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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용 Mar 21. 2022

끝, 시작의 이명

인형의 집 서평


 희곡을 읽는다는 건 퍽 매력적인 일이다. 머릿속으로 상상의 배우를 세운 뒤 그들의 치열한 연기를 숨죽이며 감상하는 작업은 새로운 자극이라 할 수 있다. 대사만으로 주요 서사가 진행되니 오히려 몰입은 소설보다 뛰어나기도 한다. 그것이 종종 가볍게 희곡을 읽는 이유다. 무대 구성이나 장치 등에 관한 전문적인 비평은 어려우나, 소설 읽듯 담긴 이야기를 나름 해석해 풀어내는 것 정도는 가능할 듯해서 이번 서평을 준비해 봤다.


 새로운 시도를 염두에 둘 때는 늘 짜릿한 긴장이 따른다. '잘할 수 있을까'란 고민은 배부른 것이고 '이렇게 하는 것이 맞나'가 개인적으로는 더 근본적인 걱정이다. 이번 서평의 시작도 사실 어떤 '끝'에서 출발한 것이다. 영화 비평을 고민만 하고 막상 쓰고 있지 않았는데 영화와 소설 중간 즈음에 있다고 할 수 있는 희곡을 먼저 해보면 어떨까 하는 그런 고민의 끝은, 도전을 낳았다.


 헨릭 입센에 따르면 희곡 '인형의 집'(이하 본작)은 '인간이 살아가야 하는 태도'가 무엇인지 얘기하고자 한 작품이라 했다. 그런 서사를 '노라'의 각성을 통해 풀어내고 있다. 대부분 문학 작품은 독자의 해석에 따라 의미가 변하곤 한다. 본작도 이러한 주제 의식보다는 여성해방이라는 의미에 더 무게가 실리는 편이다. 실제로 작가는 여성해방동맹이 주최한 파티에 초대됐을 때, 이러한 말을 했다고 한다. "(...)여성해방을 위해서 공헌을 했다는 명예는 받을 수가 없습니다. (...) 제가 해온 일이란 인간의 살아가는 태도에 대해 묘사한 것뿐입니다."


 '노라'는 어렸을 때는 아버지의 인형으로, 현재는 남편은 '톨발'의 인형으로 존재한다. '톨발'은 이미 아이가 둘인 부인 '노라'를 다룰 때, 마치 한참 어린 아이를 다루듯 말한다.


  나의 귀여운 종달새는 다시는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되오. 종달새는 맑은 목소리로 지저귀지 않으면 안 되는 거요.


 '노라'는 '톨발'에게 큰 용돈을 받으며 부유한 삶을 영위한다. 그러던 어느 날 옛친구 '린데 부인'이 '노라'를 찾아온다. '린데 부인'은 과부가 되었고 직장을 구하기 위해 '노라'를 찾은 것이었다. '린델 부인'과 '노라'는 그들의 삶을 주제로 얘기하다 '린델 부인'이 '노라'를 무시하듯 말한다. 세상 물정 모르고 자기만 아는 철부지라고 '노라'를 판단했기에 무심코 뱉은 말이었을 것이다.


 당신은 내가 아무런 어려움도 겪지 않고 편안한 생활을 하는 줄만 알고 있는 거예요.


 이에 '노라'는 반박한다. 정당한 반박은 아니었다. 실제 '노라'는 '린델 부인'의 말처럼 철없는 여인이었으니 말이다. 공감 능력이 떨어져 본인 입장에서만 얘기했다. 섣부른 공감과 어설픈 이해는 오히려 상대방에게 독이 된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린델 부인'에게 의도치 않은 공격을 내뱉어도 '린델 부인'은 견뎌냈다. '린델 부인'은 당장 '노라'를 설득해 '톨발'을 통해 직장을 구해야 했다.

