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오글오글: 7월호 여름>
<월간 오글오글>은 글쓰기 모임 오글오글 작가들이 매 월 같은 주제로 발행하는 매거진입니다. 7월호 주제는 '여름'입니다. 아래 글은 오글오글 멤버 한라봉님 글입니다.
어린 시절 우리 집은 단칸방이었다. 커다란 방 한 칸에서 부모님과 나, 여동생 네 식구가 살았다. 그 방에는 옷과 이불을 넣어두던 장롱과 뚱뚱이 텔레비전, 선반, 냉장고 등 단출한 살림살이가 있었고 밥상이 항상 펼쳐져 있었다. 집 안에는 출입구 외에 또 다른 작은 문이 하나 있었는데 이 문을 열면 창고 같은 작은 공간이 나왔다. 그 공간에는 수도가 있었고 연탄아궁이와 가스레인지, 세탁기가 있었다. 욕실과 부엌, 보일러실, 세탁실이 한 곳에 있는 셈이다.
우리 집 출입문을 열면 아주 커다란 마당이 나왔다. 우리 집을 기준으로 양옆으로 비슷한 크기의 단칸방들이 있었는데 나와 내 동생 또래 아이들이 살고 있었다. 오른쪽 제일 끝에는 호랑이 같은 주인아저씨가 사는 주인집이 있었다. 주인아저씨는 술을 드신 날이면 이 마당에 아이들을 집합시켜서 일장 연설 후 동네 쓰레기를 줍게 하셨다.
마당의 한편에는 세입자들이 함께 사용하는 공동 화장실이 있었다. 재래식 화장실이지만 남녀를 구분해서 두 개가 있었고 언제나 고약한 냄새를 풍겼다. 이 집에 사는 동안 화장실 사용이 제일 고역이었다. 동네 아이들과 숨바꼭질을 하더라도 나는 절대 이 근처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냄새도 냄새지만 낡을 대로 낡은 재래식 화장실이 주는 특유의 으스스한 분위기가 싫었다.
이런 걸 가난하다고 표현하나 보다. 같은 동네에 살던 친구의 생일 파티에 초대되어 온 친구들이 우리 집을 들여다보고는 진짜 가난하다며 학을 떼듯 놀라며 말하는 걸 듣고서야 알았다. 가난이라는 걸 몰랐다. 부끄럽다는 생각도 없었고 친구들의 놀라는 반응에 잘못된 것이라는 것만 어렴풋이 느꼈을 뿐이었다. 그때는 그저 동네 아이들과 노는 게 즐거웠고 아이템풀 학습지를 밀리면 안 되는 게 전부였다.
마당 가운데에는 빨래터 같은 수돗가가 있었다. 여름 방학이 되면 엄마는 김장 때나 쓰이는 커다랗고 빨간 고무 대야를 이 수돗가에 꺼내놓으셨다. 그리고 이른 아침부터 대야 가득 미리 물을 받아두셨다. 해가 뜨거워지기 시작하면 늦잠 자고 일어난 동네 아이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미리 받아둔 덕에 햇빛을 받아 미지근해진 딱 알맞은 온도의 물에 우리는 온몸을 맡겼다. 우리에겐 그 고무 대야가 바닷가였고 계곡이었다.
한바탕 물놀이가 끝나면 점심 식사를 하고 그 마당에 다시 모였다. 그늘을 찾아 평상을 옮기고 방학 숙제를 하거나 학습지를 풀었다. 탐구 생활이 밀려있을 땐 누군가의 탐구 생활을 들춰보고는 그날의 날씨를 베끼기도 했다. 주인집에는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어른들의 이야기에서나 존재하는 대학생 오빠가 있었고 고등학생, 중학생 언니가 있었는데 중학생인 막내 언니가 우리들과 종종 놀아주었다. 언니는 방학 숙제도 곧잘 봐주곤 했는데 나는 이 주인집 막내 언니의 도움으로 여름 방학 숙제 중 만들기 부분에서 장려상을 받기도 했다.
운동장처럼 넓었던 마당은 정글 탐험과 같은 신기하고 신나는 놀이터였다. 이름 모를 초록 식물들이 가득했고 커다란 아카시아 나무와 무궁화나무, 도깨비 풀들은 매일 봐도 새로웠다. 그중에서도 여름이면 나팔꽃과 분꽃이 마당을 예쁘게 채워줬는데 특히나 나팔꽃은 다음날이면 밤사이 자라난 줄기 끝이 다른 곳에 자리를 잡고 있는 모습이 신기했다.
여름의 뜨거운 태양과 시원한 여름비에 자연의 역동적인 모습은 어린 내 눈에도 경이로웠다. 식물은 빠르게 자라났고 꽃을 피웠다. 바람에 흔들리는 초록 잎은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개미와 제비들도 빠르게 움직였다. 비가 오기 전이면 개미는 작은 모래 알갱이들을 부지런히 나르며 자신들의 집 입구에 둑을 쌓았고 제비는 제트기처럼 빠르고 낮게 날아다녔다.
여름 방학의 낮 시간을 물놀이와 방학 숙제, 자연 탐험으로 알차게 보내고 나면 아이들은 각자 집으로 돌아가 저녁 식사를 했다. 아이들 소리로 떠들썩했던 마당과 골목도 잠시 쉬는 시간이다. 하지만 이내 해가 지고 깜깜해진 마당이 다시 소란스러워진다. 평상이 우리 집 단칸방 앞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우리 집 뚱뚱이 텔레비전이 마당으로 꺼내졌다. 이 시간은 어른들도 하루의 고된 노동을 끝내고 평상에 자리를 잡는다. 텔레비전이 켜지면 마당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내 다리 내놔!!!"
나는 준비해 온 베개를 꽉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차마 화면을 볼 엄두가 나질 않는다.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만으로도 공포 그 자체였다. 한낮의 무더위까지 싹 날려줄 <전설의 고향> 시리즈 중 단연 으뜸은 '내 다리 내놔' 일 것이다. 혼자였다면 절대 볼 수 없을 전설의 고향은 바로 옆에 친구들이 있고 이웃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보고 난 후 후폭풍은 오롯이 혼자 견뎌내야 했다. 어째서 자려고 누우면 자꾸 생각이 나는 건지 괴로운 밤들이었다. 그럴 때면 잠이 든 엄마의 팔에 살며시 손을 얹고 잠을 청했다.
내 어린 날의 여름은 그렇게 소소한 낭만으로 가득했다. 가난으로 불우했을 수도 있던 시간들이었으나 그것들을 상쇄시켜 줄 만큼 좋은 추억이 가득한 시간들이었다.
나에게 여름은 역동적이고 낭만과 추억이 있는 계절.
그래서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