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충돌: 다극 세계의 개창

분기점: 분열의 세계를 읽는 눈

by 소묘


사상 최초로 세계정치가 다극화, 다문명화되었다는 통찰


냉전 시대가 막을 내린 후, 세계는 이념이라는 단일 잣대로 설명될 수 없는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헌팅턴은 바로 이 지점에서 근대화가 서구화를 의미한다는 통념을 깨고, '보편 문명'이라는 개념 자체가 서구 중심적 사고의 산물임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그의 주장은 세계 정치를 이해하는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냉전 이후의 새로운 구분선, 문화


냉전의 종식은 이념적 대립의 시대를 끝냈다. 하지만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예상치 못한 '문화'였다. 사람들은 더 이상 이념, 정치, 경제적 기준으로 자신을 분류하지 않았다. 대신 조상, 종교, 언어, 역사, 가치관, 관습, 제도는 물론 부족, 민족 집단, 신앙 공동체, 국민, 그리고 가장 포괄적인 단위인 문명이라는 문화적 집단을 통해 스스로를 규정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문화적 정체성이 국가 간의 우호 관계와 적대 관계를 결정하는 핵심 요소로 부상했다.


문명, 가장 상위 수준의 문화적 결집체


헌팅턴은 문명을 언어, 역사, 종교, 관습, 제도 등 객관적 요소와 구성원들의 주관적 귀속감이 결합된, 가장 포괄적인 문화적 동질성을 지닌 집단으로 정의한다. 문명은 국가나 정부와 같은 정치적 실체가 아니며, 행정적 기능을 수행하지 않는다. 문명은 유한하지만 매우 오랜 시간 지속되며, 진화하고 변화하며, 격동의 시기를 겪으면서도 강인한 생명력을 유지한다. 단일한 형태를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구성 요소와 형태가 변화하며 서로 뒤섞이거나 중첩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명은 그 경계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의미 있는 실체로 존재한다.


문명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특성, 종교


헌팅턴은 문명을 정의하는 데 있어 종교의 중요성을 특히 강조한다. 인류 역사 속 주요 문명들은 모두 세계의 주요 종교들과 깊은 연관성을 맺고 있다. 심지어 같은 언어와 민족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조차도 서로 다른 신을 믿는다는 이유로 극심한 갈등을 겪고 폭력 사태를 일으키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레바논, 옛 유고슬라비아, 인도 등에서 이러한 사례를 명확히 찾아볼 수 있다. 20세기 후반 전 세계적으로 나타난 종교의 부활은 이러한 문화적 차이를 더욱 두드러지게 만들었다.


'보편 문명' 개념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서구에서 통용되는 '보편 문명'이라는 개념은 다른 사회에 대한 서구의 문화적 우위를 정당화하려는 서구만의 독특한 발상이다. 비서구 사회에서는 이러한 개념이 거의 지지를 얻지 못하며, 오히려 서구의 오만함이나 제국주의적 태도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가장 의미 있는 문화적 뿌리에 관심을 기울이며 정체성을 형성하기 때문에, 공산주의의 몰락이 곧 자유민주주의의 보편적 승리를 의미한다는 가정은 '유일 대안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근대화가 세계적 교류를 증가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공동의 세계 문화를 낳는다는 가정은 입증되지 않았다. 오히려 문화적 정체성이 더욱 강화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실제 역사에서는 서구화되지 않고도 근대화에 성공한 비서구 사회의 사례를 여럿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영어가 국제어로 널리 사용될수록 사람들은 오히려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적 정체성을 더욱 강하게 인식하게 되며, 영어 자체도 나이지리아 피진 영어, 인도식 영어처럼 지역색을 띠며 현지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현재 존재하는 주요 문명들


헌팅턴은 현재 세계를 구성하는 주요 문명으로 중화, 일본, 힌두, 이슬람, 정교, 서구, 라틴아메리카를 제시하며, 아프리카 문명 또한 잠재적으로 추가될 수 있다고 언급한다. 각 문명은 고유한 특성과 역사를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 서구 문명은 그리스-로마의 유산,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라는 종교적 배경, 유럽어, 종교적 권능과 세속적 권능의 분리, 사회적 다원주의, 대의제, 개인주의 등을 핵심 특성으로 가진다.


서구의 상대적 영향력 감소와 비서구 문명의 부상


20세기 초반 서구의 힘은 정점에 달했지만, 그 이후로 영토, 인구, 경제력, 군사력 등 주요 자원에서 다른 문명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쇠퇴하기 시작했다. 헌팅턴은 이러한 서구의 쇠퇴가 '서구의 팽창'이 끝나고 '서구에 대한 반항'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고 진단한다.


