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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용 Mar 31. 2022

존재 가치의 증명

변신 서평


 현 시각 지구에 현존하는 인간은 수십억 명이 넘을 것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약 79억 명 가량이라 하니 쉽게 와닿지도 않는 큰 숫자라는 것만 어렴풋이 알 뿐이다. 세상에는 이토록 많은 사람이 개인의 삶을 개척해 나가고 있다. 누군가는 풍족한 환경에서 인생을 영위하고, 누군가는 극심한 가난 속에서 연명한다. 조건은 다를 수 있지만 결코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우리 모두는 각자 존재 가치를 지닌다는 것이다. 

 

 존재 가치의 종류는 매우 다양할 것이다. 약 79억 명의 사람이 있다 했으니 대략 79억 가지가 될 수도 있다. 한 명 한 명에게 녹아든 고유의 가치는 우위를 가릴 수 없다. 존재 가치는 누가 정해주는 것이 아닌 스스로 결정해야 비로소 빛나는 것이다. 그 소중한 가치를 잃는다면 인간은 미물과 다를 바 없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변신'(이하 본작)은 존재 가치에 대한 회의와 상실로 파멸한 한 인간의 말로를 그린 작품이다.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기분으로 잠에서 깨어난 그레고르 잠자는 자신이 흉측스런 벌레로 변해버린 것을 발견했다 


 '그레고르'는 어느 날 갑자기 벌레가 되었다. 하룻밤 새 일어난 급작스러운 변화는 말 그대로 변신이었다. 4인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정도로 꽤 능력 있던 영업사원이었던 '그레고르'는 일순 가족들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변신한 당일, 어쨌든 회사 입장에서는 무단결근한 '그레고르'에게 상사인 지배인이 찾아왔다.  


 그레고르의 장래와 그의 가족의 장래는 이 사람을 설득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레고르'는 지배인에게 애걸복걸했다. '그레고르'가 실직하면 그간 지켜왔던 가정의 화목은 깨지고 말 것이 분명했다. 5년 전 사업이 파산하고 허송세월 하는 아버지, 천식을 앓고 있는 어머니, 음악학교에 보내야 할 여동생의 일상은 '그레고르' 없이 지속되긴 힘들어 보였다. 이런 안타까운 상황은 애석하지만, 그들만의 것이었다. 흉측한 해충이 된 '그레고르'를 이해할 회사는 없었다. 지배인은 '그레고르'를 보자마자 도망가 버렸다. 


 어느 날엔가 지배인에게도 지금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과 똑같은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그때 문득 '그레고르'는 지배인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이는 지배인뿐 아니라 모든 '그레고르' 같은 헌신적인 가장을 염두에 둔 것이었으리라. '그레고르'는 벌레가 되어 실직한 것이지만, 순서가 뒤바뀌어도 별 차이가 없을 것이라는 것을 이때부터 깨달았을 수도 있다.  


 문이 잠겨 있었던 아침 나절에는 저마다 들어오고 싶어 안달이더니 문을 열어놓은 지금에 와서는 아무도 들어오려 하지 않았고, 반대로 밖에서 열쇠가 잠겨 있었다. 

 

 아버지는 벌레가 된 '그레고르'를 방 안으로 밀어 넣었다. 직장인이었던 '그레고르'를 찾는 이는 많았지만 실직자 해충이 된 '그레고르'를 찾는 이는 없었다. '그레고르'는 그 후부터 스스로 고립됐다. 방 밖으로는 나가지 않고 여동생이 주는 밥을 먹으며 생명만 겨우 유지하는 수준이었다. '그레고르'가 사라진 집안은 조금씩 변해갔다. '그레고르'의 걱정과는 달리 집안 분위기는 나름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레고르'가 사라진 후 '그레고르'가 여태 맡았던 역할은 자연스럽게 가족들이 나눠가졌다.  


 폐인처럼 지내던 아버지는 은행에 취직했다. 큰 벌이는 아니었지만 생계에 충분한 도움을 주었다. 아버지는 집에서도 제복을 벗지 않았다.  


 아버지는 집에서조차 윗사람들의 명령을 대기하며 언제라도 심부름을 각오하고 있기나 하듯이 제복 차림으로 의자에서 조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제복은 존재감을 증명하기 위한 도구 같은 것이었다.  


 여동생은 '그레고르'의 흉측한 외형에도 별다른 공포심을 느끼지 않았다. 변신 당일부터 '그레고르'를 도맡아 식사를 챙겨줬다. 작은 가게에 점원으로 취직하기도 했지만, 특히 '그레고르'를 챙기는 것에 대해 강박적으로 집착했다. 한 번 어머니가 말없이 '그레고르'의 방을 청소했을 때, 여동생은 어머니에게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 마치 자신의 영역에 침범한 침입자에게 하는 경고 같았다. 그 후 여동생만이 '그레고르'를 돌보았다. '그레고르'의 방이 아무리 더럽고 먼지가 돌아다녀 '그레고르'의 몸에 붙어 있어도, 여동생이 치우지 않으면 누구도 건드릴 수 없었다. 여동생에게는 실제로 잘 관리하고 있는지 여부보다 주어진 역할 그 자체가 중요했다. 


