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보다도 영화 같았던 울산, 포항과 부산에서의 이야기
1. 포항
케이리그 1 포항 스틸러스와 울산 현대 호랑이의 경기를 봤다. 일명 '동해안 더비'라 불리는 포항과 울산의 인접한 지역 간의 라이벌 구도는 한국 축구에서 가장 오래된 라이벌 전으로 엄청난 열기와 혈투를 뽐내왔다. 특히 객관적인 전력차가 울산에 많이 기울었음에도 울산의 우승을 향한 여정에 고춧가루를 여러 번 뿌려가며 방해해온 포항의 기가 막힌 저력이 오늘도 어디선가 튀어나올지 기대가 크게 되었다.
이번 경기에서는 중원 싸움이 정말 이 경기의 백미였다. 울산의 이청용과 이규성 선수는 올 시즌 우승을 향한 여정의 엔진 역할을 톡톡히 해냈고 포항의 신진호와 이승모 선수는 쉽게 지지 않는 저력을 보여줬다. 선제골은 전반 중반 포항의 외국인 수비수 그랜트 선수가 페널티 라인 안쪽에서 범한 핸드볼 파울을 울산의 외국인 공격수 마틴 아담 선수가 페널티킥을 성공하면서 울산이 1:0으로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전반이 마무리되고 나는 이번 경기는 울산이 쉽게 가져갈 수 있겠다 싶었다. 그렇게 경기 전보다는 경직이 풀린 상태로 경기를 단조롭게 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포항이 심상치 않았다. 신진호 선수가 전반보다도 훨씬 더 후반에 힘을 내기 시작했다. 패스의 속도를 울산 선수들이 따라잡지 못했다. 점점 경기를 지배하는 게 보였다. 그렇게 곧바로 고영준 선수가 아름다운 중거리 골을 넣었다. 기세가 오른 포항의 신진호 선수가 볼을 잡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좌우 측면 공격수와 풀백이 점점 울산의 진영에서 머무는 시간이 늘어갔다. 울산이 신진호를 피해 패스로 풀어나갈 즈음이면 이승모 선수가 공을 가로채 곧바로 역습에 나섰다. 결국 이 기세의 전환은 정규 경기 시간 90분이 모두 지나고 추가시간 3분까지 달아올랐다. 경기가 막바지임에도 포항의 용광로는 멈출 줄 모르고 타올랐다.
결국 그 추가시간 3분, 포항의 프로 2년 차 노경호 선수는 교체 선수로 투입되어 하프 발리 중거리슛으로 울산의 골대 그물을 말 그대로 녹여버렸다.
나도 녹았다. 경기 전반부터 아주 천천히 달아오르게 경기를 운영한 포항 김기동 감독의 지략과 이 열기를 울산의 푸른 파도에 맞서 지켜낸 포항 선수들의 정신적인 강인함, 집중력과 포항 선수들보다도 더 희망을 갈구했던 포항 원정 팬들의 함성은 울산 문수 구장을 용광로로 만들어버렸다. 푸른 파도조차 검게 붉은 쇳덩이로 굳혀버렸다. 목소리가 나오지도 않았다. 두 팔을 천장을 향해 크게 들고 입고 있던 티셔츠를 입에 물고 신음을 질렀다. 이번 시즌은 어디가 우승하던 상관하지 않으련다. 이미 이 경기로 나의 케이리그는 최절정에 달아올랐다. 도저히 식지 않을 이 열기가 하루가 지난 지금도 다시 생각하니 가슴을 태우며 숨이 가빠온다. 이번 시즌 최고의 경기를 봤음에 두 팀에게 감사하다. 이 경기의 주인공은 포항이었지만 앞으로 상위 스플릿을 앞두고 울산은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각성의 계기가 되리라 믿는다.
굳이 따로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포항 시민을 위로하는 포항 선수들의 진심이 느껴지는 경기를 생중계로 볼 수 있어서 감사했다.
2. 영화 '퍼펙트게임'
포항과 울산의 경기가 끝나고 저녁을 먹고 나서 티브이 채널을 돌리던 중 추석 특선 영화로 나오는 '퍼펙트게임'이라는 영화를 봤다. 고 최동원 선수 역에 조승우 배우가, 당시 선동열 선수 역에 양동근 배우가 주연으로 나오는 1980년대 부산을 연고로 한 롯데 자이언츠와 광주를 연고로 한 해태 타이거즈가 역사적인 경기를 한 실화를 바탕으로 구성한 영화다. 영화는 롯데 투수 최동원과 해태 투수 선동열을 비롯한 당시 롯데 선수들과 해태 선수들이 각 팀의 에이스를 어떻게 대하는 지에 대해서도 그린다. 9회를 모두 마치고도 승부를 내지 못해 연장전에 돌입한 각 팀의 라커룸에서 나눈 대화는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피가 끓을 것 같은 감동을 준다. 웅장한 음악과 함께 각 팀의 운명을 짊어진 투수의 등을 토닥이며 함께 나아가는 장면은 내가 본 스포츠를 주제로 한 영화 중에서 가장 극적인 연출을 통해 감동을 이끌어 낸다. 포항의 극적인 승리를 생중계로 보고 나서 이 장면을 바로 접하니 포항의 승리가 더욱 감동적으로 느껴졌다.
3. 부산
이윽고 아침에 기사에서 케이리그 2 부산 아이파크와 경남 FC의 경기에 대한 내용을 봤다. 부산 아이파크 소속 공격수 이상헌 선수가 경기 당일 새벽에 모친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경기에 출전해 득점까지 하며 팀의 승리를 이끌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해당 경기에서 MVP로 뽑힌 이상헌 선수는 골을 넣고 나서 하늘을 보며 눈물을 흘렸고 팀원들이 그를 감싸며 함께 위로했다. 이후 부산은 경남의 파상공세를 온몸으로 막아내며 이상헌 선수의 골을 지키며 승리를 가져왔다. 부산의 선발 선수는 검은 완장을 차며 이상헌 선수의 어머니를 애도했고 이상헌 선수가 어머니께 드리는 선물을 승리로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 했다. 아침부터 나도 눈물이 흘렀다. 마음속으로 케이리그 팬으로서,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이상헌 선수를 위로하고 싶다.
스포츠로 느낄 수 있는 인간의 많은 감정을 느낀 몇 시간이었다. 한 경기의 승리에 얼마나 많은 희생과 많은 사람이 염원을 담는지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었다. 그 승리의 맛은 다양하다. 사회인으로서 용기를 얻었고 가족으로 위로를 담았다. 개인의 성취라기에는 갈망이 너무 크고 기쁨을 많은 사람이 나눈다. 그 갈망을 함께 했고 기쁨을 함께 나눴고 슬픔에 함께 울었다. 종목에 관계없이 공정한 경쟁 속에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기쁨과 슬픔을 함께 느낀 하루였다. 벅차다. 연휴의 마지막을 이렇게 기쁘고 벅차게 장식할 수 있어서 이번 연휴는 참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