소프트 파워와 하드 파워의 연관성


문화와 이데올로기의 매력(소프트 파워)은 물질적 성공(하드 파워)에 뿌리를 두고 있다. 따라서 서구의 하드 파워가 감퇴하면서 서구의 인권, 자유주의, 민주주의 같은 개념들도 다른 문명들에게 매력을 잃고 있다. 과거 비서구 사회는 서구의 성공 비결을 서구의 가치관과 제도에서 찾으려 했지만, 이제는 자신들의 성공이 고유 문화를 고수한 결과라고 인식하며 서구의 가치를 부정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토착화' 현상과 비서구 문화의 부활


서구의 상대적 쇠퇴는 비서구 문화의 부활, 즉 '토착화' 현상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토착화는 전 세계적으로 일고 있는 종교의 부활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확인된다.


'신의 설욕', 종교 부활의 파고


20세기 전반의 지식인들은 근대화가 종교의 중요성을 약화시킬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20세기 후반에는 오히려 전 세계적으로 종교가 부활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는 근대화가 초래한 사회적, 심리적 혼란과 뿌리 상실에 대한 반작용이자, 국가 관료주의가 충족시키지 못한 사회적 요구에 종교가 응답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또한, 서구의 퇴조와 냉전의 종식 역시 종교 부활을 자극하는 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종교의 부활은 비서구 사회에서 반서구주의를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가 된다.


아시아 문명의 자기주장


동아시아의 눈부신 경제 발전은 아시아 사회에 커다란 자신감과 자기주장을 불어넣었다. 아시아인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성공이 서구 문화의 도입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유교적 가치(근면, 가족 중시, 노동 윤리, 규율 강조, 개인주의 거부, '부드러운' 권위주의)를 고수한 결과라고 믿는다. 중국은 천안문 사태 이후 민족주의와 경제 발전을 통해 정당성을 확보하려 노력했으며 유교에 대한 관심을 고취시켰다. 일본 또한 경제적 성공의 원인을 일본 고유 문화에서 찾으며 '아시아화'를 추진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슬람 문명의 자기주장과 인구 폭발


이슬람권의 폭발적인 인구 증가, 특히 젊은 청년층의 증가는 이슬람 부활의 주요 동력으로 작용한다. 이슬람의 부활은 정치적 영역에서 성전이라는 개념을 포함하고, 완전한 사회에 대한 이상을 제시하며, 근본적인 변화를 지향하고 기존 권력과 국민국가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주의와 유사한 측면을 보인다. 또한 종교개혁과도 맥을 같이한다.


이슬람주의는 농촌 엘리트, 농부, 노인층보다는 근대화 과정에 참여하는 젊은 층(학생, 지식인, 도시 중산층, 최근 도시 이주민)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다. 이슬람 운동은 모스크, 복지 시설, 재단 등 이슬람 기관을 통해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며 세력을 확장했고, 각국 정부들 또한 이슬람 단체와 관습을 옹호하는 추세다. 이슬람의 부활은 서구화에 대한 반작용이지 근대화에 대한 반작용은 아니며, 서구의 세력 약화도 그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문명에 기반을 둔 새로운 세계질서의 태동


탈냉전 시대에 들어서면서 사람들을 나누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문화가 되었고, 이 문화적 정체성이 각 국가의 친구와 적수를 규정하는 핵심 요소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이는 세계가 문명에 기반을 둔 새로운 질서로 재편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문화적 친화력 기반의 협력과 동맹


탈냉전 세계에서는 공통되거나 유사한 문화를 가진 국가들끼리 동맹을 맺고 협력하는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예를 들어, 유럽연합(EU)과 같이 문화적 동질성을 기반으로 하는 국제기구는 문화적 장벽을 넘어서야 하는 국제기구보다 훨씬 원활하게 운영된다. 발칸 지역에서는 정교 문명에 기반한 동맹(그리스-세르비아-불가리아)이 형성되려는 움직임이 관찰되기도 한다.


