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바지를 입고 화장을 한 엘 마리아치.
에콰도르에 와서 처음으로 자막 없이 볼 수 있는 영화를 봤다. 출연진, 방탄소년단. 왼쪽엔 어린 학생이 오른쪽엔 나이가 지긋한 아주머니가 앉았다. 내 의자가 음악에 맞춰 한 시간 반 동안 강제로 들썩거렸고 방청객(이라 하겠다)들은 소리도 지르고 손뼉도 치고 마지막쯤엔 눈물도 훌쩍 닦아냈다. 방청객들이 자막을 먼저 읽고 웃어대는 탓에 잘 들리지 않아 얼른 자막을 확인하면 홀라당 없어져 버리는 바람에 정신을 똑띠 차리고 봐야 했던 영화.
‘BTS로 살기 시작한 이후로 단 한순 간도 ‘나’로 살아보지 못했다.’로 시작해 ‘노래가 좋아서 시작했지만, 이대로 살면 행복을 잃는다. 행복해지는 방법을 찾자.’라고 말하며, ‘앞으로 정작 내일 일도 잘 모르겠지만, 나는 여전할 것 같다.’로 끝나는 이야기.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 ‘화양연화’를 다뤘지만, ‘성공한 스타’의 삶에 주목하는 것이 아닌 그저 행복을 찾아가는 보통 청년들의 삶의 이야기.
‘1등 하면 성공한 가수인가요. 내 하고픈 대로 할 게 날 좀 냅둬여.’라고 노래했던 이들이 지금은 ‘잘 사는 법은 아직도 모르겠어.’ 그런데도 ‘나를 사랑하자’라고 노래한다. 그리고 지구 반대편 에콰도르도 이 젊은 청년들에게 공감하고 열광한다. 꿈꾸는 법을 알려주지도 않은 채 꿈만을 강요하는 세상에서 ‘어젯밤 노트북을 사는 꿈도 꿈. 그냥 아무나 되라고’ 노래하는 이들에게 위로받고, 흙수저라 말하는 사람들에게 ‘넌 뭔 수저 길래. 수저 수저 거려 난 사람인데’라며 우리의 심정을 대변하기도 한다. ‘나 자신을 사랑하라’ 메시지 보내는 그들과 내 옆에서 눈물을 훔치는 학생, 그리고 그걸 바라보는 아주머니와 한 공간에 있으면서 문화의 시작은 공감에서부터 시작하는구나 싶었다. 그리고 공감은 보통의 이야기에서부터.
방탄소년단의 UN 연설이 끝나고 동영상 하나가 올라왔다. 보라색 마스크를 벗어던진 에콰도르 청년들의 이야기, ‘Speak yourself’. 그들은 ‘청소년 자살, 10명 중 6명이 겪는 인종차별 그리고 사랑’을 이야기하고, ‘네가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너의 피부색과 성 정체성은 중요하지 않아. 나에게 너의 이야기를 들려줘.’라고 말한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 자신의 눈으로 들여다보는 일. 나와 함께 이 세계를 이뤄가는 타인의 얼굴을 조용히 들여다보고, 서로의 소중함을 깨달아 가는 시간. 이곳에 있으면서 느낄 수 있는 작지만 의미 있는 꿈틀거림.
그리고 얼떨결에 방탄소년단이 가지고 온 또 다른 작은 물결들이 있다. 무스로 머리카락 한 올도 빠짐없이 넘긴 스포츠머리가 아닌 귀를 덮는 긴 머리, 염색을 하고, 귀걸이를 하며 심지어 화장도 하는 남자답지 않은 그들. 무릎 위로 올라오는 반바지와 멜빵바지를 입은 남자. 그리고 자주 눈물을 흘리고 남자 동료들에게 사랑한다고 표현하는, 게다가 서로를 꼭 껴안아 주는 남자들. 뮤직비디오에 항상 헐벗은 여자들에게 파묻힌 남자가 나오는 이곳에선 한국의 K-POP이 얼떨결의 작은 물결이다.
자신을 둘러싼 무수한 편견 속에서 벽을 깨부수고 ‘나’를 찾아가는 청년들의 이야기와 여기저기서 훌쩍거리는 또 다른 ‘나’를 찾아가는 사람들과 함께 한 영화. ‘애국 소년단, 누군가의 롤모델’보단 무릎 위로 올라온 반바지를 입고 화장을 한, ‘엘 마리아치’가 더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왼쪽의 학생도 오른쪽의 아주머니도 보라색 마스크를 집어던지는 날들이 오길 응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