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오글오글: 7월호 여름>
<월간 오글오글>은 글쓰기 모임 오글오글 작가들이 매 월 같은 주제로 발행하는 매거진입니다. 7월호 주제는 '여름'입니다.
어릴 적 나의 꿈은 개그맨이었다.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는 것이 좋았다. 관종끼도 다분했기에, 매 순간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웃길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을지 고민했다. 그런 나에게 여름이면 내세우는 주특기가 있었으니, 바로 수박 하모니카 불기다.
한 여름 낮의 뜨거운 열기가 식고 어스름이 시작되면 이웃집 사람들이 마당 평상에 모여들었다. 그러면 엄마는 내 머리통 두 배는 됨직한 수박을 가져왔다. 수박은 낮동안 마당의 고무 다라이에 얼음과 함께 둥둥 떠다니다 저녁이 되면 엄마 손에 꺼내졌다. 엄마는 커다란 수박을 평상 가운데 놓인 동그란 오봉에 놓은 뒤, 엄지와 중지를 모아 안부를 전했다. 마치 '실례합니다.' 노크를 하듯.
'똑똑!'
맑고 경쾌한 소리와 함께, 수박의 몸통에 잘 벼려진 칼이 꽂히면 쩍! 소리와 함께 수박이 절반으로 갈라졌다. 수박 한쪽은 엄마 손에 다른 한쪽은 은색 오봉에서 빙글빙글 돌다 멈췄다. 엄마는 반쪽짜리 수박을 세로로 정갈하게 잘랐다. 서걱, 서걱, 척, 척. 빨갛게 익은 수박이 반달 모양으로 쌓이면 '아이고, 달겠다. 잘 골랐네.' 같은 감탄이 튀어나왔다. 나는 쪼르라미 쌓인 수박 더미에서 가장 커다란 조각을 손에 쥐었다. 수박 하모니카를 멋지게 불기 위해선 누구보다 커다란 조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수박 하모니카를 부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반달 모양 수박을 야무지게 들고 왼쪽 한 입을 베어 문다음 와구와구와구와구 쉬지 않고 오른쪽 끝까지 입에 넣는다. 오른쪽 끝에 다다르면 멈추지 않고 왼쪽 끝을 향해 왁왁왁왁 쉬지 않고 내달린다. 왼쪽 끝에 다다르면 다시 오른쪽으로! 중간중간 수박을 목구멍으로 넘기는 것도 잊지 않아야 한다.
그렇게 하모니카를 불듯 쉬지 않고 수박을 먹으면 어른들이 박수를 치며 '어이구! 수박 킬러네, 수박 킬러!'라고 칭찬했다. 그러면 나는 뿌듯한 마음으로 입가에 흐르는 수박 국물을 팔뚝으로 쓰윽 훔쳐냈다. 그리고 까만색 수박씨를 퇫퇫 뱉곤 그중 제일 까만 녀석을 골라 인중에 붙이고 씨익 웃었다. 그러면 주변 사람들이 박장대소하며 웃었다. 나는 그 웃음소리가 좋아, 여름밤이 되면 수박 킬러로 변신했다.
나에게 여름은 수박맛 웃음소리가 나는 계절이다.
"7080 멋쟁이들의 아지트, 깜상! 어때?"
"헐..."
"누구보다, 남들보다 까맣게, 씨꺼먼~쓰! 어때?"
"와... 씨꺼먼쓰가 언제 적 얘기야."
"그럼 깔끔하게, 부시맨! 어때?"
"헉! 우리 세대나 부시맨을 알죠. 심각하다 심각해."
깜상, 씨꺼먼쓰, 부시맨의 공통점은? 까맣다는 것. 위 대화는 신랑 최와 '태닝숍 창업' 얘기를 하다 나온 우스개 소리다. 그렇다. 우리 부부는 태닝 애호가다.
나와 최가 태닝을 시작한 건 7년 전이다. 누구나 한 번은 꿈꿔 볼 '바디 프로필'을 찍어 보겠다며 피티숍을 다녔고, 어쩌다 보니 피트니스 대회에 나가게 됐다. 근육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처음으로 (기계) 태닝이란 걸 했는데 그 매력에 풍덩 빠져 버렸다. 지금은 태닝숍 창업을 꿈꾸는 지경에 이르렀다. (물론 돈이 없기 때문에 몇 년째 꿈만 꾸고 있다.)
까만 피부는 장점이 많다. 나의 경우 등산, 러닝, 사이클 등 야외 활동을 많이 해 탠라인(햇빛에 탄 까만 부분과, 타지 않은 하얀 부분의 경계선)이 생기는데, 이게 참 사람을 없어 보이게 만든다. 운동 종목에 따라 다양한 운동복을 입고 햇빛 아래 있다 보면, 운동복 길이에 따라 팔다리에 여러 줄의 탠라인이 생긴다. 인간 얼룩말이 된 기분이랄까. 그런데 꾸준히 태닝을 해두면 탠라인이 생기지 않고 고르게 구릿빛이 된다. 건강해 보인다는 칭찬을 듣는 건 덤이다.
그뿐이랴. 태닝은 피부 보호에도 효과적이다. 프리다이빙을 하기 위해 여름인 나라로 여행 가는 걸 즐기는 우리 부부에게 태닝은 고통을 없애주는 효자다. 비키니를 입고 프리다이빙을 하거나 하루 종일 해변에 누워 있다 보면 노출 부위에 일광화상을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역시 태닝으로 피부를 단련해 두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쩌다 보니 태닝 예찬 글이 되었지만, 태닝의 효과를 말하려는 글은 아니다.)
나는 특히 야외 태닝을 하며 책 읽기를 좋아한다. 바싹 말라 보송보송한 비치 타월, 태닝 로션의 진한 머스크향, 달궈진 피부 위에 얇게 펴 발라지는 태닝 로션의 촉감, 하얀 종이 위에 수 놓인 까만 활자들, 뜨거운 태양열과 푹푹 찌는 바다 내음, 출렁이는 파도에 몸을 맡긴 사람들의 신나는 웃음소리.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오감이 충족된다.
<일상생활자의 작가 되는 법>에서 태재 작가가 이런 말을 했다. "제가 영화관을 왜 좋아하는지 골똘히 생각해 본 적이 있는데요. 영화관에는 입구가 있고 계단이 있잖아요. 내 몸을 직접 움직이면서 영화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좋아요. 장면에 맞게 구성된 음악도 극대화된 음향으로 발산되고요. 그런 감각의 최대화를 누릴 수 있어서 영화관에서 보는 영화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태재 작가의 말을 보며, 내가 태닝을 왜 좋아하는지 깨달았다. 태닝에는 여름이 있다. 눈 부신 태양 빛과 푸른 바다, 모든 존재가 찜통에서 쪄진 것 같은 후끈한 냄새, 뚱땅거리는 트로피컬 뮤직과 신나는 웃음소리, 땀이 배어 나와 찹찹한 피부와 목구멍을 시원하게 넘어가는 얼음 맥주까지. 태닝은 감각의 최대화를 누릴 수 있는 활동이다. 온몸으로 한 계절을 느끼는 방법이다. 그래서 오늘도 '태닝숍 창업'을 초록 검색창에 넣고 한참을 온라인 바다에서 서핑했다. 생각만 해도 미소가 지어지는 미래!
나에게 여름은 중년의 꿈을 꾸게 하는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