국가 이익의 재정의와 문화적 고려의 중요성


국가의 주권, 기능, 힘은 전반적으로 약화되는 추세에 있으며, 국제기구가 개별 국가의 영토 내 행위에 개입할 권리를 주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국가들은 점차 자신의 이익을 문명적 용어로 정의하기 시작했다. 문화적 고려는 다른 국가의 의도를 위협으로 받아들이는 방식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문명 패러다임'의 유용성


헌팅턴은 기존의 '단일 세계론'(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 등), '양분 세계론'(부국 vs 빈국, 서구 vs 비서구), 그리고 '국가 패러다임'(국가 행동을 힘만으로 설명)의 한계를 지적한다. 그는 문명 패러다임이 세계를 이해하는 쉽고 지혜로운 분석 틀을 제공하며, 중첩된 갈등 속에서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구분하고 미래 사태의 발전을 예측하며 정책 입안가들에게 유용한 지침을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문명 패러다임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분리 가능성과 그 양상을 문화적 요인을 고려하여 예측하는 데 더 효과적이었다고 제시된다.


문명의 유연성과 회복력


문명은 다른 문명으로부터 요소를 차용하더라도 자신의 핵심적 가치(파이데우마)를 유지하며 이를 수정하고 변형하여 동화시킨다. 예를 들어, 중국은 인도에서 불교를 받아들였지만 '인도화'되지 않았고, 일본 또한 중국 문화를 수입했지만 독자성을 유지했다. 이러한 사례들은 비서구 사회가 고유 문화를 포기하지 않고도 근대화에 성공할 수 있음을 증명한다. 일본, 싱가포르, 대만,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등이 그 대표적인 예시다.


'핵심국'의 역할과 부재의 문제


세계에는 각 문명의 범주와 대체로 일치하는 지역 강대국, 즉 '핵심국'이 존재한다. 핵심국들은 해당 문명권 내에서 질서를 부여하고, 갈등 발생 시 중재자 역할을 수행하며, 자신의 문명에 속한 다른 국가들을 끌어당기는 '중력' 역할을 한다. 서구에는 미국과 독일-프랑스라는 두 핵심국이 있고, 중화 문명에는 중국이, 일본 문명에는 일본이, 힌두 문명에는 인도가, 정교 문명에는 러시아가 있다. 그러나 이슬람,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문명에는 뚜렷한 핵심국이 부재하여 내부 질서 구축이나 외부 문명과의 협상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헌팅턴은 분석한다.


서구의 보편주의와 비서구 문명 간의 갈등


헌팅턴은 서구의 보편주의적 태도가 비서구 문명, 특히 이슬람과 중국과의 충돌을 야기하는 주된 원인이라고 역설한다. 냉전 승리 이후 서구는 자유민주주의 이념이 보편타당하다고 믿으며, 민주주의, 시장 경제, 인권, 개인주의, 법치주의 같은 서구적 가치를 다른 문명에 강요하려 한다. 그러나 비서구 사회는 이러한 서구의 보편주의를 '제국주의'로 인식하며 회의적이거나 격렬한 반발을 보인다. 비서구 국가들은 서구의 경제적, 군사적, 문화적 지배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며, 동아시아 국가들은 경제적으로, 이슬람 국가들은 군사적으로 서구에 필적할 수준을 모색하고 있다.


주요 갈등 축: 이슬람, 중국과의 긴장


서구와 비서구 간의 관계는 다양하지만, 특히 도전 의식이 강한 이슬람 문명과 중국 문명과는 긴장감이 높고 대체로 적대적인 양상을 보인다. 반면, 세력이 약하고 서구 의존도가 높은 라틴아메리카나 아프리카와의 관계는 갈등 소지가 적다. 러시아, 일본, 인도와 서구의 관계는 그 중간적 성격을 띠며 협력과 갈등의 요인을 모두 안고 있으며, 사안에 따라 이슬람이나 중국 편에 서기도 한다.


'유교-이슬람 결합' (Confucian-Islamic Connection)


현실주의자들은 비서구 문명 핵심국들이 서구 지배에 맞서 연합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실제로 일부 사안에서는 이러한 협력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군사력, 대량 살상 무기(WMD), 미사일 개발을 통해 서구의 군사적 우위에 도전하는 양상이 두드러진다. 1990년대 초반 이미 중국, 북한과 파키스탄, 이란, 이라크, 시리아, 리비아, 알제리가 다양한 수준으로 공조하는 '유교-이슬람 결합'이 구축되어 서구에 대적할 길을 도모했다. 중국은 많은 이슬람 국가에 재래식 및 비재래식 무기를 제공하며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인권과 민주주의 문제: 문명 간 갈등의 장


서구는 다른 국가들에게 서구적 인권 개념을 존중하고 민주주의를 도입하도록 압박하지만, 아시아 국가들은 이를 서구의 내정 간섭으로 여기며 저항한다. 1993년 빈 인권회의에서 아시아 국가들은 인권이 국가적, 지역적 특수성과 다양한 문화적 배경 안에서 고찰되어야 하며, 경제 지원과 인권을 연계하는 것은 개발권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비판했다. 베이징 올림픽 유치 실패를 둘러싼 논란은 인권 문제가 문명 간 갈등의 장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준전쟁'으로서의 이슬람-서구 갈등


