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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용 Mar 14. 2022

'악'의 탄생

라쇼몽 서평


 대개 인간은 주변환경에 영향을 받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종종 발견할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살아가면서 겪은 일에 따라 개인의 식견은 달라진다. 예를 들어, 집안 대대로 의사를 배출하며 학업에 관심이 많은 가정이라면 아이는 자연스럽게 공부하며 의사를 꿈꿀 수 있다. 만약 근처 학원도 없고 농사가 생업인 환경이라면 아이는 그런 분야로 진로를 정할 확률이 조금이라도 높아질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의견은 변수도 많고 자신의 가정환경에 대한 반발로 정반대 방향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반대를 선택하는 것 또한 자신의 주변환경에 대한 반작용이니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부정하긴 어렵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소설 '라쇼몽'(이하 본작)은 황폐하고 극단적으로 피폐한 환경 속 인간상을 그리고 있다. 본작을 읽으면 한 사람의 신념이 무너지는 순간이 너무 허무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 수 있다. '스스로 다짐했던 것이 몇 가지 사실로 와해하여 의미가 없어지면 이토록 쉽게 포기해도 괜찮단 말인가?'라는 의문을 품고 본작을 찬찬히 살펴보고자 한다.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면…… (...) 당연히 그 뒤에 붙어야 할 '도둑이 될 수밖에 없다'라는 것을 적극적으로 긍정할 만한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인'이 처음 라쇼몽에 당도했을 때는 위태롭지만 옳은 정신을 함양하고 있었다. 당장 허기를 채우기 위해 타인에게 피해를 주고 자신에게 당당하지 못하는 행동을 실천에 옮기는 것은 죽음보다 불명예스러운 것이라고 간신히 판단한 것이다. '하인'은 인간에게는 어떻게든 생명을 연장하며 하루하루 이어나가는 것보다 그 이상의 숭고한 가치가 있다고 믿었다. 생존보다 더 높은 형이상학적인 가치, 그것은 '하인'이 간직하고 있던 신념이기도 했다.


  굶어 죽을 것인가 도둑이 될 건인가의 문제를 새삼스럽게 꺼낸다면, 아마 하인은 아무런 미련도 없이 굶어 죽는 것을 선택하였을 것이다.


 라쇼몽은 한 폭의 지옥도 같았다. 교토는 쇠퇴하고 상황이 어려져 '하인'도 주인댁에서 쫓겨났다. 또, 전염병이 돌아 죽은 시체들은 라쇼몽에 너저분하게 쌓여있었다. 라쇼몽은 도적의 소굴이 되기도 하는 공간이며, 지옥문과 겹쳐 보이기도 한다. 이때 '하인'은 '노파'를 발견한다. 널브러진 시체 위를 걸어 다니는 '노파'가 한 여인의 시체 앞에 멈춰 주섬주섬 무엇인가를 챙기는 모습을 보게 된다. '노파'는 여인의 시체에서 머리카락을 뽑고 있었다. 이에 '하인'은 분노한다. 단순히 '노파'에 대한 분노를 넘어 모든 악에 대한 증오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한 가지 안타까운 사실은 '하인'은 '노파'를 만나기 전 도둑이 되어야 하나 고민했던 사실에 관해 어떠한 반성도 부끄러움도 없었다는 것이다.


 '하인'은 '노파'에게 다가가 왜 여인의 시체에서 머리카락을 탐했는지 이유를 물었다. '노파'는 칼을 뽑고 말하는 '하인'을 두려워하며 말을 이어갔다. 그때 '하인'은 '노파'의 생사를 손에 쥐고 있단 사실에 일종의 우월감마저 느꼈다. '노파'는 가발을 만들기 위해 그랬다고 말했다.


 "하긴 그려. 죽은 사람의 털을 뽑는다는 건 나쁜 짓이겄지. (...)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으면 굶어 죽었을 테니 어쩔 수 없이 한 것이겄지. 그러니 지금 내가 하던 짓도 나쁘다고 생각지 않어."


 '노파'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말을 덧붙였다. 자신이 머리카락을 뽑던 그 시체는 사실 생전 사기행위를 일삼던 악인이라는 것이었다. '하인'은 '노파'의 말에 용기를 얻었다. 슬프지만 용기는 늘 사람을 긍정적인 쪽으로 이끌지만은 않는다. '하인'은 노파의 옷을 벗기고 노파를 발로 차 시체들 위로 쓰러뜨렸다. '하인'은 유유히 사라졌다. 한 사람의 신념이 촛불 꺼지듯 사라졌다. 라쇼몽은 그렇게 지옥에 한 발짝 더 가까워졌다.


 밖에는 오로지 깊은 동굴처럼 새카만 밤이 보일 뿐이었다.


 그야말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새카만 밤에 '하인'은 '노파'의 옷을 빼앗고 자처해서 라쇼몽 너머 존재하는 지옥으로 걸어갔다. 이제 '하인'은 어디에도 없다. 평범한 도적 혹은 지옥에 어울리는 악인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하인의 행방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삶은 소중하다. 본인의 삶이 소중한 만큼 타인의 삶도 소중하다. 자명한 사실이지만 우리는 가끔 착각한다. 본인의 삶이 더 소중하다는 명분을 만들며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 타인을 파괴하려 든다. 명분은 다양하다. 가정환경, 살아온 배경, 과거의 경험 등 어긋난 자기 합리화는 인간을 타락으로 인도한다. 타락한 인간은 옳고 그름을 구분하지 못한다. 그저 개인의 이익을 위한 선택을 반복하며, 그 과정 속 타인의 파멸은 고려하지 않는다. '악'은 늘 방심했을 때 내면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본작은 염세주의적이며 허무주의적인 성격을 띤다. 어쩌면 라쇼몽을 시체로 뒤덮은 전염병보다 무서운 것은, 인간의 타락을 긍정하는 시대 분위기가 전염병처럼 퍼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프랑수아즈 사강은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고 말했다. 파괴의 권리가 있다면 권한은 딱 그 정도일 것이다. 우리가 악인이 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이유 따윈 없다. 자기 합리화가 반복되기 전에 스스로 질문을 던져보는 것이 좋다. '이토록 쉽게 포기해도 괜찮은가?'


-도서 정보


 출판사 : 문예출판사

 작가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옮긴이 : 김영식


-참고 자료


김옥지, 라쇼몽 효과의 현대적 수용과 원형적 의미 아쿠타가와의 라쇼몽과 덤불 속을 중심으로, 2019


안영순, 아쿠타가와의 소설 『라쇼몽』과 『덤불 속』의 영화적 변용,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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