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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용 Mar 17. 2022

해석의 차이

덤불 속 서평


 2022년을 포함하는 요즘은 입체적인 시대라 할 수 있다. 포스트 모더니즘이 심화하면서 우리는 기존 괄시받던 소수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선악 구도로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이분법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이해와 포용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제는 하나의 사건을 갖고도 명확하게 딱 떨어지는 분석보다는 다양한 의견 공유를 선호하기도 한다. 물론 과학 이론이나 수학 공식처럼 정답이 필요한 분야는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인문학적 소양이 요구되거나 가변적인 가치를 논할 때는 선입견을 버리고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 채 대화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할 수 있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단편 소설 '덤불 속'(이하 본작)의 내용은 단편 영화로도 내용이 널리 알려져 있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라쇼몽'은 동명의 소설과 본작의 서사를 엮어 재구성한 작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영화를 통해 '라쇼몽 효과'라고 명명된 현상이 있는데, 이는 소설 '라쇼몽'보다는 본작 내용에 더 가깝다. 여기서 '라쇼몽 효과'란 같은 사건을 두고 서로 다른 입장에서 해석해 본질을 다르게 인식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본작에서 발생한 사건이자 명백한 사실은 '다케히로'의 죽음이다. '다케히로'는 부인인 '마사'와 함께 산을 넘다 변을 당한다. 이 사실을 둘러싼 인물들의 증언이 다른데, 이는 본작의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먼저 이해당사자가 아닌 나무꾼, 탁발승, 호멘(범죄자 수색 및 호송 담당)은 사건의 핵심과는 거리가 있는 진술을 한다. 단순히 인상착의만을 말하기도 하고 본인의 추측을 주장하기도 한다.


  정말로 인간의 목숨이라는 것은 이슬처럼 허망하고 번개처럼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이네요.


 수사는 허망한 죽음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더욱 직접적으로 연관이 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간다. '노파'는 죽은 남자의 장인어른이다. '노파'에 의하면 '다케히로'는 무사이고, '마사'는 자존심이 세고 '다케히로' 외에 남자와 사귀어 본 적 없는 여인이다. 제공된 정보를 토대로 세 가지 진술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다조마루'는 '다케히로'를 죽인 범인이고 도적이다. '다조마루'의 동기는 분명했다. '마사'를 빼앗기 위해서였다. '다조마루'는 보물이 있다며 '다케히로'를 덤불 속으로 유인하고 기습했다. 욕심에 눈이 먼 '다케히로'는 허무하게 제압당하고 삼나무 밑둥에 밧줄로 묶였다. '다조마루'는 다시 덤불 속으로 '마사'를 데려왔다. 그러고 나서 '마사'를 유린했다. '다조마루'는 유유히 떠나려 하는데 '마사'는 그런 '다조마루'를 붙잡았다. 남편 눈앞에서 치욕을 당한 '마사'는 '다조마루'와 '다케히로' 둘 중 한 명은 죽어야 한다고 말했다. 어느 쪽이든 살아남은 남자를 따라가겠다고 한 '마사'는 거의 미쳐있었다. '다조마루'는 '다케히로'의 결박을 풀고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겨뤘다, 패배한 '다케히로'는 죽고 말았다. '다조마루'는 승부가 끝나고 주위를 둘러봤지만 '마사'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마사'의 참회는 '다조마루'와 달랐다. '다조마루'에게 욕보인 '마사'는 '다케히로'에게 비틀거리며 달려갔다. 그때 '다케히로'의 눈빛에는 경멸이 묻어있었다. 순결을 잃은 자신의 부인을 증오하는 듯했다. 차가운 표정에 '마사'는 일격을 맞은 것 같다 표현했다. '다케히로'는 입에 낙엽이 가득 들어있어 소리는 내지 못했지만 입모양으로 "죽여"라고 했다. '마사'는 그런 '다케히로'의 가슴에 단검을 꽂아 넣었다.


