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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NA Dec 04. 2015

양평에 갈 땐, 56번을 타고.

눈 내린 이곳은 아름다워요

꽤나 큰 눈이 내린 그 날, 우리 집 앞도 새하얗게 물들어 꼭 다른 세계에 온 것만 같았다. 눈을 보면 이제 정말 겨울의 중간이구나, 하는 마음과 뽀독뽀독한 그 질감에 대한 설렘, 그리고 어딜 가기 힘들어지겠다는 부담스러운 마음이 동시에 든다. 그래도 아직 겨울에 대한 낭만이 가득한 나는, 어디론가 떠나 보기로 한다.


어딜 갈까, 어디로 가야 눈을 잘 볼 수 있을까, 한참 고민하던 차에 생각나는 한 장소, 양평의 두물머리. 우리 집에서 약 한 시간 반 정도 걸리는 이 곳은 한 여름에도 눈부시게 아름다웠었다. 혹한기의 계절에만 아름다운 이 곳은 고생하지 않을 거면 오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기도 하다.  (봄가을에도 아름답긴 하지만 역시 한 여름의 햇살과 햇살에 비추어 빛나는 강물, 옅은 바람에 흩날리던 푸른 풀들을 잊지 못한다.)


그 날 나의 선곡은 총 세 곡. 곽진언 씨가 부른 소격동, 사비나&드론즈의 stay, 보드카 레인의 그 어떤 말로도 라는 곡. 세 곡 모두 시린 겨울과 잘 어울리는 음악이다. 흘러나오는 음악과, 가방의 따듯한 차, 내 두 발을 지켜줄 등산화까지. 완벽한 외출을 위한 준비가 모두 끝났다.


Stay - Savina & Drones

들으면서 보면, 더욱 좋을 것 같아 가져왔다. 몽환적인 음악. :>



1년 전만 해도 한 겨울에 여름 신발을 신겠다고 우기던 내가 생각난다. 왠지 모르게 이번 연도엔 한 여름엔 엄마의 양산을, 겨울엔 등산화를 신고 밖은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단단하고 따듯하게 내 발을 감싸주는 등산화를 여태껏 예쁘지 않다고 멀리했던 작년의 내가 보인다. 발이 꽁꽁 빨개져도 고집을 부렸었는데.


모든 준비가 끝났다면 일단, 집 앞에서 샛터 삼거리, 혹은 외구운 마을까지 가는  마을버스를 타고 한참을 달려 56번을 타러 간다. 이 56번 버스는 나를 두물머리까지 안내할 뿐만 아니라 정말로 기가 막힌 경치를 선사해 줄 오늘의 히로인이다.


샛터삼거리/외구운  마을버스 정류장엔, 사람이 아마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여태 나 역시도 사람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 외진 곳까지, 56번은 꽤나 자주 온다.


사실 두물머리 까지 가는 대중교통은 기차와 이 56번 버스이기 때문에 차로 가는 것이 아니라면 만날  수밖에 없는 버스다. 물론, 아무도 버스를 타고 그곳을 가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버스에 사람이 있는 경우는 드물다. 버스를 이용하는 고객은 대부분 그 지역 사람들이어서, 어느 정도 타고 있을  때쯤 사람이 탄다. 그래도 일단, 올라타면 또 다른 세상이다. 경치만 보자면 마치  관광버스를 탄 것 같다. 이 동네 사람들은 매일 보는 풍경이겠지만, 아름답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햇빛이 비추면 옆의 강은 강렬하게 빛나고, 반대편엔 눈 내린 산이 가득- 한 영화 같은 곳들.


버스를 타고 20분간 달려 만난 경치. 집은 많지만 과연 어떻게 살까, 궁금해지는 곳이다. 앞의 가까운  산부터 뒤의 먼 산들까지 하얀 눈이 내린 산들은 나를 자꾸만 설레게 한다.

이 모든 경치를 1450원에 만날 수 있다. 굽이 굽이, 그리고 울퉁 불퉁한 길을 지나면서도 멀미가 나오지 않을 만큼 아름답다. 과연 여기가 버스정류장이 맞나 싶을 정도로 조악한 곳까지 들어갔다- 나갔다 하는 이상한 노선이지만 그 노선에 감사한다.

그렇게 마을 하나, 마을 두개, 마을 세 개를 지나고 끝없이 아름다운 풍경에 자꾸만 넋을 놓게 된다. 나만 아름다운 건 아니었는지, 내 앞의 여성도 어느 새 손에 핸드폰 카메라를 들고 연신 밖의 풍경을 찍어낸다. 이 동네에 살아도 아름다운 건 마찬가지구나, 싶다. 빛과 거리가 만들어 내는 음영이 마음을 울린다.

