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실격의 주인공이 되다
서영이는 워너원이라는 아이돌그룹의 열성 팬이다. 그 또래 여자 아이들이 그러하듯이 서영이도 연예인에 푹 빠지기 딱 좋은 사춘기 소녀이다. 나도 서영이 또래였을 적에는 좋아하던 여자 탤런트가 있었다. 이 모양이라고... 안주머니에 그녀의 사진을 수십장씩 모아서 가지고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난 서영이 또래의 아이들이 연예인에 열광하는 심리를 잘 알고 있고 이해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빠인 나도 워너원이라는 오빠들에 관심을 가지려 나름 노력을 했다. 열한명이나 되는 비슷비슷하게 예쁘장하게 생긴 소년들의 이름을 외우는 것도 나로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도 이제는 일고 여덟명 정도는 이름과 얼굴을 매칭할 수 있으니 이정도면 훌륭하지 아니한가!
나름 관심을 두고 노력을 기울여도 이정도라니...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점점 연예인들의 정보에 둔감해지고 누가 누군지 봐도 알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내가 학생이었을때에 우리 부모님도 꼭 같은 입장이었을 것이다. 아주 예전에 아버지는 가요탑텐 같은 쇼프로에서 여가수들이 나와서 춤추고 노래하는 걸 보면서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저런 저런, 저렇게 여자들이 텔레비전에서 홀딱 벗고 나와서 춤추고 하는 걸 방송으로 해주니 애들이 뭘 보고 배우겠어? 쯧쯧....!”
그리고 우리 어머니는 그 당시 조용필에 빠져서 방 벽을 온통 용필이 오빠 사진으로 도배해 놓은 누나에게 이렇게 소리지르셨다.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용필이 오빠가 밥을 맥여주냐 대학을 보내주냐!!”
아이돌에 열광하는 것은 10대들의 자연스러운 현상인 것을 나도 잘 알기에, 나는 서영이의 그런 팬심을 백분 이해한다. 그래서 나름 성실한 팬으로서의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조력해주고 싶었다.
서영이가 워너원의 광팬이 된지 얼마되지 않아 워너원의 앨범이 나왔다고 하길래 나는 폼나게 “알았어! 아빠가 사줄게” 라고 말했다.
사이트에 들어가서 검색을 하자 같은 이름의 제품이 수십개가 나타난다.
“... 이중에서 뭘 사야 하는거지??”
“이거랑 이거랑 이거!”
서영이는 색깔만 다르고 가격은 같은 세가지의 앨범을 가리켰다.
“이거 같은 거 아냐? 노래도 다 똑같네.”
“아냐! 안에 사진 화보랑 스티커랑 포스터가 다르단 말야. 이거 세 개 다 사야돼.”
".......????"
이즈음에서 요즘 이러한 아이돌 상품 마케팅의 작태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지 않을수가 없다.
같은 노래를 담은 앨범을 세가지로 만들어서 팔다니. 아이들의 심리를 악용한 정말 치사하고 속보이는 마케팅이 아닌가.
예전에는 좋아하는 연예인의 사진을 모으거나 책받침으로 코팅해서 가지고 다니거나 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문구점이나 지하상가에서 연예인들 사진을 장당 50원에서 100원 정도면 살 수 있었고, 그렇게 하나 둘 모아서 책상 앞에 붙여두거나 노트에 붙여서 고이 간직하던 시절이 있었다.
물론 옛날 스타들도 광고에 출연했고, 앨범을 발매했다.
순수한 팬심으로 내가 좋아하는 스타가 광고하는 과자와 아이스크림을 사먹었고, 용돈을 모아 레코드와 CD를 사면서 설레는 마음으로 빨리 들어보려고 집으로 달려가곤 했다.
요즘 아이돌 마케팅은 그 성격이 많이 다르다. 아이스크림을 열 개 사면 포스터를 준다고 해서 똑같은 아이스크림 열 개를 산 적도 있다. 과자 속에 들어있는 프로필카드에서 내가 원하는 스타의 얼굴을 보려면 열 개건 스무개건 계속 과자를 사려는 굳은 의지가 있어야 한다. 스타의 캘린더를 받을 수 있어서 우리 동네엔 없는 치킨집을 찾아서 돌아다녀야 한다.
