의 운명과 정체성에 대한 논쟁이 치열했다. 러시아는 카프카스, 중앙아시아로 계속 확장했으며, 다양한 법적 및 관습적 관행을 인정했다. 발트 해 연안에서는 러시아화(Russification) 정책이 시행되기도 했다. 세르게이 비테(Sergei Witte)는 러시아 경제를 통합하고 국가 주도의 산업 발전을 지원했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가 건설되고 외국인 투자가 유치되었다. 1905년 평화로운 노동자 시위에 발포 명령이 내려졌지만, 이후 니콜라이 2세는 두마(Duma) 설립과 제한적 헌법 개혁을 수용했다. 그러나 신민의 공식적인 정치적 지위의 구분은 1917년까지 지속되었다.


오스만 제국 (19세기 재론)


오스만 제국은 "유럽의 병자"로 불리며 유럽 강대국들의 압력에 시달렸다. 탄지마트(Tanzimat) 개혁에서 마흐무트 2세는 예니체리(Janissaries)를 폐지하고 징집군을 도입하며 군사 개혁을 추진했다. 이후 술탄 압둘메지드 1세는 신민의 생명, 명예, 재산 보호를 보장하고, 종교에 관계없이 모든 신민을 법적으로 동등하게 선언했으며, 서구식 법률과 법원을 도입했다. 이는 중앙집권적 통제 강화를 목표로 했다. 신 오스만인(New Ottomans, 청년 오스만인)은 탄지마트 관료들을 비판하며 헌법과 의회(1876년)를 요구했고, 정치적 평등을 주장했다. 의회는 제국 내 다양한 집단을 대표했다. 술탄 압둘하미드 2세는 이슬람 부흥 운동을 장려하고, "오스만 정체성"이 이슬람적 뿌리를 바탕으로 한 진보적 문화임을 보여주려 했다. 청년 튀르크당(Committee of Union and Progress, CUP)은 1908년 헌법을 복원하고 중앙집권적 의제를 추진하며 오스만 튀르크어를 국가 언어로 강제했으나, 이는 아랍인들 사이에서 불만을 초래했다. 1913년 이후에는 더욱 튀르크 민족주의적이고 이슬람적인 경향을 보였다. 튀르크인과 아랍인 간에는 종교에 기반한 타협 가능성도 있었다.


합스부르크 제국 (19세기 재론)


합스부르크 제국은 "민족들의 감옥"이라 불리며 독일인, 헝가리인, 슬라브족, 루마니아인 등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제국이었다. 1848년 혁명 이후 중앙집권적 군주제로 전환되었지만, 1867년 이중 군주국(Dual Monarchy)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수립되어 헝가리인들에게 상당한 자치를 부여했다. 1867년에는 모든 종교의 사람들에게 동일한 시민권을 보장하는 단일 제국 시민권이 창설되었다. 언어는 분열을 일으키는 요소였으나, 합스부르크 군주국은 다원주의와 유연성을 유지하려 했다 (예: 보헤미아에서 체코어와 독일어 병용). 교육, 전문 사회, 기술 인프라가 불균등하게 확장되었다. 기독교사회당(반유대주의 성향)과 사회민주당(초국가적 원칙) 등 다양한 정치 세력이 존재했으며, 활발한 대중 정치와 정당 정치가 발달했다.


세 제국 모두 교육을 확대하고, 궁극적으로 선출된 대표를 가진 의회를 설립했으며 (합스부르크: 1861, 오스만: 1876-77년, 러시아: 1906년),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도전에 직면했다. 그러나 이념적 방향(더 날카로운 인종적 구분 대 모호한 헤게모니)과 정치적 재편(평등주의 대 차별화)에서는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


12장: 제국들의 세계 속 전쟁과 혁명: 1914년부터 1945년까지


이 장은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이 제국에 미친 영향을 분석하며, 일본, 소련, 미국과 같은 새로운 유형의 제국들이 어떻게 부상했는지를 다룬다.


