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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용 Mar 10. 2022

유구한 탐욕의 역사

동물농장 서평


 인류는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 돌 덩어리를 깨뜨려 사냥을 하던 종족은 어느새 먼 우주를 탐사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눈부신 인류의 번영은 분명 영광이지만 어두운 면도 존재하기 마련이다. 인간의 역사 대부분 서열, 계급이 존재했던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과도한 권력의 집중은 때론 피비린내를 몰고 오기도 했다. 같은 역사를 공유했던 이들마저 서로 총과 칼을 겨누었던 뼈 아픈 시간도 있었다. 오늘날, 과거보다는 나아졌지만(사실 나아진 지는 모르겠다). 아직 이런 부조리는 종식되지 않고 현실을 부유하고 있다. 자본주의 시대에 돈이라는 힘은 사람을 다시 계층화했다. 계층간 이동은 계급 때보다 원할하다고 하나 근본적으로 사람끼리 위아래를 정한다는 문제는 그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 


 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농장'은 스탈린주의에 대한 비판을 담은 풍자 소설이다. 물론 단순히 지난 일에 대한 풍자만이 소설의 주요 골자라면 지금까지 활발하게 읽히는 책은 아니었을 것이다. 본작을 읽으면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보기에도 많은 부분 현실과 겹쳐 보이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비참과 노예 상태, 그게 우리 동물의 삶입니다. 


 농장주 '존스'에 의해 탄압받던 동물들은 '메이저'를 필두로 혁명을 일으킨다. 생각보다 싱겁게 승리를 거둔 동물 무리는 이제 그들만의 유토피아를 건설하기 위해 각자 맡은 바 최선을 다해 움직였다. 각 동물은 능력에 맞는 일을 했다. 머리를 쓰는 것에 둔하고 힘이 좋은 동물은 육체적인 노동으로, 닭이나 소처럼 생산물을 만들어내는 동물은 해당 업무를 담당했다. 그들이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계획을 체계적으로 세우고, 논리적으로 다른 동물을 설득한 돼지 덕분이었다.  


 동물들은 자신들을 탄압했던 인간처럼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런 가능성을 원천봉쇄하기 위해 몇 가지 규칙을 정했다. 동물들이 알아듣기 쉽게 일곱계명을 만들었으나 알파벳도 떼지 못한 동물도 많은 상황에서 긴 문장을 모두 외우기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래서 모든 규율을 한 문장으로 뭉쳐 모두에게 공표했다. 


 네 발은 좋고 두 발은 나쁘다. 


 돼지들이 감독과 지휘를 맡게 되니 자연스럽게 핵심 동물 무리가 되어갔다. 다른 동물들 몰래 그들 자신의 특권을 하나씩 챙겨가기 시작했다.  


"(...) 이 농장의 경영과 조직은 전적으로 우리 돼지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 그러므로 돼지들이 우유를 마시고 사과를 먹어야 하는 것은 바로 '여러분의' 이익을 위해서입니다. (...)" 


 그들은 다른 동물 무리에 비해 똑똑했기에 지식을 독점할 수 있었다. 남들이 불만을 표시해도 돼지들은 현란한 말솜씨와 어려운 서류를 들이밀며 그들의 정당성을 설파했다. 그렇게 점점 동물농장에는 권력의 그늘이 드리워졌다. 


 돼지 무리의 우두머리로는 '스노볼'고 '나폴레옹'이 있었다. 그 둘을 각각 따르는 세력은 비등비등하여 비슷했고, 서로는 앙숙처럼 의견이 맞는 날이 없었다. 그러나 저울이 기울어지는 것은 한순간이었고,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나폴레옹' 측에서 몰래 키워놓은 아홉 마리 개들의 압도적인 무력 때문에 '스노볼'은 그만 동물농장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스노볼'은 동물농장의 번영을 위해 노력했던 인물이었다. 근로시간 단축, 전기 생산과 풍요로운 미래를 위해 풍차 건설을 추진했으나, 늘 '나폴레옹' 세력에 의해 묵살되었다. 묵살됐던 의견은 '스노볼'이 추방당하자마자 '나폴레옹'의 생각인 것으로 둔갑되어 동물농장에 퍼졌다. 권력의 그늘은 탐욕이 되어 동물농장을 이미 겉잡을 수 없이 뒤덮고 있었다. 


