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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용 Mar 24. 2022

피상적 가치, 그 너머의 것

아Q정전 서평


 우리는 늘 의미 있는 일을 하지는 않는다. 시간을 죽이기 위해 유튜브 쇼츠나 틱톡을 한없이 스크롤 하기도 하고 가만히 누워서 쉬기도 한다. 대다수 목적이 있는 휴식인 경우이긴 하다. 능률을 높이거나 더 좋은 결과를 거두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쉼이 대부분일 것이다. 언뜻 '그냥'이라는 이유로 대신하는 모든 행위는 사실 기저에서는 어떠한 목표를 향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사실 의미는 행동 이후에 부여해도 무관하다. 우선 쉬다가 갑자기 공부를 하게 되었다면 공부를 하려고 쉬었던 것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의미의 존재 여부보다는 의미의 가치에 더 관심을 둔다. 


 루쉰의 단편소설 '아Q정전'(이하 본작)은 단편소설집 '눌함'에 수록된 작품이다. 본작은 신해혁명을 토대로 당시 중국 국민과 혁명을 비판했다. 상술한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려면 중국 역사에 관한 언급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본 서평에서 다루고자 하는 내용은 본작이 갖는 형이상학적 가치이기에 중국 역사 관련 의견은 배제하려 한다.  


 본작의 주인공인 '아Q'는 최하층민이다. '웨이짱'이라는 시골 마을에 살았는데, 심지어 이름 한자도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를 '아꿰이'라고 불렀고 그로 인해 정전에서도 '아Q'라고 기재한 것이다. 집도 없고 고정적 수입도 없어 마을 주민들은 '아Q'를 무시하고 홀대했다. '아Q'는 옳은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예의 없고 거짓을 일삼으며 자신보다 약해 보이는 자는 탄압하기도 했다. 소설을 읽는 독자 입장에서 '웨이짱' 주민과 '아Q'를 보면 악인이다 라는 판단을 하기 전 무지한 사람이라는 감상이 먼저 다가온다. 루쉰은 이러한 지점을 통해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한 사회의 단면 혹은 도덕의식이 결여된 사회의 단상을 보편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반드시 짜오타이옌 같은 유명 인사와 관계되어야만 비로소 인구에 회자될 수 있었다. 


 사람들의 이목을 끈 것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 죄의 무게 따위가 아니라 그저 가십거리였을 수도 있다. 겉으로 보여지는 사실이 자극적이면 속에 들어있는 내용은 크게 염두에 두지 않았다. '웨이짱'에서 힘깨나 쓴다는 '짜오타이옌'이 '아Q'의 뺨을 때렸다. '아Q'가 '짜오타이옌'과 같은 '짜오'가의 사람이라고 말하며 더 나아가 '짜오타이옌'의 아버지라고 자신을 소개한 것 때문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문이라 주민들은 믿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 '짜오타이옌'을 상대로 이런 거짓말은 하는 것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마음속에서 '혹시 진짜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피어나기도 했다. 그런 연유에서인지 그 이후 '아Q'에 대한 평판이 좋아진 것은 아이러니다. 


'아Q'의 정신승리법은 그의 정신적인 생존법이다. 자신의 패배를 직감하고 현실이 되어도 되려 정반대 상황으로 바꾸는 거의 기적에 가까운 비법이다. 단점은 본인 혼자의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개념이라 타인의 시선에서 보면 똑같은 패배자임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아Q' 스스로 정신승리를 했다한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정말 최소한의 위안일 뿐이다. '아Q'의 정신승리는 논리적이지도, 명예롭지도 않다. 나름대로 의미는 있다. 비루한 패배자가 되느니 망상 속에서는 당당한 승리자가 되는 것이 아마 나을 수는 있다. 본질적인 변화를 꾀하지 않고 맘 편히 속으로만 상상하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지만 말이다. 


 '아Q'는 성내에 잠시 머물다 '웨이짱'으로 돌아왔다. 성내의 '거인'이라는 사람 밑에서 일하다 온 '아Q'는 이제 갑부가 되어 있었다. 이제 '아Q'는 '웨이짱'에서 '짜오타이옌'과 거의 대등한 대우를 받았다. 그런 '아Q'의 귀에 혁명이라는 단어가 들렸다. '아Q'는 흰 투구와 흰 갑옷을 입은 혁명당원이 멋있고 보였다. 또, 혁명당에 소속되면 평소 눈엣가시였던 '짜오타이옌'을 포함한 마을 주민을 발밑에 둘 수 있다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야 왜 내 몫은 없단 말인가? 


 '아Q'에게 있어 혁명의 의미는 개인의 이익과 가까웠다. 시대를 개혁해야 한다는 사명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후 세대가 배우는 혁명은 마치 당대 모든 인원의 열망과 기원으로 이루어진 것 같았지만, 본작에서 표현된 혁명이 더 사실적으로 느껴졌다. 혁명의 큰 뜻을 이해하기엔 '웨이짱'의 주민과 '아Q'는 무지했을 것이고, 지금처럼 교육의 기회균등이 보장되지 못했기에 당연했을 수 있다.  


 '아Q'는 '웨이짱' 근방의 혁명당을 주도하는 '양선생'을 찾아갔지만 거부당해 결국 혁명당원이 되지 못했다. '아Q'는 슬퍼했다. 혁명당을 통해 꿈꿨던 이상이 부서진 것에 상심했다. 그 후 '아Q'는 본보기가 되어 총살당했다. 총상 당할 정도의 죄를 짓지는 않았다. 오명이었으나 그 이후 '웨이짱' 주민은 '아Q'가 큰 죄를 지었다고 믿었다. 그러지 않으면 총살까지는 당하지 않았을 거라 믿었기에 그랬다. 

 혁명의 혜택은 '아Q'에게 돌아가지 못했다. 자격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보통의 혁명은 우두머리를 숙청하지 '아Q'처럼 애매한 자가 대상이 되지는 않는다. 누구를 위한 혁명이었고, 혁명의 주체에 소시민은 포함되지 않았던 것일까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역사학적 지식이 필요한 부분이니 정확한 비판을 하긴 어렵겠지만, 대를 위한 소의 희생, 혁명이라는 사명 속 소외된 자들의 현실 정도가 떠올랐다. 그만큼 '아Q'의 죽음은 애석했다. 


 피상적 가치에만 몰두하면 놓치게 되는 것이 많다. 소소한 위안을 위한 정신승리나 주민들이 '아Q'의 겉만 보고 대한 태도도 모두 중요한 것이 부재되어 있었다. 본질적인 부분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의미는 부여하기 마련일까? 그저 결과에 가까워지거나 결과가 나왔을 때, 이런 의미를 갖다 붙이면 그럴싸하겠다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적당히 만들어내면 되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자신이 피상적 가치에 빠져 있지는 않나 반성해보면 좋을 것이다. 피상적 가치, 그 너머에는 각자가 더 관심을 갖는 형이상학적인 것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은 필시 임시방편으로 꾸며낸 것보다는 훨씬 가치가 있을 것이 분명하다. 


-도서 정보


출판사 : 문예출판사

작가 : 루쉰

옮긴이 : 정석원


-참고 자료


이시찬, 아(阿)Q정전(正傳) 의 양가성(兩價性) 연구, 2021


홍석표, 루쉰(魯迅)의 아Q정전(阿Q正傳)의 서사 전략,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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