한참을 또 그렇게 달리고 달리다가 90도로 꺾어 양수대교라는 다리를 건너게 된다. 두물머리에 거의 다 왔다는 신호다. 한 4-5 정류장을 지나쳐 양수리 차고지에서 내리면 된다.

일단 내려서, 길을 잃지 않도록 주의한다. 이곳까지 왔다면 10분 후 도착이다. 10분을 또 걸어야 한다. 그나저나 이 도로, 너무나 예쁘다. 나 역시 올  때마다 새로운 풍경을 만난다. 매달린 한자 현수막 때문인지는 몰라도 빈티지한 느낌이 가득하다. 해는 나기도 하고 가려지기도 했었는데, 날 땐 나는 대로 가려질 땐 가려질 때 대로 운치 있었다.

그 도로 옆에 좁은 길이 있다. 그 길에서 보이는 풍경 역시 그냥 지나칠 수 없다. 가을 때를 탄 갈대가  겨울바람에 힘 없이 흔들려서일까, 서늘한 마음이 가득하다.

그렇게 10분, 아니 10분 좀 넘게 걸으면 두물머리에 도착. 좋은 경치를 보려면 산책로로 가야 하기 때문에 두물머리 깊은 곳으로 들어간다. 눈이 잠깐 멈추어, 쉽게 걸을 수 있나 했더니 또 눈이 오기 시작한다. (아래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다.)


산엔 눈이 가득- 다른 나라에 온 것만 같아 마음이 설렌다. 가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이 곳. 흔적은 있지만 가을의 정취는 없다. 매서운 바람과 낮은 온도로 겁을 준다.

내 앞의 많은 갈대들, 멀리 보이는 눈이 덮인 산, 흩날리는 눈발- 집에서 멀리 가지 않아도 이런 풍경을 볼 수 있음에 한없이 감사하고 또 감사한다. 우산도 어디엔가 잊어버려서 나를 막아줄 건, 하나도 없었지만.


예전엔 굵고 짧은 삶을 원했다. 큰 성공 이후 약 60살 언저리가 되면 편안하게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고 그 생각은 한 3년간 지속되었었다. 요즘,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들을 마주하면, 큰 부유, 혹은 지위나 명성 모두 필요 없으니 그저 움직일 수 있는 몸과 적당한 돈만 가지고 늙어도 꽤나 즐겁지 않을까 생각한다.



금빛의 잔디들 역시 독특하다.


눈 내리는 겨울, 강 위에 남아있는 지난 계절의 정취가 자꾸 내 마음을 들춘다. 추워 죽겠는데도 자꾸만 카메라를 잡게 하고, 놓으려 하면 또 아름답고. 발자국을 떼는  곳마다 나를 찍어달라고 아우성이다.

폭신해서 주저앉을 것 만 같은 구름이 마지막으로, 이렇게 그 날의 기록은 끝이 난다. 눈이 또 온다면 한번 더 가 볼 생각이다. 중간에 만난 마을이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아서 다시 가 볼까 생각했을 땐 눈이 너무 녹아있었기 때문이다.


오늘의 여행, 56번은 안녕이다. 이런 마을에 살면 참 좋을 텐데, 싶으면서도 조악한 교통편 때문에 실제로 살 순 없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인적 없는 버스정류장, 사람이 적은 버스, 사람이 사는지도 모를 정도로 조악한 시골마을, 따듯하고 포근한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이 여행이라고 외치는  듯했던 짧은 여행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 따듯한 물에 목욕을 하며 시원한 차를 마시는 여유를 가진다. 천국이- 따로 없다. 하루 종일 천국만 같다. 너무나 매서운 바람 속에서도 아름다운 그 장면을 보게 해 주었던 그 곳도, 온몸을 나른하고 뜨겁게 감싸는 이 곳도.




교통이 편해지면서 조금 깊은 곳은 다들 차를 타고 이동하지만, 가끔은 버스를 타 보는 게 어떨까.  울렁울렁,  덜컹덜컹 조금 불편할지도, 또 훨씬 느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느리게 가면서 차로 갈 땐 알 수 없었던 다양한 장소의 매력을 느낄 수 있고, 그 마을을 훨씬 더 잘 알 수 있게 해 준다.


또 눈이 내린다면 버스를 타자. 등산화와 우산, 그리고 따듯한 차가 담긴 보온병을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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