아무튼 요즘 문화가 그러하니 불만은 많지만 미주알 고주알 그런걸 지적하자니 왠지 혼자 꼰대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그냥 참고 또 참았다.
속으로는 IOI처럼 프로젝트 그룹인 워너원이 하루빨리 해체해서 사라져주기를 바라는 마음만 몰래 간직한채로 말이다. (이러다가 팬클럽들에게 테러당하는 건 아닐까 모르겠다)
그런 워너원이 드디어 활동을 중단한다고 한다. 실로 기쁜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역시 위대한 워너원! 마지막 콘서트를 성대하게 치르고 떠난다 한다.
난 서영이와 약속했다. 일등을 하면 콘서트에 보내주겠다고. 그리고 이 독한 딸래미는 밤새서 공부하더니만 결국 일등을 하고야 말았다. 기쁘고도 씁쓸했다.
어느날 밤 서영이는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트*터와 중*나라와 페이*북 등을 뒤적이더니 티켓을 구했다고 나에게 소리쳤다.
스탠딩석 좋은 위치의 자리인데 20만원. 이미 몇 번의 경험으로 그 자리정도면 나중에는 30만원에서 50만원까지 올라갈 것임을 알고 있던 나는 상대방의 계좌와 전화번호, 티켓 인증 캡처등을 확인하고 입금을 하기 위해 폰뱅킹을 열었다.
잔액 12만 8500원
잉?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최근 며칠사이에 계좌조회를 한 일이 없어서 무슨일이 벌어진 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최근 내역을 살펴보니 어제 보험료와 자동차 할부금이, 오늘 카드값과 대출금이 차례로 빠져나갔음을 알았다. 게다가 며칠 전에 밀린 물품대금을 치르느라 목돈이 나간 게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월말이 다가오는 이 시점이 사실은 내가 가장 돈이 궁한 시기이다. 누군가는 월급이 통장에 찍혔다가 그냥 스쳐 지나간다고 하는데, 자영업자인 나는 매일 벌어서 매일 스쳐지나가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아무튼 큰일이다. 이미 12시가 가까워오는 시간. 서영이는 나를 재촉한다.
“아빠 뭐해? 아직 안보냈어? 다른 사람한테 팔기 전에 빨리 해!!”
돈이 없어서 못보낸다는 말을 어찌 다른 사람도 아닌 딸래미에게 할 수가 있겠는가.
주머니엔 현금이 있었지만 이 상황에선 다 소용없는 것이었다. 어떻하지? 어떻해야 이 위기를 모면하지? 하며 머리를 굴리는 내 얼굴은 이미 약간 벌개져 있었다.
‘카드로 현금서비스를 받을까?’
‘앞에 편의점에 가서 현금을 입금하고 다시 보낼까?’
그 짧은 순간에 머릿속에서는 여러 가지 방법론들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 모든 방법들은 옆에서 “아우 아직도 멀었어?” 하며 자꾸 내 핸드폰으로 머리를 들이밀면서 보채는 서영이의 목소리에 파묻혀서 사라져 버렸다. 시간이 없는 것이다.
할 수 없다. 최후의 방법은 잠들어 있는 아내에게 부탁하는 것이다.
나는 서영이에게 “일분만 기다려봐. 지금 인터넷뱅킹이 에러가 자꾸 나.” 라고 뻥을 치고는 조심스레 안방으로 들어갔다. 아내는 이 상황을 마치 알고 있으니 귀찮게 하지 말라는 듯이 이불을 머리 위까지 덮어쓰고 자고 있었다. 순간 또 마음이 울렁였다. 콘서트 티켓을 사주는 것도 아직 말 안한 일인데다가 오밤중에 자는 사람을 깨워서 티켓 사게 돈을 보내달라고 해야 하다니! 그것도 일분 안으로 말이다.