 어머니도 양장점에서 의뢰 받은 속옷을 수선하며 희미했던 가족 구성원 모두에게 존재감이 피어났다. '그레고르'는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여동생과 어머니는 '그레고르'의 방을 지금 벌레인 모습에 맞게 텅 비우려고 했다. 사람이 살던 때나 필요했던 가구들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기도 했고, 그것들은 '그레고르'의 통행을 방해하기만 할 뿐이었다. 


 저들은 내 방을 비우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모든 것을 탈취하고 있다. 


 '그레고르'는 하나씩 가구를 빼고 있는 여동생과 어머니 몰래 그림 위에 올라탔다. 고작 그림 하나를 지키기 위한 행동이 아니었다. 그것마저 잃으면 큰 일이 날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거대하고 흉측한 벌레의 전신을 처음 본 어머니는 그런 '그레고르'를 보고 기절하고 말았다. '그레고르'의 가정 내 위치는 자명했다. '그레고르'는 불쾌한 벌레일 뿐이었다. 


 그래도 '그레고르'에게 좋은 점이 하나는 있었다. 일에 미쳐 살았던 시절에는 가족과 같이 시간을 보내기 쉽지 않았다. 물론 그때와 같은 따듯하고 오손도손한 대화를 하지 않겠지만, '그레고르'는 식구들이 저녁에 나누는 대화를 지켜볼 수 있다는 사실에 나름 만족했다.  


 각자 가정에 충실히 돈을 보태고 있어도 벌이가 부족해서 하숙을 시작했다. 큰 집을 팔고 이사를 가고 싶었으나 '그레고르' 때문에 그러지도 못해 하숙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하숙으로 들어온 사람에게 '그레고르'의 존재를 들키지만 않으면 문제는 없을 터였다.  


이제까지 살아오는 동안 한 번도 하숙을 친 일이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하숙인들에게 지나칠 정도의 예의를 갖추었다. 


 주인 행세가 어설픈 아버지는 하숙인들의 기분을 맞추려고 노력했다. 여동생을 불러 바이올린을 키게 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레고르'가 듣기에 그런 여동생의 연주는 훌륭했다. 그러나 연주의 관객이어야 할 하숙인들은 만족하지 못했다. 이내 관심을 끄고 방으로 돌아가려 할 때, '그레고르'는 분노했다. 


  이렇게 음악 소리에 감동을 느끼는 자도 짐승이란 말인가? 


 '그레고르'는 분명 여동생의 연주에 감동을 느꼈다. '그레고르'가 보기에 아무런 감흥이 없는 저 무뢰한들보다 자신이 더 인간다웠다. '그레고르'는 이런 인간다움을 증명하고 싶어 그들 앞에 나타났다. '그레고르'의 뜻과는 달리 이런 행동은 하숙 계약 파기를 야기했다. 


"(...) 저는 이런 괴물 앞에서 그레고르라는 이름을 입 밖에 내고 싶지 않아요 (...)" 


 이제 가족들은 더 이상 '그레고르'의 만행을 용납할 수 없었다.


"(...) 만일 그레고르라면 사람이 저런 동물과 함께 살 수 없다는 것쯤은 벌써 알아차리고 자기 스스로 나가버렸을 겁니다 (...)" 


 '그레고르'의 존재 가치는 진즉 사라졌기에 더 이상 '그레고르'의 의사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버지, 어머니, 여동생이 나눠가져 껍데기밖에 남지 않은 '그레고르'는 발언권이 없었다. 그렇게 '그레고르'는 쓸쓸히 방 안에서 죽었다. 어쩌면 벌레가 된 그 날부터 '그레고르'는 죽어있던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늘 존재 가치를 증명하면서 산다. 무엇을 어떻게 증명할 지는 각각 선택에 따라 다르다. '그레고르'는 벌레가 된 순간 존재 가치가 증발했다. '그레고르'가 평생 지켜왔던 가치는 가족을 위한 헌신과 그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가정의 안위였다. '그레고르'는 분명 능력을 인정 받은 직장인이었고, 예술을 느낄 수 있는 인간이었지만 그것은 '그레고르'가 상정한 가치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보다 위에 있던 존재 가치의 상실은 '그레고르'의 사인이 되었다. 아니면 '그레고르'는 이미 알고 있었을 수도 있다. 상실할 수 가치를 떠받들며 살아왔던 그간 인생이 허무해서 자발적으로 포기했을 가능성도 고려해봐야 한다. 


 모든 결정은 존중받아야 한다. 비난 받을 것을 알고 하는 것, 그것을 비난하는 것, 사소한 것, 이상적인 것 등 모두 존재 이유가 있다. 유일하게 존중받지 못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결정하지 않고 그대로 냅두는 방치가 될 것이다. 흘러가게 내버려 두는 것은 '그레고르'처럼 거대한 벌레가 되는 것보다 존중받지 못할 수 있다. 우리네 삶은 늘 증명하는 연속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도서 정보


출판사 : 문예출판사

작가 : 프란츠 카프카

옮긴이 : 이덕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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