 '노라'는 '린델 부인'에게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남편 '톨발'을 살린 적 있다고 깜짝 고백했다. 예전 '톨발'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중병에 걸렸을 때 치료비가 부족했었다. 그때 '크그스타'에게 돈을 빌린 적이 있었다. 이때 '노라'는 아버지의 서명이 필요했지만 허락을 구하지 않았다. 그렇게 '노라'는 몰래 서명했고, 이는 '크르그스타'에게 적발됐다.


 '노라' 홀로 지키기에 거짓은 거대했다. '크르그스타'의 편지에 의해 진실이 밝혀지자 '톨발'은 격노한다. 이제까지 지켜온 위상과 명예가 무너질 것이라 '노라'를 탓한다. 그때 새로운 편지가 도착한다. 모든 문제의 원흉인 차용증서를 보내준 것이다. '톨발'은 안심했다. 증거를 모두 없애고 다시 온화하게 '노라'에게 다가간다.


 노라, 내 맹세하리다, 나는 당신의 모든 잘못을 용서하였소.


 '노라'는 순식간에 돌변하는 '톨발'을 보고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냉정해졌고 이전과 다른 말투로 '톨발'에게 질문했다. 이제껏 부부로 살아온 8년 동안 우리가 진지하게 얘기한 적이 있었는지, 자신을 귀여운 종달새라고 부르며 인형 취급만 한 것은 아닌지, '노라'의 질문은 둘 사이 본질을 날카롭게 찌르고 있었다.


 당신들은 한 번도 저를 사랑한 일은 없었어요. 저를 좋아한다 좋아한다 하면서 즐기고 있었던 것뿐이라니까요


 '톨발'은 예전처럼 '노라'를 대하고 싶어 했다. '노라'는 그런 '톨발'에게 강하게 말했다.


낯선 사나이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낼 수는 없어요.


 본작은 19세기에 발표됐다. 지금보다 여성 인권이 낮았을 때 나온 작품이기에 여성해방에 대한 메시지로 보기에 적절할 수 있다. '노라'에게만 집중했으면 충분히 가능한 얘기다. '노라'는 스스로 인형이었다고 자각했다. 그러나 과연 다른 등장인물은 인형이 아니었을까 반문해봐야 한다.


 '톨발'도 마찬가지로 인형의 집 안 존재하는 인물이다. '노라'를 귀여워하며 인형 취급하지만, 그 자신도 상대역에 불과하다는 자각이 없다. 조금 다르게 보자면, 사회 안에 주어진 혹은 이루어낸 역할에 몰두하는 인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회적 지위를 지키기 위해 사랑하는 부인까지 버린다는 것은 사람이라고 하기 너무 잔인하다 생각이 들었다.


 '노라' 발걸음이 너무하다는 시각도 분명 있을 것이다. 다른 부분은 떠나서 '노라'가 자식까지도 두고 떠나는 장면은 작품이 발표된 당시에도 논란이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 '노라' 배역을 맡은 한 여배우는 자식을 버리는 여자를 연기할 수 없다고 해서 급하게 마지막 부분이 수정된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본작을 덮었을 때 '노라'의 새출발을 적어도 마음 한 구석으로는 응원할 수밖에 없었다. 여태 그저 존재만 해왔던 '노라'가 처음으로 살기 위한 발걸음을 내딛는 마지막 장면은 잔향이 진하게 남는다. 작품의 끝나고 본가로 돌아갔을 '노라'를 가만히 상상하게 된다. 그 이후 '노라'의 삶은 이제 독자에게 녹아들 것이다.


 희부윰하기만 한 미래를 향해 어떻게 발을 내딛어야 하나 고민이 될 때, 본작처럼 끝을 찾아보면 어떨까 추천해보고 싶다. '노라'가 무엇인가 깨닫고 '톨발'에게 탈출한 것처럼, 어떠한 끝은 새로운 시작을 낳을 수도 있다.



-도서 정보


출판사 : 문예출판사

작가 : 헨릭 입센

옮긴이 : 안동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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