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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병목 Jul 16. 2022

아이 잡는 엄마표


2008년~2010년 현장 강의를 바탕으로 2011년 경에 써둔 원고가 있습니다. 오랫동안 묵혀두었습니다. 다시 읽어보며 고쳐 쓰고 있습니다. 원고가 부끄럽지 않으면 출간하려 합니다. 




1.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집콕 놀이’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집콕’은 주로 유아 부모나 유치원에서 쓰는 말이고 여전히 ‘엄마표’라는 말이 표준이다. 구글 검색창에 ‘엄마표’를 치면 현재 기준 1220만 개의 결과가 검색된다.


2. 2000년대 중반부터 ‘엄마표’ 열풍이 불었다. 2001년 경 신문에 ‘엄마표’라는 말이 처음 등장하여 2003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그 즈음에 『잠수네 아이들의 소문난 영어 공부법』이 출간되었다. 온라인 교육 정보 사이트 ‘잠수네 커가는 아이들’ 이신애 대표가 직접 썼다. 잠수네 출신이지만 솔빛이네 엄마로 더 잘 알려진 이남수 씨도 책을 냈다. 이런 책들이 출간되면서 각종 ‘엄마표’ 서적들이 줄줄이 출간되기 시작했다. 벌써 20년도 더 된 일이다.


3. 영어를 전공하지 않은 엄마가, 심지어 영어를 한 마디도 못하는 엄마가 아이를 영어 영재로 길러냈다는 성공 신화는 엄마들의 마음을 순식간에 사로잡았다. 그 흔한 해외 연수 한 번 보내지 않고 영어 영재로 키운 것은 충격이었다.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고 관련 서적들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를 따라하려는 부모들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4. ‘엄마표’라는 말은 엄마가 직접 학습 지도한다는 의미를 넘어, 엄마가 만드는 음식이나 물건에 이르기까지 두루두루 안 쓰이는 곳이 없게 되었다. ‘엄마표’는 대한민국 엄마들에게 매우 신선한 충격이었다. 

5. 사교육의 효과를 의심하던 의식 있는 학부모들은 ‘엄마표’야말로 진정한 교육이라고 생각하여 너도나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그 비싼 사교육비를 아낄 수 있고, 해외 연수를 보내지 않아도 되고, 엄마의 정성만 있다면 큰돈 들이지 않고도 아주 공부 잘하는 아이로 키울 수 있게 되었다.


6. 평범한 학부모들에게 ‘엄마표’ 성공 사례는 위대한 발견이었다. 불안에 떨고 있던 학부모들에게 전에 없던 희망의 메시지였다. 영어에 이어 수학과 독서, 과학에 이르기까지 이제 엄마의 힘만으로도 모든 과목을 지도할 수 있도록 친절한 ‘엄마표’ 학습 지도서가 줄줄이 출간되었다. 『○○네 독서법』, 『○○맘의 자녀교육』 식의 엄마표 성공 사례가 책과 신문, 방송을 통해 소개되었다. 방황하던 엄마에게 나침반이 생겼다. 하고 싶어도 하는 방법을 몰라서 속만 태우던 시대가 드디어 끝이 났다. 서점에 수많은 ‘엄마표’ 지도서가 쌓여갔다.


7. 영어는 듣기가 우선이라 했다. 그래서 날마다 영화 영상을 보여줬다. 수학의 틀린 문제는 꼭 다시 풀고 넘어가라고 해서 매일 아이와 씨름했다. 그 무엇보다 중요한 건 어릴 때부터 다진 광범위한 독서 습관이라 하여 책 사는 것만큼은 아끼지 않았다.


8. 그런데 웬걸, 그 마법의 지도 방법이 우리 아이에게는 소용이 없다. 솔직하게 말하면 제대로 따라오지 못하는 아이가 미웠다. 아이와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지치고 화가 많아졌다. ‘책에는 분명 원어 영상을 보여주면 좋아한다는데 우리 아이 표정은 왜 저러지?’, ‘뭐야? 세 달이나 봤는데 듣기 실력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잖아.’, ‘이거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지? 남들은 벌써 다음 학년 선행 들어가고 있는데… 너무 뒤처지는 게 아닐까?’


9. 빠릿빠릿하지 못한 아이가 실망스럽다. 슬슬 불안해진다. 선한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아이와 티격태격하다 보니 아이와 사이도 멀어진 듯하다. 다정한 엄마가 되고 싶지만 아이에게는 독한 엄마로만 비쳐질 뿐이다. 기적의 ‘엄마표’ 교육은 현실에서 번번이 참패한다. 


10. 공부를 잡아야 하는데 아이를 잡고 있다. 어설픈 ‘엄마표’는 차라리 시도하지 않느니만 못하다는 교훈만 얻은 채 남들처럼 결국 학원에 아이를 맡겼다. 학원에 보냈지만 마음이 불편하다. 


11. 한때 '엄마는 가장 좋은 선생님'이라는 광고 카피가 유행했다. 한석규, 김희애, 신애라 등 쟁쟁한 스타들이 “엄마는 가장 좋은 선생님입니다”라고 말했다. 광고는 따스했고 카피는 강렬했다. 유·초등 학습은 엄마가 적극적으로 챙겨야 한다는 인식이 더욱 강해졌다.


12. 엄마는 선생님이 아니다. 엄마는 엄마일 때 가장 아름답다. 선생님 노릇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엄마는 엄마여야 한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아니라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바로 맺어질 때 선생님 흉내라도 내볼 수 있다. 공부에서 부모의 역할은 생각만큼 크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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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2010년 현장 강의를 바탕으로 2011년에 처음 정리하고, 2022년 7월 16일에 고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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