제1차 세계 대전 (1914-1918)


독일과 연합국(영국, 프랑스, 러시아) 간의 경쟁이 전쟁으로 폭발했다. 수많은 식민지 신민들이 프랑스를 위해 사망했으며, 이는 제국 내 편입과 차등화 간의 핵심적 긴장을 노출시켰다. 러시아 제국(1917년), 오스만 제국(해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해체), 독일 제국(패배)이 붕괴했다.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대통령의 민족 자결주의 담론은 식민지 민족에게 희망을 주었으나, 비백인 식민지 민족에게는 선별적으로만 적용되었다. 중동 재편에서 영국은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아랍 반란"을 부추겼고(아라비아의 로렌스), 전후에는 위임 통치 제도(mandates system)를 통해 시리아/레바논은 프랑스에, 팔레스타인/요르단/이라크는 영국에 귀속되었다. 이는 새로운 국가를 창설했지만 여전히 제국적 통제하에 있었다. 그리스인과 튀르크인 간의 인구 교환도 발생했다.


전간기 (1919-1939)


일본과 소련이 세계 무대에 새로운 제국적 세력으로 등장했다. 중국의 5.4 운동, 인도의 간디(Gandhi)의 비폭력 저항, 동남아시아의 민족주의 성장 등이 두드러졌다. 영국/프랑스는 간접 통치(indirect rule)(족장들을 통한 통치)와 현지 엘리트 편입 시도가 있었지만, 저항은 계속되었다.


소련 (1917-1945년 재론)


소련은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로, 공식적으로는 "민족 공화국"들의 연방이었으나, 당 충성파들의 피라미드식 통치를 통해 운영되는 새로운 유형의 제국이었다. "적극적 차등 대우 제국(Affirmative Action Empire)"은 각 민족 집단을 공화국 안에 배치하고 민족적 인정을 장려했지만, 종교는 억압했다. 중간 관리자에 대한 무자비한 통제와 국제 정보 네트워크 차단은 명령 경제를 가능하게 했다. 옛 러시아 제국의 영토 대부분을 회복하며 확장했다.


나치 제국


동유럽에서 특히 정복과 절멸이라는 잔혹한 인종 이념을 추구했다. 동유럽을 "생활 공간(Lebensraum)"으로 삼아 백인 정착민 제국을 건설하려 했으며, 피정복민들을 잔인하게 착취했다.


제2차 세계 대전 (1939-1945)


이 전쟁은 구 제국의 붕괴를 가속화했다. 일본은 동남아시아를 정복하며 유럽 세력을 대체하고 현지 민족주의를 부추겼다. 소련은 나치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으며, 미국은 세계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13장: 제국의 종말?


이 장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탈식민화(decolonization) 과정을 다루며, 새로운 국제 질서의 형성에도 불구하고 제국적 형태가 어떻게 지속되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탈식민화


영국은 골드코스트(가나)의 독립을 수용하고, 인도의 독립을 부여했으나 이는 인도-파키스탄 분할로 이어졌다. 프랑스는 인도차이나(베트남 전쟁)와 알제리(알제리 전쟁)에서 통제권을 재확립하려 했으나, 이는 본국 내에서도 심각한 갈등을 초래했다.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 민족주의와 대치하다 결국 철수했다. 포르투갈은 1974년 본국 내 군사 반란으로 인해 마지막 유럽 식민 제국으로서의 막을 내렸다.


새로운 국제 질서


"제3세계" 운동은 반둥 회의(1955년)를 통해 미국과 소련의 지배에 대항하는 대안적 비동맹 운동을 추구했다. 미국은 전후 개방 질서(작은 민족국가들에 대한 영향력 증대)와 공산주의 확산에 대한 두려움 사이에서 갈등했다. 소련은 동유럽 국가들에 대한 통제("복제 국가" 체제)를 유지했으나, 스탈린 사후 내부적 스트레스에 직면했다.


지속되는 제국적 형태


남아프리카의 백인 소수 정권은 "분리 발전(separate development)" 정책을 통해 인종적 통제를 유지했다. 중국의 마오쩌둥은 소련과 거리를 두면서도 "인근 지역(near abroad)" 정책에서 과거 제국적 전통의 연속성을 보여주었다. 유럽 연합(EU)은 국경을 초월한 문화적 교류와 경제적 기관을 통해 "다층적 주권(layered sovereignty)" 형태의 정치적 단위를 형성했다. 홍콩 반환(1997)은 "다른 사람들을 다르게 통치하되, 동등하게는 아닌" 제국의 기본 전략을 상기시킨다.