 죽은 '다케히로'는 무녀의 입을 빌려 진술했다. '다조마루'는 '마사'에게 몹쓸 짓을 한 후 '마사'를 교묘하게 꼬득이고 있었다. '다케히로'는 말을 할 수 없었지만, '마사'에게 몸짓과 입 모양으로 속지 말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때 '다케히로'는 '마사'가 '다조마루'를 따라가겠다고 하는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심지어 '마사'는 '다조마루'를 따라가기 전, '다조마루'에게 '다케히로'를 죽여달라고 말했다.


 세 이야기는 같은 부분을 공유하긴 하지만 본질적으로 다른 지점이 있다. '다조마루'는 과시욕, '마사'는 정당성, '다케히로'는 명예를 위한 왜곡이라 볼 수 있다.


 '다조마루'는 무인인 '다케히로'와 정정당당한 승부를 겨루고 칼이 23번 부딪힌 끝에 결말이 났다는 것을 강조했다. 사건의 발단 자체도 아름다운 '마사'를 쟁취하고 싶다는 욕구에서 비롯됐다. 본인의 결함을 외부로부터 채우려는 욕망은 과시욕으로 발전할 여지가 있다.


 '마사'는 과부가 된 자신의 처지를 설득시키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살인자인 '다조마루'를 따라갈 수 없으나, 치욕을 당한 상태에서 본래 남편인 '다케히로' 곁에 남을 수도 없었다. 본작이 1922년에 발표된 것을 감안했을 때, '마사'의 선택은 시대적 분위기에 의한 강압적인 것이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다케히로'는 결국 도적 '다조마루'와의 싸움에서 패배했고 아내를 빼앗겼다. 비겁한 수 때문에 당했다고 하더라도 무사 입장에서는 불명예스러운 일이었다. 명예를 중시하는 무인에게 불명예란 죽음과 일맥상통한다. '다조마루'에게 '마사'가 욕보인 순간, 사실상 '다케히로'는 이미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건조한 시선으로 사건을 바라보면, 세 사람이 아무리 주장을 달리 해도 '다케히로'의 죽음이란 결과가 달라지진 않았다. 그러나 사건이 내포한 의미가 달라졌다. 억울함을 호소하며 자신의 행동에 대한 변호를 위해 일부를 비틀었다. 그들에게 '다케히로'가 죽었다는 사실보다는 누구에게 죽었는지가 중요했고, 이에 대한 진술을 좁혀지지 않았다. 육체적인 죽음 위 어떤 형이상학적 가치의 죽음이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단지 저는 죽일 때에 허리에 찬 칼을 사용합니다만, 나리는 칼을 사용하지 않고 권력 하나로 죽이고, 돈으로 죽이고, 까닥하면 세상을 위한다는 말 하나로 죽이시지요. (...) 나리가 나쁜지 내가 나쁜지 어느 쪽이 나쁜지 알 수 없죠. (비웃는 미소)


 개인의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일은 유리한 방향으로 왜곡되기 마련이다. 여럿이 교차 확인 후 기록하지 않은 모든 일에 과연 객관적 사실이라는 것이 존재할까? 하지만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타인의 이야기 대부분은 개인사다. 이런 점을 미루어 본다면, 우리 삶은 증명되지 않은 사실 속을 부유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본질을 난도질해 매도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차이라고 볼 수 없다. 해석은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과정이 되어야 하지 누군가의 이익을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본작을 읽고 자신을 뒤돌아봤을 때, 덮어 놓고 애써 무시한 일이 없는지 살펴보면 좋을 것이다. 그 속에 여태 모르던 생경한 진실과 가치가 숨어있을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도서 정보


 출판사 : 문예출판사

작가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옮긴이 : 김영식


-참고 자료


김옥지, 라쇼몽 효과의 현대적 수용과 원형적 의미 아쿠타가와의 라쇼몽과 덤불 속을 중심으로, 2019


안영순, 아쿠타가와의 소설 『라쇼몽』과 『덤불 속』의 영화적 변용,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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