이슬람과 서구 사이에는 '준전쟁(quasi-war)' 상태가 전개되고 있다. 이는 이슬람 국가 전체가 서방 국가 전체와 싸우는 것은 아니지만, 이란, 수단, 이라크, 리비아, 시리아 등 일부 이슬람 국가와 집단들이 미국 및 서방 국가들과 제한된 수단(테러, 공습, 첩보, 경제 제재)으로 싸움을 벌이는 양상이다. 양측은 서로를 적으로 인식하며, 이슬람교도들은 서구를 두려워하고 증오하며 그들의 문화를 타락하고 부패했다고 생각한다. 서구인들은 이슬람 과격주의자들이 소수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지만, 이슬람 국가들에서는 서구에 대한 테러 행위를 규탄하는 목소리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는 점은 서구의 주장이 희박함을 시사한다. 헌팅턴은 서구가 직면한 근본 문제는 이슬람 원리주의가 아니라 이슬람 그 자체이며, 두 문명의 가치관과 힘의 불균형이 갈등의 핵심 원인이라고 강조한다.


아시아-미국 갈등: 패권 경쟁의 전초전


동아시아의 경제 발전과 자신감 증대는 아시아 국가들과 서구(특히 미국)의 갈등을 증폭시킨다. 냉전 종식으로 소련이라는 공동의 적이 사라지자 미국과 아시아 강대국들 간의 최우선적 공동 이해가 사라지고, 문화적 차이(개인주의 vs 집단주의, 서구의 짧은 역사관 vs 아시아의 장구한 역사관)가 전면에 부각되었다. 미국은 아시아 국가들이 자신의 가치와 원칙을 수용하기를 바라지만, 아시아인들은 자신들의 성취를 의식하며 동등한 대우를 요구하고 미국의 요구를 거부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궁극적으로 미국은 중국이 주도하는 아시아 질서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으며, 중국 또한 미국의 헤게모니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기에, 동아시아 세력 판도를 둘러싼 근본적인 대립이 양국 갈등의 밑바탕에 깔려 있다.


문명 충돌의 위험 감소와 서구 문명의 생존 전략


헌팅턴은 주요 문명의 강대국들이 대거 개입하는 세계대전이 일어날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경고한다. 이러한 전쟁은 상이한 문명에 속한 집단들 사이의 '단층선 분쟁'에서 비화될 가능성이 높다. 또한, 문명 간 세력 판도의 변화, 특히 중국의 부상은 핵심국 간의 대규모 문명 전쟁의 잠재적 원천이 될 수 있다고 분석한다.


단층선 분쟁의 특성


단층선 분쟁은 상이한 문명에 속한 집단들 사이의 폭력적 갈등으로, 종교적 차이, 지리적 근접성, 역사적 기억에서 비롯되며, 매우 폭력적이고 장기화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분쟁은 분쟁 당사자들의 문명적 정체성을 고조시키고, 친족국(kin-country)들이 개입하여 분쟁을 더욱 확대시키는 경향을 보인다. 가장 두드러진 단층선 분쟁은 유라시아와 아프리카를 아우르는 지역에서 이슬람교도와 비이슬람교도 사이의 경계선을 따라 일어났다.


평화를 위한 세 가지 원칙


문명 간의 대규모 전쟁을 피하기 위해 헌팅턴은 세 가지 원칙을 제시한다.


첫째, 자제의 원칙(Abstention Principle)이다. 전 세계 지도자들은 핵심국이 다른 문명 내부의 분쟁에 개입하지 않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미국과 같은 일부 국가는 이 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경향이 있다.


둘째, 공동 중재의 원칙(Joint Mediation Principle)이다. 핵심국들이 단층선 전쟁을 억제하거나 종식시키기 위해 타협하고 협력하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단층선 분쟁은 문화적 거리감, 강한 적대감 등으로 인해 당사자들 간의 직접 협상으로는 해결되기 어려우며, 관련 핵심국들이 평화 협정을 유도해야 한다.


