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것이 부정맥이라고 믿고 싶다.
밤에 자다가 깬다. 심장이 떨린다. 왠지 들키지 말아야 했을 짓을 들킨 아이처럼 한껏 들뜬 기분으로 잠에서 확 깨버린다. 왜 그런 거지. 십 분도 안 잤는데 심장이 벌렁벌렁거린다. 오십에 설레면 부정맥이라던데 아마 이건 부정맥일 거다.
왜 나는 들떠 있는 거지. 현실에 발을 못 붙이고 공중에 3센치 정도는 붕 뜬 상태로 요 며칠을 보냈다. 밤에 자면 나는 도쿄의 메구로 강의 어딘가를 걷고 있고, 거기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벤치에 앉아 있다. 거기에서 나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당신이 여기로 온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공항에서부터 올 당신을 메구로 강 어귀에서 기다리고 있다.
만난 것 같기는 하기도 하고 안 만난 것 같기도 하다. 눈동자를 본 건 같은데 사람은 없었다. 나는 잠에서 확 깬다. 지금 몇 시지? 애들 깨워서 학교 보내야 하는데. 내가 알람을 못 들은 건가. 놀라서 깨고 보면 어김없이 새벽이고, 깊은 밤이다. 반드시 이건 부정맥일 수 밖에 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며칠간 마음이 붕 떠 있을 수는 없는 법.
그립고 그리운 마음이 겹겹이 쌓이고 그 위에 눈물과 고통과 억울함이 덮여 부정맥이 된 건가. 나는 현실에서는 존재하지도 않을 어떤 과거에 대해 그리워하고 집착하고 늘 거기로 회피하고 있다. 리얼 삶에서 뭔가 고통이 있으면 나는 어김없이 그 시간 그 자리로 가서 서 있는다. 거기는 늘 나에게 도망갈 곳이며 내 살아가는 이유이며 내가 이 삶을 버텨내고 있는 이유다. 그래서 내가 이 현실의 삶을 덧없어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언제나 거기로 돌아가 서 있는다.
요 며칠 유달리 도망가고 싶었다. 큰 문제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고통이나 폭력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나는 갑갑하고 알 수 없는 미래에 두렵고 도망가고만 싶었다. 아이의 입시가 다가오고 있어서 그런 걸까. 아님 실패가 예상되는 이 길에서 빠져나오고 싶은 걸까. 그건 아닌 것 같은데, 그냥 두려움이 너무 컸다. 나 혼자 감당해 내야 하는 마음의 부담이 너무 힘들었던 것 같다.
다시 그날 그 자리에 서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백 번 천 번 생각해 봐도 나는 그 길을 선택하지 않았을 걸 안다. 하지만 언제나 나는 자주 그 길 위에 서 있는 모습으로, 이십 여년 전의 나로 돌아가 그 길에 서 있다. 좌우 둘러봐도 아무도 없는데, 저 멀리 지하철이 들어오고 있는 것 같긴 한데, 바람이 몹시 불고 뭔가 두려움이 들이닥치기 직전이다. 반짝이는 눈동자만이 기억난다. 지금도 꿈에 나오는 그 눈동자. 내 부정맥은 그 이십 대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심장박동을 세는 기계를 달고 24시간을 보낸 적이 있다. 의사는 별 이상이 감지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사실 이 기계로는 잘 측정이 안된다고 했다. 심장이 심하게 떨리는 걸 느끼는 순간 바로 재 봐야 한다고. 그 이야기를 들은 지 이십 여년이 지났는데 의사는 심장이 떨리면 바로 병원에 가서 재보라는 턱도 없는 얘기를 했다. 그러러면 가까운 곳에 병원이 있어야 하고 그 병원은 응급실에서 나를 바로 받을수 있어야 하고 나는 언제든 달려갈 수 있어야 한다. 부정맥을 인정하고 함께 살아가라는 말인 것 같아 부정맥은 내 삶의 결과물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런데 유달리 요즘 몸이 붕 뜨고 흥분이 된 상태로 심장이 가늘게 떨리고 있는 것 같고 잠에서 자주 깬다. 그리고 그 깨는 순간에는 언제나 메구로 강가. 메구로인지 메지로인지 기억도 안나는데 나는 왜 도쿄에 가서 서 있는 걸까.
이 알 수 없는 흥분 상태는 부정맥이다. 오십이 되어서 설레면 그건 부정맥이라고. 나는 이십 대 때부터 갖고 있던 부정맥을 이제야 활성화시킨 것이다. 아니, 이십 대에 불안했던 그 선택의 자리로 돌아가 자꾸 서있는 걸 보면 나는 이 길에서 지금 벗어나고 싶어하는 것이다. 이 불안감이 익숙하다. 그 때도 그랬고 그 불안감의 끝에는 심장의 떨림이 있다. 쿵하고 내려 앉다가 계속 가늘게 떨리는.
그래. 부정맥일 것이다. 나는 다시는 그 자리고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건 내 마음의 바닥이다. 궁핍하고 보잘 것 없이 낡고 닳은 내 마음. 나는 그 자리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때 나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고 나를 소중히 여기지 않았고 내가 나를 정죄하고 나를 단죄하며 살았다. 그래서 얻은 마음의 병들을 감싸 안고 즐겼다. 내 삶을 그만 끝내버리고 싶었던 그 시절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걸 내가 다짐하고 다짐해야 이 꿈의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나는 메구로 강가에 서 있지 않을 것이다. 나는 더이상 그 긴 기다림을 하지 않을 것이다. 빛나는 눈동자든 썩은 눈동자든 그 눈알들을 다 파버릴 것이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그 음울한 강가가 아닌, 넘실거리고 터질 것 같은 파도 앞에 거대한 대양 앞에 서 있을 것이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더이상 나를 학대하는 것을 즐기면 안 된다.
이런 쓸데없는 독백을 여기다 풀어놓아야 내가 산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이야기. 내 가슴에 켜켜이 쌓여 있는 옛이야기. 나의 우울을 조성하고 있는 그 바닥의 이야기를 나는 이제 여기에 풀어 놓고 좀 자유로워지고 싶다.
이 글을 쓰기만 했는데도 심장이 가라앉는다. 누군가에게 무척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런 쓰레게같은 이야기를 누구한테 해. 괜한 사람 잡지 말고 여기에 나 혼자 보는 이곳에 쓰자. 내 부정맥은 글을 쓰며 치유될 지도 모르겠다.
2023.10.2. 깊은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