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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혜정 May 26. 2024

탈모를 이겨내는 건 여행?

<인생의 오후에는 적보다 친구가 필요하다>를 읽고

16년차 윤리 교사의 사적인 책 읽기. 책 속 한 문장과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씁니다.








위궤양을 이겨낸 건 여행이 아니라 걱정과의 이별이었다

<인생의 오후에는 적보다 친구가 필요하다>




"바비, 요즘 더 이뻐 보는데?" 

(바비는 신랑이 나를 부르는 애칭이다.;;)



신랑이 내 얼굴을 빤히 보며 말했다. 10년의 연애와 10년의 결혼생활, 도합 20년을 함께 하며 나에게 완벽히 적응한 멘트였다. 관심받는 걸 좋아하는 나는 시도 때도 없이 오빠, 오빠를 외친다. 신랑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면 할 말 없냐는 얼굴로 웃으며 바라본다. 그러면 "이쁘다!"라고 말해 줘야 하는 게 우리만의 암묵적 규칙이다.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는 본인이 먼저 "이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이 "머리숱이 좀 많아져서 그런가?"란다. 나는 "어떻게 며칠 만에 머리숱이 많아져요. 놀리지 마요."라고 퉁퉁거렸다. 그리고 "여기 수돗물이 안 좋아서 머리카락이 부스스해서 많아 보이는 거예요."라고 말했다. 



신랑은 머리숱이 참 많다. 머리카락이 얼마나 빽빽하게 나 있는지, 두피가 조금도 보이지 않을 정도다. 시아버지도 머리숱이 엄청난 걸 보면 머리 벗겨질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다. 반면 고시 생활로 교사라는 직업과 원형 탈모를 함께 얻은 나는 한 여름에 외출하고 돌아오면 정수리 부분이 빨갛게 익어있을 정도로 머리숱이 빈약하다. 머리를 많이 써서인지 걱정 근심이 많아서인지 30대 초반부터 흰머리가 나기 시작했고, 흰머리를 감추기 위한 잦은 염색으로 머릿결도 좋지 않은 편이다. 



그런데 갑자기 머리숱이 많아졌다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며 거울을 봤는데 아주 조금 정수리 부분이 안 보이는 것 아닌가! 거울 가까이 다가가서 머리를 살짝 숙이고 눈을 치켜뜨며 살펴보니 정말 솜털 같은 새 머리카락들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드라이할 때마다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빠졌는데, 요 며칠은 눈에 띄게 줄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가 뭘까? 아마도 햇빛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동남아에 여행 와서 하루 종일 햇빛 아래 걸어 다니고, 새로운 풍경과 음식, 사람들을 만났다. 고민이라곤 '뭘 먹어야 맛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신나게 놀까' 밖에 없었다. 그랬더니 집 나갔던 머리카락들이 조금씩 돌아온 것 같았다.



햇빛과 운동이 지닌 효과는 익히 알려져 있다. 햇빛을 받으며 적절한 신체 활동을 할 때 우리 뇌에는 BDNF라는 단백질이 만들어진다. BDNF는 뇌의 세포와 세포를 연결하는 작은 가지들인 시냅스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BDNF가 충분하면 기억력, 사고력, 창의력이 좋아진다. 반대로 BDNF가 부족하면 번아웃, 식욕 감퇴, 수면장애, 우울증 등 여러 가지 질병이 나타난다고 한다. (<리셋, 다시 나로 살고 싶은 당신에게> 참고)



<인생의 오후에는 적보다 친구가 필요하다>에는 사업가 해니의 이야기가 나온다. 해니는 사업상 극심한 스트레스로 심각한 위궤양에 걸려 병원에 입원한다. 하지만 불치병 선고를 받고, 먹을 수 있는 것이라곤 알칼리성 분말과 반 숟가락 정도의 밀크 크림이 전부였다. 게다가 아침저녁으로 위에 고무관을 집어넣어 위세척을 해야 했다. 



해니는 이렇게 죽음을 기다릴 바에 남은 시간 동안 하고 싶었던 일을 마음껏 해보기로 마음먹는다. 그리고 세계 일주를 떠나겠다고 다짐하고 아시아로 향한다. 이국의 낯선 음식을 거리낌 없이 먹고, 심한 풍랑에 죽음의 위기도 겪는다. 그러다 중국과 인도에서 빈곤과 기아를 마주하고, 자신이 걱정하던 사업상의 일들은 하찮은 일이었음을 깨닫는다. 미국으로 다시 돌아온 그는 불치병을 앓았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건강한 상태였다. 해니가 불치병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여행 때문이었을까? 책에서는 '걱정과의 이별'이라고 말한다. 



나의 탈모 극복도 여행 때문인 줄 알았으나, 사실 걱정과의 이별이 가장 컸을 것이다. 우리는 여행 중에 일상의 걱정은 잠시 내려두고 여행에 충실하려 노력한다. 충분한 햇빛 아래 평소보다 바지런히 움직이며, 삼시 세끼 심혈을 기울여 나에게 대접한다. 오늘은 어떤 즐거운 일이 있을지 기대하며 시작하고, 오늘도 잘 놀았다며 뿌듯한 마음으로 잠든다. 오롯이 나의 행복을 위해 움직이는 것이다. 여행이 특별한 이유는 별것 없다. 지금 이 순간 행복한 나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여행을 특별하게 만든다. 



여행에서 복귀한지 3주가 되어간다. 정수리에 솟아났던 여린 머리카락들은 어느새 사라졌다. 드라이를 하면 바닥에 나뒹구는 머리카락들은 다시 돌아왔다. 생각해 보면 별것 아닌 사소한 걱정 무더기들도 같이 돌아왔다. 정전기 포를 한 장 꺼내 밀대에 부착하고, 화장대 밑 바닥을 좌로 우로 왕복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머리카락들이 정전기 포에 달라붙었다. 



떨어져 나간 머리카락이 걱정들이라면, 나는 민머리가 되었을까? 민머리의 나를 상상하니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얼마 남지 않은 소중한 머리카락을 지키기 위해 일상을 여행처럼 살아 보겠다 다짐해 본다.



(좌) 여행 중 탈모를 극복하다! (우) 일상 복귀 3주. 다시 시작된 정수리 탈모와 흰머리 ㅠ_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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