셋째, 동질성의 원칙(Commonality Principle)이다. 궁극적으로 다문명 세계에서 평화를 구축하는 데 필요한 또 하나의 원칙은 '동질성의 원칙'이다. 즉, 어떤 문명에서 살든 인간은 다른 문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공유하는 가치관, 제도, 관행을 확대하는 방법을 꾸준히 모색하고 실천해야 한다. 이는 궁극적으로 **단일 문명(유일하고 보편적인 세계 문명)**의 실현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서구의 역할과 미래: 정체성 재인식과 자기 수호


헌팅턴은 '역사의 종말'과 같은 '조화로운 단일 세계' 패러다임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고 비판하며, 서구의 힘이 쇠퇴하고 있지만 재생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서구 지도자들의 책무는 다른 문명들을 서구의 이상에 맞춰 바꾸는 것이 아니라, 서구 문명의 고유한 특성을 견지하고 수호하며 쇄신하는 데 역점을 두는 것이다. 미국은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 책무를 앞장서서 떠맡아야 한다. 서구는 범죄, 마약, 가정 와해, 사회적 자본 약화, 학습 열의 감퇴 등 내부적 윤리 의식 약화 문제에 직면해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 문화적 쇠퇴를 막아야 한다. 특히 미국은 히스패닉 이민자들의 동화 실패가 '단절국'으로의 분열을 가져올 수 있다는 우려에 직면해 있다고 지적한다.


'분열국' (Divided Countries) 문제와 문명 이동의 어려움


일부 국가는 두 문명에 걸쳐 있거나 한 문명에서 다른 문명으로 이동하려 시도하는 '분열국'의 특성을 보인다. 러시아, 터키, 멕시코, 호주가 그 예시다. 이러한 문명 이동 시도는 정치·경제 엘리트의 지지, 대중의 침묵, 지향하는 문명의 수용 의사라는 세 가지 요건이 충족되어야 하지만, 과거 역사에서 실패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러시아: 러시아는 수 세기 동안 서구 문명의 일부인지 독자적인 유라시아 정교 문명인지 정체성 혼란을 겪는 분열국이다. 러시아가 서구에 편입될 경우 정교 문명은 존립 기반을 잃을 수 있다.


터키: 케말 아타튀르크는 터키를 서구화하고 근대화하려 했으나, 이는 이슬람 전통과의 괴리를 낳았고, 1980년대 이후 이슬람 정서가 부활하며 터키의 정체성 문제가 다시 부각되었다.


멕시코: 멕시코는 라틴아메리카 문화에서 북아메리카 문화로 정체성을 재규정하려는 시도를 했으나, 문화적 거리감과 이민 문제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호주: 호주 지도자들은 아시아화를 시도했으나, 호주의 서구적 유산과 문화적 차이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러한 사례들은 고유문화의 완강함과 서구로부터의 유입물에 저항하고 수정하는 능력을 보여준다.


국제기구 개혁 제안


헌팅턴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구성이 세계의 인구 분포와 세력 구도를 제대로 대변하지 못한다고 지적하며, 각 문명을 대표하는 국가들이 상임이사국 자격을 돌아가며 맡는 방안을 제안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일본, 인도, 나이지리아, 브라질을 새로운 상임이사국으로 포함하는 것을 언급한다.


종합 시사점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은 냉전 이후 세계 질서를 이해하는 데 있어 문화적 요인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깊은 통찰을 제공한다. 이 책은 더 이상 이념이나 경제적 가치만으로 국제 관계를 설명할 수 없으며, 문명 간의 문화적 차이와 그로 인한 갈등이 미래 세계정치의 핵심 동력이 될 것이라는 점을 명확히 제시한다.


헌팅턴은 근대화가 반드시 서구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서구의 보편주의적 태도가 비서구 사회의 반발을 초래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특히 아시아 문명의 경제적 부상과 이슬람 문명의 인구 증가 및 문화적 활력은 서구의 상대적 쇠퇴와 맞물려 문명 간의 긴장을 고조시키는 주요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분석한다. 서구는 이제 자신의 정체성을 보편적인 것이 아닌 특수한 것으로 인식하고, 내부적 문제 해결과 더불어 비서구 문명의 부상에 대응하며 스스로를 수호하고 혁신해야 할 과제에 직면했다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헌팅턴은 문명 간의 대규모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는 자제, 공동 중재, 그리고 공유된 가치를 확장하려는 동질성의 원칙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그의 분석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국제 관계를 이해하고 예측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하며, 문화적 다양성이 국제 사회의 주요 변수가 되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이 책은 세계가 단일한 흐름으로 수렴될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에 대한 강력한 반론이자, 문명 간 대화를 통해 평화를 모색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는 경고 메시지라 할 수 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글로벌 관세 전쟁, 가자지구, 미국 정치의 역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