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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od Influence Sep 21. 2019

못 알아들었는데 알아들은 척 했다면 딱 거기까지!

“불분불계 불비불발(不憤不啓 不悱不發)”

잘 다니던 회사가 하루아침에 외국계 회사가 되었다. 우리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과의 일은 일상이 되어버렸다. 그저 ‘잘하고 싶다’, ‘잘 하면 좋지’하던 그네들의 말과 글은 목을 옭아맨 동아줄이 되었다. 상황이 이러니 그 줄을 잡고 올라갈지 목에 감고 고통스럽게 발버둥치며 반송장으로 살아야 할지 비자발적 결단이 필요했다.


결단을 한다고 입이 열리고 귀가 뚫리는 것도 아닌지라 숨이 차오르긴 매한가지여서 그들과의 만남자체가 고산(高山)을 오르고 물속에 있는 듯 힘이 들었다. 회사에서 녹을 받는 처지에 숨 찬다고 마냥 피해 다닐 수도 없으니 적당히 알아들은 척하며 되도록 많이 웃는 방법을 택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듯이 이 방법은 혜안이 되지 못했다. 의사결정에 실수가 생기고 업무에 차질이 생겼다. 가슴에 난 작은 구멍은 총상을 입은 듯 뒤로 갈수록 커져만 갔다.

나와 대화를 나누던 백인여성은 자상하게 말을 하다 계속 웃고만 있던 나를 보더니 내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헤이, 이건 질문이야. 내가 너한테 질문하는 거라고. 대답이 필요해!” 그날 퇴근길에 이러고 있는 내가 많이 없어 보이더라. 답답하다고 가슴이 터진 건 아니고, 숨이 막히지만 끊어진 건 아니니 또 그렇게 살면 살아질 줄 알았다. 스스로 줄을 잡고 풀려고 하지 않는 이상 목에 감긴 줄을 풀 수는 없는 일이었다.


논어에 ‘발분하지 않으면 계도하지 않고, 안타까워하지 않으면 깨닫도록 일러주지 않는다’ 하지 않았는가. 얼마나 더 못 알아듣고 분통이 터져야 알아보려고 할 것인가. 그러고 살았으니 이러고 있는 것 아니냐는 자조에 허물어졌다.


못 알아들었을 땐 알아들은척하는 것이 아니라 답답해서 속이 상해야 하고, 알 때까지 찾아야 계발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야 배울 수 있고 행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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