 '나폴레옹'의 군사 반란 이후 동물농장은 많은 것이 변했다. 다른 동물은 이제 돼지에게 예의를 갖추어야 했다. 돼지는 의복을 입기 시작했고 최초 작성했던 일곱계명은 하나하나 몰래 수정되었다. 그리고 동물농장에 해가 되는 모든 사건의 원흉은 '스노볼'의 계략이라고 쉽게 설명되곤 했다. 


 지배가 익숙해진 동물은 무기력해졌다. 돼지들이 두 발로 스고 앞발굽에 회초리를 들고 다녀도 '존스'가 농장주였던 때보다 나았지 하며 넘기고 말았다. 스스로 농장의 주인이라 여기고 있던 동물들이었으나 실상은 다른 인간이 다스리는 농장의 동물보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영국의 어느 농장 동물보다도 일은 많이 하면서 먹기는 적게 먹는 효율성을 발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동물농장은 이제 인간의 관심을 끌기 충분했다. 적은 식량 배급, 높은 업무 강도라는 농장주들이 바라는 경영방식으로 농장을 이끌어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제 돼지의 탐욕은 인간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 누가 돼지고 누가 인간인지, 어느 것이 어느 것인지 이미 분간할 수 없었다. 


  네 발은 좋고 두 발은 더 좋다. 


 본작은 정설적인 해설본이 있는 편이다. '나폴레옹'은 스탈린, '스노우볼'은 트로츠키와 일대일로 대응한다. 나머지 인물과 일련의 사건도 비슷하게 풀어낼 수 있다. 인물과 사건에 대한 비유를 통해 당시 소련의 행보를 비판하며 풍자한 내용을 직접적으로 드러냈다. 이런 정보를 익히 알고 있어도 막상 본작을 다 읽어보면 과거 이야기로 치부하며 책장을 덮기에는 찝찝한 구석이 남아있다. 그것은 아마 현재 자본주의 시장과 겹치는 부분이 일부 있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개인의 이기심은 무시될 수 없다. 모두 욕심이 있고 그 욕심이 성장의 원동력이 되었을 때 경쟁에 불이 붙는다. 노력했을 때 얻을 수 있는 보상, 거기에는 과정 속 공정성이 아주 중요하게 작용한다. 그런데 언제부터 순수한 경쟁은 타락했다. 과정보다는 결과를 우선시했다. 능력주의가 만연하게 된 것이다. 돼지들은 다른 동물보다 똑똑해 지식과 권력을 선점했으나, 동물농장에 있는 모든 동물들도 마찬가지로 그들의 유토피아 건설을 위해 노력했다. 피땀 흘리며 몸을 움직인 것은 돼지가 아닌 다른 동물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누가 더 큰 보상을 받아야 하는지 따져본다면 어려워질 수 있다. 애초에 동물을 규합한 건 돼지가 맞기에 그렇다. 

 선천적인 능력 덕에 큰 노력 없이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는 부류가 있을 수 있다. 또, 비슷한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훨씬 많은 노력을 해야 하는 부류도, 어쩌면 아무리 노력해도 그들의 성과에 미칠 수 없는 부류도 있기 마련이다. 모두 출발 지점은 다를 수밖에 없다. 세상은 평등하지 않다. 그렇다고 공정하지 않은 것을 이해할 순 없다. 불평등이 곧 불공정이라는 말은 절대 아니다. 무조건적인 평등은 노동의 가치를 폄하시킬 수도 있다. 적게 일하나 많이 일하나 비슷한 급여라면 대부분 적게 일하는 쪽을 택할 것이다. 과정이 투명하길 바란다. 투명한 과정 속 발생한 불평등은 많은 이들에게 당연한 결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상식이기 때문이다. 


-도서 정보 


출판사 : 민음사

작가 : 조지 오웰

옮긴이 : 도정일


-참고 자료


장용경, 풍자(諷刺)와 우화(寓話) 사이에서 ―한국에서의 『동물농장』 번역의 정치,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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