분명히 아내는 그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냐고 할 것이고 무슨 티켓을 어디서 어떻게 사는 것이냐는 질문부터 시작해서 직거래를 어떻게 믿고 돈을 먼저 보내느냐 할 것이며 왜 나에게 그 돈도 없냐고 까지 물을 것이다. 자다가 깬 터라 잘 뵈는 것도 없을 것이고 설명해 줘도 이해하는데에도 평소보다 더 걸릴 것이다. 딸 앞에서 돈이 없는 거나 아내 앞에서 돈이 없는 거나 똑같이 남자 자존심에 금가는 일이다. 나는 아내의 머리맡에서 오초 정도 가만히 서서 내려다 보고 있었다.
“왜...?”
깨우지 않았는데 아내가 먼저 이불속에서 말을 걸었다.
“... 그게.. 지금 서영이 콘서트 티켓을 사려는데 이체가 안되네. 당신이 좀 보내주면 안될까?”
나는 다음번에 나올 질문들에 대한 답을 어떻게 하면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할 수 있을지 궁리하면서 운을 떼었다.
헌데 아내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서영이에게 계좌번호를 묻더니 바로 폰뱅킹으로 입금을 하는 것이 아닌가. 빼꼼이 열린 안방 문을 사이에 두고 나는 그 광경을 보면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아내는 송금을 마치고 나서 다시 방으로 들어오면서 나에게 말했다.
“확실히 확인한거지? 월말이라 돈이 없는거야? 돈 나가는 날짜를 좀 조절하던가 해야지 갑자기 돈 쓸일 생기면 어쩌려고 그래.”
나는 아무 대답을 하지 않고 방을 나왔다.
서영이는 이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싱글벙글 하며 나에게 말했다.
“아빠 아까 돈 없어서 못 보낸거야? 아니 어떻게 20만원도 없냐. 하하하. 아빠가 나보다 돈이 더 없네. 아무튼 고마워 아빠.”
인간실격이라는 소설이 있다.
일본의 다자이 오사무라는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은 소설인데 작중에서 주인공 요조라는 청년이 술집의 마담인 여자와 함께 어느 찻집에 가서 계산을 하려고 지갑을 열었는데 동전 세닢밖에 없는 것을 보고 여자가 말한다.
“어머, 겨우 그게 다에요?”
그 말을 듣고 남자는 뼈에 사무치는 굴욕을 느끼고 그날 밤 그 여자와 함께 강에 뛰어들게 된다. 여자는 죽고 남자는 살았지만.
나는 순식간에 인간실격의 주인공이 된 느낌이었다. 얼굴이 벌개지고 후끈거렸다. 무엇보다도 남자로서, 남편으로서, 그리고 아빠로서 사랑하는 여인들이 필요로 하는 무언가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음에 심한 무력감과 수치심을 느꼈다. 큰 금액도 아니었으니 그 창피함은 더욱 커졌다. 인간실격의 요조는 분명 자살할 만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피로감이 갑자기 몰려왔다. 서영이는 분명히 아무 생각없이 한 말일테고 여전히 티켓을 구한 기쁨에 들떠 싱글벙글하고 있었다. 나는 그냥 씩 웃어주고 방으로 들어갔다. 소주가 갑자기 심하게 땡겼지만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아내는 다시 이불을 머리위로 뒤집어쓰고 자고 있었다. 아까의 긴급상황에서 구구절절한 설명을 생략하도록 해준 것이 새삼 고마웠다. 나는 아내를 가만히 끌어안았다. 아내는 뒤척이며 돌아누웠다. 눈을 뜨고 있었다.
“당신 때문에 잠 다 깼잖아. 콘서트 보내준다고 약속한거 왜 나한텐 말을 안해? 자기만 점수 따고 후한 아빠인척 하고 뒤처리는 내가 하라는 거야? 그리고, 저렇게 돈 먼저 보내다가 사기라도..”
난 다시 이불을 아내의 머리 위까지 푹 덮어 씌워 주었다. 이불 속에서 바둥거리는 아내를 꼭 붙잡고 말했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마마”