탈식민화 시대에도 구 제국과 신 제국은 여전히 세계를 형성하는 중요한 힘으로 남아 있었으며, 민족국가라는 담론에도 불구하고 제국적 궤적과 그들의 교차점은 변동성을 보였다.


14장: 제국, 국가, 그리고 정치적 상상력


이 장은 제국의 오랜 유산과 그것이 현대 국가 및 정치적 상상력에 미치는 지속적인 영향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다.


지속적인 유산


현대 국가들은 중앙집권적 관료제, 법률 시스템, 인구 분류 방식 등에서 종종 제국의 기원을 반영한다. 로마와 중국 제국은 법적 권위, 관료제, 차이의 정치에 대한 강력한 모델을 제공했다. 포스트-로마 유럽에서는 중앙집권적 권력에 대한 귀족 계층의 지속적인 도전은 국가 권력의 분산을 초래했다. 몽골 제국은 칭기즈 칸과 그의 후계자들이 개발한 군사-정치 기술과 다양한 인구 통합 방식은 이후 유라시아 제국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해양 제국은 세계 상업 네트워크, 인종적 위계, 착취 시스템의 발전으로 이어져 전 지구적 경제를 형성했다. 혁명은 인민 주권의 이상을 확산시켰지만, 동시에 미국이나 나폴레옹 프랑스와 같은 새로운 형태의 제국적 통치로 이어지기도 했다.


20세기와 그 이후


오스만, 합스부르크, 러시아 제국의 붕괴는 종종 민족 청소를 동반한 새로운 민족국가들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소련은 "적극적 차등 대우 제국"으로, 일본은 개발주의적 제국으로, 미국은 세계적 헤게모니를 추구하는 제국으로 등장했다. 냉전 종식 후, 소련 제국의 붕괴 이후, 미국은 "단극 세계"의 유일한 강대국으로 남았으나, 중국과 같은 새로운 권력 축이 부상했다. 개입, 위성 정권, 경제적 지렛대, 감시와 같은 제국적 통치 도구는 21세기에도 계속해서 활용되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Vladimir Putin)은 과두 지배층을 국가에 재연결하고, 종교 기관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며, 언론을 통제하고, 선거 과정을 "주권적 민주주의"로 변모시키며 가산제적 권력 기술을 부활시켰다. 현대 이라크의 혼란은 과거 제국들의 복잡한 궤적과 계속되는 외부 개입의 결과로 해석될 수 있다. 오늘날의 세계는 소속감, 기회의 평등, 상호 존중에 기반한 정치 공동체를 어떻게 건설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직면해 있다.


종합 시사점


"세계제국사"는 제국이 역사의 예외적 현상이 아니라, 인류 사회를 구성하고 권력을 행사하며 다양성을 관리해 온 보편적이고 지속적인 형태임을 강조한다. 책은 제국들이 영토 확장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인구를 통합하면서도 차이를 인정하고 때로는 차별하는 '차이의 정치학'을 어떻게 활용했는지 상세히 분석한다.


특히, 제국들이 위기 상황이나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어떤 통치 방식(가산제적 통치, 계급 위계적 통치)과 이념적 정당화(문명화 사명, 종교적 포용, 민족 자결주의의 제한적 적용)를 사용했는지 보여준다. 또한, 고대 로마와 중국에서부터 근현대 러시아, 미국, 그리고 유럽 연합에 이르기까지, 제국적 형태와 그 유산이 현재까지도 정치적 상상력과 국제 질서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역설한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제국이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21세기에도 세계를 형성하는 중요한 힘으로 남아 있으며, 민족국가라는 현대적 개념 속에서도 제국적 궤적과 그들의 교차점은 여전히 변동성을 보인다는 심오한 통찰을 제공한다. 제국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오늘날 세계가 직면한 갈등과 도전을 분석하는 데 필수적인 관점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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